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표현된 불행 - 황현산 평론집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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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은 흔히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고 말한다. 작품에 대한 이해를 꾀하고 그 역사적 맥락을 정리하는 해석의 기능과 미학적이거나 윤리적인 관점에서의 그 적절성 여부와 한계를 지적하는 기능이 그것이겠다. 한쪽이 작품에 대한 지식으로서의 비평이라면 다른 한쪽은 평가로서의 비평이다. 두 기능은 당연히 상보적 관계에 있지만, 한쪽이 다른 한쪽을 옥죄기도 한다. (-) 비평가가 늘 잊기 쉬운 것은 그가 자기 동시대 작가의 작품을 지식으로 정리할 때도, 그  한계를 지적할 때도, 그가 작가보다 우월하거나 앞선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작가와 같은 지적 풍토에 살며 작가와 똑같이 자기 시대의 주관성에 갇혀 있으며, 작가가 문제와 해답을 만날 때, 그도 문제와 해답을 만난다. (-) 작가와 비평가가 다르다면 그것은 문제와 해답을 만나는 방식과 제기하는 방식이 다만 다를 뿐이다.


비평가는 작가의 말이 늘 지식으로 환원되기를 바라지만, 작가는 자신과 마주선 문제가 이제까지 알려진 경험이나 지식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로 덮어 가려져 있다고 생각하기에, 또는 그 지식이나 경험으로 내내 문제삼았던 것이 다른 방식으로 벌써 해결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에 시를 쓰고 소설을 쓴다. 비평가는 작가가 제기하는 문제와 해답이 진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마땅히 제기되어야 한다고 가장 먼저 공적으로 확인해주는 사람이다.


세계에는 어떤 질서가 있겠지만, 그 질서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하게 파지할 수 있는 인간의 지성은 없기에, 인간과의 관계에서 세계의 질서는 무질서와 다르지 않다. 지식의 체계란 이 무질서한 세계를 분별하고 정리하여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일 터인데, ‘지식으로 분별되는 세계’는 ‘분별하는 지식’만큼 확실한 것이 아니다. 분별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와 인간의 관계일 뿐이기에 분별의 뒤에는 희생되는 어떤 것들이 항상 남아 있다. 지식과 말이 권력이 되는 이유도 본질적으로 거기 있다. 지식과 말이, ‘세계’가 아니라 ‘세상’과 관계될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통용되는 지식의 체계에는 어떤 사실을 그렇게 분별하기로 하는 정식계약과 그렇게 분별하기로 ‘양보하는’ 이면계약이 있다. 두 계약의 틈새에서 제도와 풍속이 갈리고, 법과 윤리가 갈린다. 그것들은 각기 그 나름의 말을 만들어내고 권력을 창출한다. 그러나 정식계약이건 이면계약이건 계약 속에 들어가지 못한 것들, 희생된 줄도 모르고 희생된 것들이 있다. 그것은 지식체계의 원죄와도 같고, 정신적 자유의 본질적인 구속과도 같다. 아름다운 것이건, 슬픈 것이건, 놀라운 것이건, 경이로운 것이건, 어떤 것 앞에서 누군가가 ‘이루 형언할 수 없다’고 말을 하게 될 때, 그리고 그가 성실한 사람일 때, 그는 그 희생된 것들 앞에 서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가 그 ‘이루 형언할 수 없음’을 문제로 발견하고, 계약의 파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계약을 재조정하여 인간을 헛된 계약에서 해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그는 시인이거나 소설가일 것이다. 문학의 미학도 윤리도 형언할 수 없는 것과 한 인간의 관계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면, 벌써 역사 속에 편입된 텍스트도 아닌 문학 현장에서 생산되는 작품을 이미 정리된 이론체계 속에 구겨넣으려는 비평가의 시도가 자못 끔찍한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것은 계약을 잘 읽어보라고 보험회사 직원처럼 말하는 것이고, 계약은 벌써 빈틈이 없다고 법관처럼 말하는 것이며, ‘그러니까 네 말은 이 말이지’ 하는 식으로 경찰처럼 윽박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혼종이니 다성적이니 하는 말을 내세워 작가의 말을 갈피 잡아 들으려 하지 않는 어떤 종류의 비평 습관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시도는 많은 경우 텍스트에 대한 비평가 자신의 무능을 빠져나갈 수 없는 계약에서 빠져나가려는 작가의 잔꾀의 탓으로 돌리는 일이 되기도 한다. 비평이 그 시대의 텍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한계 안에 갇혀 그 밖을 어렵사리 내다보면서, 형언할 수 없는 것이 형언되려는 그 계기의 성실성과 진정성을 확인하고, 그 터전 위에서 자기에게도 정신의 구속인 계약의 그물망을 넓히거나 그 체계를 변혁하기 위해, 세상과 작가 사이에 이론적 매개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또다른 권력이 되거나 주어진 권력의 울타리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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