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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법 ㅣ 문학동네 시인선 137
채길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평점 :
유전 법칙
아버지는 내게 빌려간 사만 삼천 원을 오만 원으로 갚아준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에게 만 원을 되돌려주고
아버지는 내게 오천 원을 다시 주고
나는 아버지에게 삼천 원을 내준다
우리는 조금씩 더 관대하게
너무 산술적이지 않도록
쌍방에게 모른 척을 해준다
에누리 없이 다가가
손 없이 건네는 잔돈들로
언젠가는 이 놀이가 지겨워지겠지
더 작은 것으로 나뉘지 않는
당연하고 지루한 사칙연산으로
지난날의 총합들이 우리를 계산해준다면
평균이 영일 때
우리는 겹쳐 있을까
아예 몰랐던 사이보다 멀어져 있을까
아버지는 영이 될 수 없는 분모
나는 그 위에 올라선다
아버지가 커지면 전체가 작아지고
내가 커지면 흔들거리는 생활 속에서
최대 최소의 공약수와 공배수를 따져가며
나이를 먹는 동안
우리는 닮고 닳은 각자의 수식들을
피부로 만든 연습장에 기록하고 쪽수를 넘겨왔다
서로가 약분되어
더 작은 것을 가지지 못할 때
내게 아이가 생기겠지
아버지와 아이 사이가 한없는 점들로 이어지는
하나의 선분을 긋고
나는 아버지에게서 내려온다
그리고 영 될 수 없는 부모가 된다
아버지는 이제 허리가 휘고
흔적뿐인 분자가 비어
값은 거의 영에 가깝다
아버지에게 아이를 업히면
연약한 체중에도 휘청한다
아이는 계속 자랄 것이고
무용해진 지폐를 찢듯
얇고 가벼운 몸의 몫을 거스르며
삶도 나머지를 살아가게 된다
열 명의 인물이 모여
다른 한 위인의 동일한 가치가 되는
그런 수학은 잘해본 적 없지만
아이 열을 합해선 왜 한 아버지가 될 수 없는지
유일한 아이로 자라나더라도
어째서 아버지 열 명은 가질 수 없는지
내가 정말 태어나려 하고 있었다
만유인력
버스 창틀에 먼지인가 했는데 거미다
안내 방송은 정류장마다
어디까지 가니 내릴 수는 있겠니
모퉁이를 돌자 손잡이가 기울어지고
질량을 가진 것들 사선이 되어
골똘히 어긋난 노선을 생각하는데
어깨에 골반을 기대오는 수줍은 것들이
두시 방향 가속도가 되었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시간
문득 창틀이 비어 있다
거미인 줄 알았는데 먼지였구나
흔들리는 인간은 손잡이를 잡고
거미는 줄을 엮어 투명을 감추고
먼지는 질량을 가졌지만 자주 공중에 뜬다
우리에겐 아직 지나친 정류장이 남았으므로
여기 함께 있는 힘
자기 이외의 물질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를
만유인력이라고 해
벨을 누른다면 수십 개의 붉은 태양이
떠올라 이곳의 궤도를 알려주겠지만
버스는 내가 진짜 원하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준 적이 없다
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닿을 수 있는
눈을 떠도 불편하지 않은 물속 같은
무중력이란 불가능한 걸까
달리는 중인데도 갇힌 게 분명한
버스 안에서
창에 비친 햇살이
나인가 했는데
반짝
침이 고이고
가장 먼 곳을 가리키며
나와 둘로 나뉘지 않는
그림자가 일어선다
성급한 브레이크의 관성이
그쪽이 아닌 방향을 향해
떠오르는 우리를 은근히 밀어 멈추면
보이지 않는 실에 걸린 진공의 밖에서
문이 열리고
겸손한 물성으로 내려앉은
먼지보다 작은 퇴적들이
어떠한 그물에도 들키지 않은 채
버스에 올라타는 곳으로부터
나는 어디서든 내릴 수 있다
당장 누군가와 함께
혹은 혼자서라도
종점을 지나 영원히 갈 수 있고
눈을 감아
잠들 수가 없을 땐
꿈꿀 수 있다
까맣게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면 좋다
아버지는 이제 향기 나는 홍차도 잘 드시고
치즈가 가득 든 크림빵도 기꺼워하시고
육천 원짜리 단맛 나는 싸구려 포도주도
나와 같이 즐긴다
회사 업무라거나 아버지 어릴 적 한참을 걸었다던 자갈밭
언덕과 바다 풍경 아버지 이십대 삼십대
나 꼬마였을 때의 지나간 오랜 날들이
빛바랜 사진 속에서 얼굴 없이 기화해
햇살과 함께 어렴풋한 어지러움으로 퍼진다
따뜻한 홍차의 아지랑이처럼
텁수룩한 포도주의 취기처럼
인생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나는 진짜로 그렇게 묻고 아버지는
사는 게 그냥 고다 고 하고 대답하신다
죽기 위해 움직이는 장기 말처럼
부모는 자식을 위한 부속품에 불과할지 몰라도
누구도 원해서 시작한 게 아닌
이 뻔한 역할놀이와 성긴 포진에서조차
나는 수를 물리지 않고선 아직도 아버지를 이기지 못해서
언제든 낡은 판은 허물고
아버지와 마주앉아 다시금 시작하게 된다
자기 말은 먹을 수 없는 규칙처럼
재갈을 물고 아버지는 내게 막힌 길목들을 버릴 거지만
아버지가 술에 취해 돌아오신 날
내 앞에선 토하지 않겠다며 화장실 문 꼭 닫고 억억거릴 때
뚝뚝 끊어지는 말더듬의 행간으로 버려진
소화되지 못한 단어들로는
평생을 고쳐도 부족하여 결국엔 미완성으로 남을
한 편의 긴 비문처럼
우리의 생애도 열망도 끝없이 수리할 수 있다면
아버지가 영원히 산다면
내가 아버지의 너무 멀리 뒤처진 비유이거나
허술한 특허로 복제된 불완전한 소유물일 동안
각자의 가장 불편한 자유를 다해
먼저 찍힌 흐릿하고 여유로운 발걸음을 지나서
아버지에 관한 이유가 더이상 나 때문은 아닐 때에도
나는 아버지의 치유가 되고 싶다
나는 치유받고 싶다
정확히 똑같았던 신장에서 아버지가 점점 작아져
이제 나는 아버지보다 머리통 하나 정도 키가 크지만
매일매일 짧아지는 연필처럼
매일매일 새로 깎은 연필처럼
금박으로 새겨놓은 이름마저 벗겨지고 잘려나간 뒤
곱슬대는 머리카락으로 흩어진 부스러기들을 털어버리면
그리하여 더는 다듬을 수 없을 만큼 줄어들어
올바로 쥐고 글 쓸 수 없어도
여전히 흑심과 나무 냄새 그리고 아름다운 파란색에
빨강으로 칠해진 처음의 본질을 그대로 지닌 채
앞으로는 부러지지도 만료되지도 않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의
지루해도 절대 고장나지 않는 몽당연필처럼
하얀 변기 뚜껑 위에 앉으신 아버지의 숱 듬성한 백발을
염색약 묻힌 칫솔로 새까맣게 빗겨주며
무뎌진 흑연 같은 뒤통수에 대고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는
닳아 투명해진 소용돌이가 또 한번 휘감겨 물결이 일고
뭉클한 호흡과 몽롱한 생각들을 내려보낸
가운데가 텅 빈 그림자에 닿은 외통의 자리와
맑고 깊어 먼 데까지가 다 비치는 동심원에서부터
사각사각 빛나며 지워질 듯 떠오르는 이 어두운 글자들이
우리는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