아픔에 대하여 - 몸과 병듦에 대한 성찰 철학자의 돌 5
헤르베르트 플뤼게 지음, 김희상 옮김, 이승욱 해제 / 돌베개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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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일기장에서 이런 구절도 인용되었다. “참된 인식의 첫 조짐은 죽고 싶다는 생각이다. 이 삶은 참을 수가 없으며, 다른 삶에 이를 길은 없어 보인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더는 부끄럽지 않다. 싫기만 한 낡은 감방에서 새 감방으로 옮겨달라고 부탁한다. 새 감방은 보자마자 싫어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남은 믿음으로 감방을 옮겨 가는 동안 주님이 복도에 나타나 지켜보며 이렇게 말해주리라 상상해본다. ‘이 사람은 다시 가두지 말라. 그는 나와 함께 가리라.’”(『만리장성의 건설』, 215쪽)



요컨대, 환자 N은 자신이 병들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는 아프다고 투덜대지 않는다. (-) 고령의 그에게 세계는 그저 고단할 따름이다. (객관적으로 대사부전 상태에 빠진) 심장이 아니라, 배고픔, 어리석은 마사지, 추위, 계단, 친구를 찾아보려는 희망 따위가 잘못이다. 그런 일탈을 원한다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치러야 한다. 환자 N은 계단을 오를 때의 호흡곤란을 만취한 다음 날 아침의 깨질 듯한 두통처럼 여기며 감수했다.



(-) 통증 말고도 그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창밖에 펼쳐지는 전망 좋은 풍경이었다. 이 ‘아름다운 전망’을 견딜 수가 없어 그는 병실의 블라인드를 올리지 못하게 한 날들이 적지 않았다. (-) 

(-) 눈으로 본다는 행위는 언제나 대상으로 ‘건너감’이다. 이처럼 ‘대상과 만나기 위해 길을 간다는 것’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조건이다. 이 조건은 의도된 동작, 시선뿐만 아니라, 비록 그 정도가 약하기는 할지라도, 쓱 훑어보는 눈길, 꿈에 젖은 눈길에도 적용된다.

심장병 환자가 풍경을 ‘견딜 수 없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창밖을 내다보는 눈길이 아름다울수록, 환자는 그만큼 더 고통스럽다. 자신이 병을 앓은 경험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환자 Z도 원칙적으로 같은 의미를 말한다. “세계는 경사와 계단이더군요. 그런 장애와 부딪치지 않고는 어디도 갈 수 없어요. 정상적인 사람은 물론 모르는 사실이죠.” 산책을 마치고 힘들어하는 환자 B의 말도 같은 뜻을 담았다. “세상에는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사람들만 있더군요. 힘들어하지도 않아요. 힘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그들을 지켜보는 것이 정말 괴로워요.”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도달할 수 없는 풍경을 바라보며 생겨나는 심장의 아픔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심근경색 환자가 눈으로 본 것에서 특히 고통을 느끼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앞에 있는 것, 앞으로 맞이할 것, 그것이 창을 통해 보는 산이든, 미래의 계획이든, 이 모든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환자는 (-) 현명하게 포기하거나 체념하는 것을 아직 먼 일로 여긴다. 그러나 이처럼 순전한 기쁨을 주는 것이 대용이나 대체라는 성격으로 변질될 위험은 상존한다. 그래서 환자는 남용이나 심지어 중독이라는 위험에 빠지기 쉽다.



심장병을 앓는 아이들은 자신이 느끼는 불편에 거리를 둘 수가 없어 지금 내가 묘사하는 것보다 더 자세한 것을 결코 말할 수 없다. (-) 아이는 10분, 20분 혹은 30분 동안 ‘뭔가 이상하다’. 그러나 아픔도, 압박감도, 답답함도, 호흡곤란도 느끼지 못한다. 이런 경험이 얼마나 답답한지, 자신의 체험을 말로 정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하는 것은 (-) 심장의 심각한 박동 장애라는 후유증에 시달리는 아홉 살 소녀의 사례가 잘 보여준다. 소녀는 매일 아침 활달하게 일과를 시작한다. 명랑하고 생동적이어서 친구들과 즐겁게 잘 논다. 그러나 소녀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한 시간만 지나면 놀이를 함께 할 수 없다. 그럼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눕는다. 왜 놀이를 중단했느냐고 물어보면 소녀는 “지루해졌어”라고 말한다. (-)

이 심장병 아동은 ‘심장 없음’뿐만 아니라 ‘말 없음’으로 아픔을 감당할 뿐이다. 아이는 아픈 심장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아픔의 종류가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 아이는 그저 불특정함, 애매모호함에 머무를 뿐이다. 아이의 아픔은 규정되지도, 현상의 형태로 나타나지도 않으며,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직 ‘언어로 무르익지 않은 것’이 아이의 아픔이다. 심장병 아동은 자신의 아픔을 오로지 태도의 변화로만 표현할 뿐이다.


_헤르베르트 플뤼게_아픔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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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친 페미니스트 여자친구 나비클럽 소설선
민지형 지음 / 나비클럽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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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과의 사랑 가능한가?˝(정희진) 이 주제로 강의 못 들은 아쉬움을 이 책으로 달래보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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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혹은 여행처럼 - 인생이 여행에게 배워야 할 것들
정혜윤 지음 / 난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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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선생님들이 장래 희망을 써내라고 했다. 나는 장래에 관한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 당시 수년 동안 내가 제일 좋아했던 것은 포도 밟기였다.


우리 집에선 해마다 포도를 따서 포도주를 담그곤 했다. 마당 수돗가에서 호스로 물을 뿌려가며 포도를 씻고 그 포도를 커다란 함지박에 담고 소주를 붓고 설탕을 적당히 넣은 다음 엄마는 나에게 “들어가라”고 말했다. 그때마다 나는 보라색 보석이 가득한 우물에 들어가는 심정, 혹은 연약한 다리로 햇빛 반짝이는 호수 물을 탐하는 소금쟁이가 된 심정으로 포도 알맹이를 살짝살짝 밟았었다. 그때의 포도알은 닳고 닳아 부드러워진, 그러나 그 밑에 맑은 샘물을 감추고 있는 달콤한 돌멩이 같기도 했고 사막에 물과 꿈같은 오아시스를 만들어주는 보라색 꽃 같기도 했다.


일그러진 포도도 청아한 소주를 통해서 보면 맑고 향기롭기 그지없었고 햇빛을 받으면 어두운 몸체에서 빛이 났었다. 포도들은 그 빛이 어디서 오는지 당장은 알 수 없어서 몸을 떨며 전율할 것이기 때문에 그 포도들을 결코 터뜨리고 싶지 않았다.



__




나는 당신이 어디에 있건 당신을 찾아가는 소리의 이미지, 특히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 기대도 희망도 없는 빈 순간에 소박하면서도 비밀스럽게 파고드는 이미지에 매료되었다. 나는 라디오를 사랑의 박물관, 용기의 박물관, 슬픔의 박물관, 온갖 말로 표현 가능한 가치, 측정 불가능한 가치의 박물관, 이야기의 박물관,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이로움과 덧없음에 바쳐지는 박물관처럼 운영해보고 싶었다.


나는 마치 작곡가가 음악에 대해 꿈을 꾸듯 좋은 피디가 되고 싶은 꿈을 꿨었다. 라디오에 대한 내 입장에 통일성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런던 여행기에 쓴 대로 추운 겨울에 한강에 나가 벌렁 드러누워버렸다. 그리고 팔베개를 하고 하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저 하늘에 뭐가 있기에, 내가 하는 말이, 내가 듣는 생각들이, 길거리의 이야기들이, 슬픔과 기쁨이, 내가 트는 음악이, 낮과 밤의 하늘 속 정적을 날아서 장터, 작은 밤, 지하실, 도로, 시골 교회, 소나무숲, 강, 섬, 국경 너머로 날아가는 것일까? 나는 보이지 않는 누구에게 말을 걸어야 하지? 내 말을 듣는 당신 누구지요? 당신은 새가 날아간 흔적처럼, 금방 변해버릴 구름처럼 그렇게 내가 붙잡을 수 없는 대상인가요?


(-)


입장은 정했으나 어떻게 해야 좋은 매개체가 될 수 있을까? 나는 한계에서 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라디오는 기본적인 한계가 있다. 즉 나는 보고 있되 나의 청취자는 보지 못한다는 그 명백한 한계가 나를 규정했다.


한때 BBC 방송국의 피디였던 조지 오웰은 에세이집 『나는 왜 쓰는가』의 「시와 마이크」 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방송에서 청취자는 어차피 어림짐작이지만 ‘단’ 한 사람 같은 존재다. 수백만이 듣고 있을 수도 있지만, 각자 혼자 듣고 있거나 작은 그룹의 일원으로 듣고 있으며, 그 각자는 방송이 자기에게만 개인적으로 얘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혹은 받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방송하는 입장에선 청취자들이 공감하거나 최소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여겨도 무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따분한 사람은 언제든 채널을 다른 데로 돌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이 말은 아마 라디오 피디라면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스튜디오에 앉아서 큐 사인을 주고 ‘온 에어’ 붉은빛이 들어오면 우리는 점점점 단 한 명의 보이지 않는 청취자에게 말을 거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


볼 수는 없지만 명백히 존재하는 단 한 사람, 너무나 내 맘을 잘 알고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단 한 사람, 그런 사람이 저 벽 너머에 있다면 누군들 자기가 아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오로지 상상력만이, 청취자와 공감하려는 상상력만이 라디오 피디들의 노동을 의미 있게 하고 라디오 피디란 직업을 존재하게 하고 구원한다는 것을 점차로 알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 의성의 한 마을에 귀농한 부부를 취재하러 간 일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마당 한가운데에 무쇠 냄비를 꺼내놓고 장작불을 지펴 두부를 삶아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뜨끈뜨끈한 두부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해 질 녘이었다. 그때 옆에선 닭이며 병아리가 오종종거리고 있었고 마당 뒤켠에선 소의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왔다. 천진한 눈망울의 소가 음매음매 울 때 더운 입김은 부엌의 먼 불빛을 받아 마치 지상에서 하늘로 오르며 흩어지고 녹아내리는 눈송이 같았다. 나는 소의 턱 밑에 앉아서 소 울음소리와 소의 입김을 녹음했다. 나는 소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야, 소야, 더 자주 울어. 더 자주 울어야 해. 입김을 더 기운차게 뿜어야 해. 푸? 푸?”


소는 10초 이상의 간격으로 울었다. 음매와 음매 사이가 5초 이상 넘어서면 곤란했다. 소리와 소리 사이에 5초 이상 공백이 있으면 청취자들이 소리 없음에 불안해하기 때문에 나는 다시 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야, 소야, 자주 울어, 자주. 음매? 음매?”


나는 소의 입김을 과연 녹음할 수 있었을까? 나방이 날갯짓을 할 때 미세하게 떨리는 공기를 잡아내듯 소의 입김이 흔들어놓은 공기의 떨림을 녹음할 수 있었을까? 나는 다음날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볼륨을 최대한 올리고 음매음매를 반복해서 들었다. 음매음매 소리는 뒤로 끌려가면서 날아오르는 뭔가를 연상시켰다. 음— 매에에에— 밤하늘에 뭔가가 날아가고 있었다. 하루살이가 날고, 나방 한 마리가 날고, 한번 날면 다시는 땅에 내려오지 않는다는 새처럼 소의 입김이 날고. 그런데 혹시 소 역시 솥단지에서 올라가는 김을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을까? 소 역시 달을 보며 송아지의 꿈을 꾸기를 소원하고 있었을까? 배춧잎 뒤에서 달팽이 한 마리가 우리 몰래 꿈을 꾸듯이.


나는 사실 소의 입김을 녹음하지 못했다. 그러나 방송을 들은 사람들은 누구나 소리와 소리 사이에서 아련한 소의 입김을 떠올렸다. 그때 소의 입김 소리는 청취자들이 내면의 귀로 들은 것이었다. 소리와 소리 사이에서, 그 여백의 시간에 청취자들이 섬세하게 복원해낸 소의 입김은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들, 아주 오랜 시간 잊어버린 채 생각도 않고 있었던 것들, 그러나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각인되어 있는 것들, 그래서 뜻하지 않는 순간에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다시 살아나는 어떤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있다. 위대함과 진리는 결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나에게 상상력은 이렇게 정의된다. 관계없는 것들을 연결시키는 것, 수학적 명제로 바꾸면 ‘X이면 Y이다’ 같은 것, 관점의 이동을 요구하는 것. 내 직업의 한계, 보고 있어도 보여줄 수 없음, 그 불완전함 때문에 나는 인간 내면의 풍요로움과 정신의 힘, 그 상상력에 대해 믿음을 갖게 되었고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떠났다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을 찾아내며 돌아오곤 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인간 전체와 동화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겐 비밀 릴테이프가 있었다. 아날로그 시절 라디오 방송은 모두 릴테이프에 녹음되는데 녹음 당시의 헛기침, 코 훌쩍거리는 소리, 이상한 발음은 녹음 후에 모두 편집된다. 이상하거나 불필요한 소리들은 모두 방송용 가위로 잘라내는데 미장원 바닥에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생각하면 된다. 어느 날 나는 그 잘려지고 쓰레기통에 들어갈 머리카락 같은 릴테이프 조각들을 모아 붙이기 시작했다. 코 훌쩍거리는 소리와 헛기침과 침 삼키는 소리, 이상한 발음과 말더듬만으로 이뤄진 릴테이프의 길이는 점점 늘어나 그 길이가 60분가량이 되었다. 그후 우울한 날이면 편집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 누덕누덕 붙인 릴테이프를 듣곤 했다. 나는 그 릴테이프에서 늘 이런 소리를 들었다. 누구나 하는 실수, 수줍음, 어수룩함, 부끄러움, 다시 잘해보고 싶은 마음, 짧은 시간에 회복되는 용기, 최선을 다하려는 절박함, 동의와 감탄과 존경을 끌어내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흥분. 그 소리들을 들으며 나는 또 인간의 갈망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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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 김언 시론집
김언 지음 / 난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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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좁아서 더는 좁아질 것도 없는 구석에서 자라는 상상의 끝은 다시 너무 넓어서 희박해질 대로 희박해지는 한 존재를 떠올린다. 그것은 한 사람이면서 한 여자이고 한 여자이면서 숱한 인간들의 흔적이 녹아서 만들어진 복수의 존재. 단지 몇 사람의 흔적이 아니라 수십 수백만의 숨결과 눈물과 속삭임이 한곳으로 흘러들어 만들어진 존재. 도시 전체를 뒤덮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존재이자 하나의 윤곽으로 그 여자는 걸어다닌다. 어떤 도시를. 어떤 거리를. 그리고 뒷골목을. 배회하듯이 유랑하듯이 도시의 이곳저곳에서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그 여자를 뭐라고 부를까. 일단은 ‘그 여자’라고만 부르자. 몇 년 전의 어떤 소설이 그렇게 부르면서 시작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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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비슷한 것은 눈물이 되지 않는 시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16
김상혁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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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벌레를 싫어한다. 물론 벌레를 좋아하는 사람이 흔한 것도 아니겠지. 나는 새우를 먹지 못하는데, 몇 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 내가 새우 접시를 눈 앞에서 치웠더니, 그걸 보고 한술 더 뜨던 선배 시인이 있었다. 존경하는 시인이므로 실명은 생략하고, 하여튼 그가 말했다. 상혁아, 새우, 그렇지, 새우가 좀 그렇지. 맞아, 저게 바닷속에 있으니까 새우네? 하고, 맛있다, 굽는다, 우리가 하는 거지. 저게 땅에서 산다고 생각해봐, 상혁아! 저게 땅을 기어 다니는 벌레였다고 생각해봐, 상혁아. 새우, 그렇지, 새우가 마룻바닥을 기어 다니는 벌레라고 생각해봐. 이 말을 듣고 있자니 정말로 속이 안 좋았다. 새우를 먹지 않는 나의 취향이 이런 식으로 이해받기를 원한 건 아니었는데. 그때 이후로 나는 새우를 보면 벌레가 떠오른다. (-)

하여튼 길에다 곤충, 벌레 이름을 가져다 붙이는 행정 권력도 있는 것이다. 여기는 풍뎅이길 말고도 고추잠자리길, 오색나비길, 참매미길, 여치길, 소금쟁이길이 있다. 몇 년 전까진 풍뎅이길 아니고 법흥리였는데, 이건 우선 발음이 쉽지 않았다. 범흥리요? 아뇨, 법흥리요. 법응리? 아뇨, 아뇨, 헌법할 때 ‘헌’이오, 흥겹다 할 때 ‘흥’이오. 전화로 주소를 불러주면 보통 이런 식이었다. 도로명주소가 확정된 이후에도 많은 이들이 구주소를 사용한다. 나는 도로명주소 변경 통보문을 받은 그날 즉시 풍뎅이길을 사용하였다. 이제 전화로 집 주소를 불러주면 저쪽에서 따뜻한 말이 돌아온다. 파주, 풍뎅이길요? 이름 참 예쁘네요. 그 풍뎅이요? 그러면 나도 부드럽게 응답하게 된다. 네 맞습니다, 그 풍뎅이. 풍뎅이길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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