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할 때만 나는 살아 있다 문학동네 시인선 142
안주철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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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지에서 반쯤 꺼내다/밥상 위에 올려놓은 삼겹살은/나보다 나를 더욱 깊이 이해하면서/낮은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다(「눈동자」 부분)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내가/왜 눈물을 흘리는지 모르는/한 마리 구석이 될 때(「비가 오겠다」 부분)


우리는 아직 조금 남아 있다/없는 것처럼(「너는 나인 것 같다」 부분)


개가 되려고 결심하면/이제 침을 흘리고 남의 집을 지키면서도/인간보다/더 인간다워질 수 있다(「변신」 부분)


야!//알지 못하는 사람이 소리를 질러도/그게 나일 것 같아서 두렵고(「내가 나에게 묻는 저녁」 부분)


늑대가 되어 돌아온 편지를 읽지 않기 위해/내 앞에 있는 늑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이 세상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슬픔을/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고민하기 시작하면서(「늑대」 부분)


내 입으로 아버지, 밥을 먹는다//건방진 아버지//이제 죽어서 혼내줄 수도 없고/새벽까지 원망을 늘어놓을 수도 없는데//아버지 내 입으로 밥을 먹는다//허락도 없이/씹지도 않고(「건방지게 깐죽거리면서」 부분)


기억에 남을 시련도 없는 생을 살았다/끝까지 차례를 지켜가며 누구나/만나게 되는 불행을 겪으며 살았을 뿐이다(「불행에 대한 예의」 부분)


(-)끊은 손을/아버지 묘에 가만히 놓아둘게요 죽으니깐 부끄러워서/묘를 열고 나오지도 못하는 아버지 저 갈 테니깐/무덤 속같이 밖이 캄캄해지면/나와서 손톱 깎고 그 자리에 제 손을 놓아두세요/술 처먹고 풀숲에다 버리지 말고(「아버지를 사랑함」 부분)


내가 나를 사십 년째 넘고 있지만/넘고 있다는 사실을/사십 년째 성실하게 까먹고 있다//살아 있는 것이겠지?//내 나이를 가끔 아내에게 물을 때가 있다/사춘기인 아이는 내 나이를/한참 넘어/먼 곳을 바라본다//그곳이 어디인지 모르지만/꼭 한 번은 가보고 싶다//내 나이를 가끔 거울에 비추어볼 때가 있다/나이에도 앞뒤가 있고/좌우가 있을 것 같다//금간 거울을 또다른 작은 거울에 비추자/두 개의 거울이 동시에 깨진 것 같다(「내가 나를 사십 년째 넘고 있다」 부분)


내가 인정하지 않는 것들이 나를 살게/한다는 생각을 구름이 환해지듯이/옥상이 서서히 드러나듯이 한다//만나면 때려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사람도/나를 살게 한다//어쩌면 내가 이 생에서 그토록 원했던 것도/근근이 하루하루를 견디기 위해/미워하고 사랑한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는지 모른다(「역겹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


결국 아버지 죽었다/병생 병든 채 살았고/반전 없이 마지막도 병들어 죽었다//아버지가 죽었는데/왠지 나의 일부를 끌고 간 느낌이 든다/그게 무언지 알 수 없지만//아버지 죽을 때 가지고 간 게 도대체/뭐예요?/죽으면서 저승에 뭐 들고 가는 사람이/어디 있어요?(「궁금할 때마다 밤이다」 부분)


더 아름답고/더 멀리 세상 밖으로 달아난 사람에게/밥은 먹었냐? 이런 말을 걸고 싶을 때가 있다/밥은 먹으면서 달아나고 있냐?(「아름답다」 부분)

 

버스가 설 때마다 할머니들이/버스 계단을 느리게 세면서 올라온다/자기 안에 남은 나이를 거의 다 꺼내버린/사람들의 표정은 때로 만지고/싶을 만큼 아름답다(「여행의 끝」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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