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
유성원 지음 / 난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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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유성원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 북토크 

2020년 8월 8일 저녁 7시 30분 위트앤시니컬 사가독서

사회 오은


(앞부분 생략)


오은: 출간 이후에 뭐가 좀 달라졌나요?


유성원: 이 책을 내기 전에는 많은 망설임과 갈등과 고민이 있었어요. 이 책이 처음에는 작년에 독립출판물 형태로 <아무도 만나지 않고 무엇도 하지 않으면서 2014~2016>라는 제목으로 선보여졌을 때는 출판사가 볼끼책방이라고 되어 있는데 제가 기르는 고양이 이름이 볼끼예요. 그래서 없는 책방 이름을 만들어서 혼자 북토리라고 하는 출판물 인쇄업체에서 만든 책인데 그러다보니까 제가 하다가 더 안 찍어야지 하면 안 찍을 수 있고 홍보나 그런 것도 혼자 하면 되었는데 정식으로 책이 나온다는 건 너무 많은 사람들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인 거예요. 지금도 뒤에 자리를 지켜주시고 계신 최원석 마케터님도 있고 회사에 일하고 계신 편집자나 관리부의 책 출고 담당하시는 분 그리고 만들어주신 디자이너 선생님들도 있고. 책을 내기 전에는 그런 게 큰 부담이 돼서 이걸 하지 말까라는 생각을 정말 데이터 넘기기 전까지도 했었던 거 같아요. 책 내용 자체가 대중들에게 사랑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이걸 읽으면 나를 욕할 거고 나의 가족에 대해 편견을 갖게 될 거고 회사 혹은 저와 같이 일하는 필자 선생님들조차도, 저의 보고 싶은 면만 봤던 사람들에게 나라는 사람이 굉장히 불편해질 수 있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있어서 그런 걱정을 계속 안고 있었어요. 신간이 나오면 저희가 출판사와 계약된 몇몇 필자 선생님들께 서명을 해서 책들을 보내드리거든요. 이런 책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공유하는데 그런 과정에서도 부담이 됐죠. 사실 뵌 적 없는 분도 있고 만나고 좋았지만 개인적인 신념이나 여러 이유로 이 책을 혹시 싫어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런데 막상 책을 내고 났더니 빨리 팔아야 되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보내게 되더라고요. 주변의 몇 안 되는 친구들에게도 책이 나왔다면서 서점 링크를 보내고 팔아달라고 하게 되고. 그런 적극적으로 공세적인 면을 띠게 됐다는 거? (웃음)


오은: 실제로 보낸 분들 중에 성원 작가님하고 가까운 분이었는데 이 책을 받고, 읽고 피드백 온 것 중에 혹시 기억에 남는 게 있을까요?


유성원: 사실 저도 편견이 있었어요. 작가 선생님들이 저와 같은 또래가 아니고 저보다 연배가 훨씬 위이거나 부모님보다 나이가 많으시거나 하는 경우에 이런 걸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는 편견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어떤 시인님 같은 경우는, 한국의 나이든 남성 시인분이셔서 동성애에 대한 적나라한 기록을 보고서 굉장히 싫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읽고 나서 저에게, 책을 보내주어서 잘 읽고 있다고, 평소에 보여주었던 따뜻함 속에 있는 소금바다를 엿본 것 같다면서. (웃음)


오은: 저는 그래서 이 책을 성원 과장님이 필자로서가 아니라 직장인으로서 제 행사에 한번 온 적이 있어요. 전주에서 행사를 했었는데 어머니께서 전주에 계시니까 제가 책을 한 권 드렸더니 어머니께서 저녁에 책을 쭉 읽으시다가 화들짝 놀라서 덮어버리셨다고 해요. 제게 전화로, 은아, 그때 같이 왔던 친구, 사연이 많은 친구더라, 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아, 저희 어머니 세대, 예순이 조금 넘는 나이의 또래분들에게는 굉장히 낯선 경험일 거예요. 그리고 사회에서 규정해놓은 정상성의 범위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수용하는 데까지 시간이 좀더 걸릴 수 있겠다, 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너무 하루에 세 꼭지씩 읽는다고 연락을 해주셔가지고.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여기 묘사된 것들을 상상으로까지 연결시키지는 못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어쨌든 다양한 의제들, 성원 작가님이 쓴 현상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통해서 지평이 넓어지는 것 같다라고 얘기하셨어요. 그 말이 제게 굉장히 좋았던 것은, 우리가 청소년기에 지평을 넓혀야 돼, 새로운 곳에서 양분을 흡수해야 돼, 라고 이야기를 종종 하곤 하지만 평생 교육이란 말처럼 평생 이렇게 지평이 조금씩 넓어지는 삶이 더 좋은 삶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성원 작가님의 이 책이 우리가 흔히 보수적이라고 일괄해버리는 분들, 또는 어떤 면에서는 진보적이지만 동성애만큼은 벽을 치고 있는 분들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같이 가져보았습니다. 

지금 작가로서도 북토크를 하고 계시지만 편집자로서 사실 난다의 유일한 편집자였어요. 한동안. 얼마 정도의 기간이죠 그게?


유성원: 한 일 년 반 정도?


오은: 그런데 편집자로서의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김민정 시인이 난다 대표거든요. 김민정 시인의 매니저 역할도 하셨고 난다의 필자분들을 다 관리하시고 엄청나게 바쁜 삶을 살고 계신데 그 와중에도 가끔씩 밥을 먹고 카페에 가 있으면 한쪽에서 교정지를 보고 계셨어요. 그래서 마음이 많이 아팠는데 다행히 올해 난다에 신입 편집자가 두 분 들어와서 이제 성원 과장님이랑 같이 일을 하게 되었는데요. 편집자로 일을 하면서 내 책을 만들 때의 느낌은 좀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까 말했던 볼끼책방의 볼끼, 성원 작가님께서 키우는 고양이 이름이라고 하는데 편집에도 볼끼가 들어가요. 본인 이름 넣기가 무안해서 넣은 것 같기는 한데 어쨌든, 만드는 사람에서 써서 내 책을 출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잖아요. 그건 좀 어떤 느낌이었어요? 


유성원: 저 같은 경우는 문예창작학과를 나왔는데요. 원래 전공은 경영학을 했었어요. 처음 대학을 갔었을 때는, 그런데 계속 십대 시절부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집에서 취직이 되는 과를 가라, 상경 계열이 좋다더라 해가지고 그때만 해도 제가 글을 쓸 수 있다는 구체적인 생각이 없어서 정해주는 대로 갔다가 적응을 잘 못해서 다시 문예창작학과로 갔는데 그래서 항상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왜냐면 다른 사람들한테 말할 수 없고 보여줄 수 없는 부분을 글로는 표현할 수 있었고 그런 것들을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내가 나의 삶을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모든 저의 이야기를 할 수는 없잖아요. 난 이렇게 살았고 이런 사람이야, 할 수 없는데 글을 쓴다는 건 그런 나의 어떤 삶의 한 단면을 포착해가지고 삶의 진실 같은 걸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문예창작학과에 갔는데, 어려웠죠. 이게 어떤 신춘문예, 문예지 신인상 이런 부문에 투고를 했지만 저 스스로도 글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고 당선도 되지 않았죠. 계속 떨어지고. 신춘문예 시즌이 되면 모든 신문사에 다 보낼 정도로 한 해 동안 시를 써가지고. 


오은: 시를 썼었어요? 처음 안 사실이네요.


유성원: 네. 시를 많이 썼는데. 그러다보니까 결과적으로는 항상 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의도치 않게 편집자로 일을 시작하게 됐고, 편집자를 하면서 다른 작가님 책을 만들면서 갈증이 계속 있었던 거예요. 남성과 여성의 이성애적인 사랑 이야기 같은 것을 만들고, 제가 봐야 하는 소비해야 하는 콘텐츠도 다 그런 이성애자가 기본값이고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거고, 남자와 남자는 친구고.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항상 볼 때마다 저는 그걸 이중으로 한번 더 생각해야 하거든요. 남자-여자 관계를 남자-남자 관계로 머릿속으로 필터링을 한 번 해서 본다거나 근데 이런 것들이 좀 답답했고 내가 갖고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라고 생각했는데 당시만 해도 이걸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 몰랐어요. 공적인 승인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작가가 되는 방법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춘문예 등에서는 계속 떨어지고 있었고 저 스스로도 이런 식으로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이 없었어서.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제가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스스로 계속 의문이 있었어요. 이걸 왜 사람들이 읽어야 될까? 이 낯설고 불편하고 나의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고 이런 게 서점이나 이런 데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도서관 한쪽에 꽂혀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것 같은 사람들이 다수인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 곳에서 내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발견하면서 이게 천천히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그렇게 고민했던 시간이 계속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처음 회사를 다니다가 그만두게 된 것도 이런 것에 대한 불일치, 내 안의 쓰고 싶은 욕망, 쓰는 사람으로서 살고 싶다는 마음과 계속해서 그러한 노력을 다른 작가의 글이나 그런 것들을 만드는 데 투자하면서 보내는 것이 저한테는 좀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뭘 써야 하고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발견할 시간이 필요했다고. 


오은: 퇴사 이유를 저는 처음 들었습니다. 이성애자 서사, 이런 것들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 그런 걸 쓰는 사람들의 글들을 읽고 편집하는 삶을 살다보니까 나 자신하고의 불일치, 그리고 불화 같은 것이 생겼기 때문에 그만두셨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그다음에 제가 처음에 유성원 작가님께서 퇴사할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해요. 저는 이제 몸을 쓰는 일을 하고 싶어요, 라고 했다고 하는데 아예 그러니까 활자와 멀리 있고 싶었던 건가요?


유성원: 그렇죠. 이제 편집자로 일하면 항상 쓰는 일이 많고, 간단한 보도자료부터 시작해서 텍스트가 필요할 때 그걸 생산해내야 하는데 그걸 대충 쓰면 안 되고 또 그 작가를 가장 잘 알고 있어야 되고 그 작품의 첫 독자로서 사람들에게 해석할 지점들을 던져줘야 하고 그런 생각이 늘 있어서 대충 쓸 수는 없고 취미처럼은 쓸 수 없다보니 투자해야 하는 절대적인 시간이 있어서 제가 쓰고 싶어하는 글을 쓸 시간을 확보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다른 일을 하고 싶다(생각하게 되었고). 편집자는 무형의 일을 하다보니까 책을 보며 오탈자를 찾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이 표현을 쓰면 되는지 안 되는지를 고민한다거나 어떤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회사 입장에서는 이 사람이 무능해 보일 수 있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10쪽을 교정보라고 하면 30분 만에 오탈자를 확인해서 주는데 어떤 사람은 그 10쪽을 붙들고 일주일을 볼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런 상황 속에서 신입사원 혹은 막내로서 어느 정도로 중심을 잡아야 하는지 잘 몰랐고 그러다보니 야근을 밥먹듯하게 되는 거죠. 이게 왜냐면 다른 사람은 아홉시 출근해서 여섯시 퇴근할 수 있는데 나는 이걸 더 봐야 한다고 생각해서 하는 거니까 이건 야근을 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해서 하는 거였고 근데 그게 지속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었죠.


오은: 가방이 항상 뚱뚱했어요. 뭘 잔뜩 가지고 다니셨던 거 같아요. 제가 예전에 처음 만났을 때 행사장에서 이렇게 보면 그때도 일감을 엄청 가방에 넣고 오시지 않았을까 싶네요.


유성원: 일감도 일감인데 항상 노트북이 있었어요. 뭘 쓰는 건 아닌데 노트북이 없으면 불안한 거예요. 그래서 노트북과 충전기와 기타 이런 것들을. 사실 가볍게 다닐 수도 있었는데 굳이 무겁게 다니면서 의식하고 있었죠. 써야 된다는 걸.


오은: 그렇게 해서 어쨌든 그런 기록들이 모였기 때문에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이 나올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희가 위트앤시니컬 사가독서에서 진행되는 북토크는 낭독을 많이 하는 편이어서 오늘 제가 유성원 작가님께 몇 개 부탁을 드렸어요. 첫번째로 저희가 이야기해야 되는 챕터는 큐시트에 의하면 쓰기와 살기인데 이미 시간이 삼십분이 흘러버렸네요. 하지만 시작합시다. 쓰기와 살기에서 어떤 부분을 읽어주실 건가요?


유성원: 네. 전 30쪽에 있는 3F라는 꼭지를 읽고 싶어요.


갇혀 죽어가는데 입이 없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방법을 다 써보지만 그 희망이 무용한 모습을 보고 싶다. 그 희망이 물에 가라앉아 죽어가는 저 사람을 구할 수 없는 희망인 채 빛나는 걸 보고 싶다. 그 빛이 물에 빠져 죽어가는 상태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는 걸 체험하면서 스스로 물 밖으로 기어나와야 하는 사람에 대해 쓰고 싶다.

행위와 감정은 별개고 내가 어떤 감정 상태이든 육체는 그 행위를 ‘할 수 있다’. 외롭다는 말을 바꿔서 보고 싶다고 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한다. 보고 싶다고 하면 보고 싶어지는데 볼 수 없으니까. 할 수 없는 일들은 아예 생각 안 한다. 말은 그래서 헷갈린다. 외롭다, 라고 말하면 정말 외로운 것 같다. 하지만 외로운 게 아니라 누가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럼에도 ‘외로운’ 것 같다. 말해진 것만이 내 감정 같다. 사실이 아닌데도. 앞으로 자살하고 싶을 때마다 자살하고 싶지 않다고 고쳐 써야지. 외롭다고 말하고 싶을 때에도 외롭고 싶지 않다고 고쳐 써야지.


오은: 제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책 전체를 관통하는 감정이 뭘까 생각했어요. 비애 그러니까 슬픔이 진득하게 묻어나는 책 같은데 이 슬픔이라는 게 어쨌든 개인이 다 짊어지고 결국은 해결해야 하는 그런 슬픔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늘 허기가 딸려오더라고요. 먹는 이야기도 참 많이 나오잖아요. 가볍게 여기 나오는 무수히 많은 먹거리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유성원 작가님에게 걸맞은 음식이라고 생각하는지 여쭤보고 싶네요. 맥도날드부터 김치찌개까지 굉장한 라인업을 자랑하고 있기도 하거든요.


유성원: 네. 제가 정말 주로 혼자 다니는 경우가 많다보니까 혼자 가서 먹을 수 있는 것들 중에 덜 부담스러운 걸 고르다보니 패스트푸드라든지 그런 메뉴들을 고르게 되는데요. 저는 맥도날드의 더블1955버거를. 패티가 두 장이어서 더블이거든요. 구운 양파에다가 양상추, 신선한 야채가 듬뿍 들어가는데 굉장히 기름져요. 한입 베어먹으면 안심이 돼요. 괜찮다, 다행이다, 이걸 먹을 수 있다니.


오은: 스트레스를 받거나 슬플 때 폭식을 하게 되잖아요. 그런 어떤 이야기처럼도 읽혔어요. 내가 외로운데 이 외로움을 어떻게 달랠 길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짜 행복을 어떻게든 찾아서 해낼 수밖에 없는데 프랜차이즈 24시간 하는 데 가서 더블1955 같은 걸 먹는 게 간편하면서도 당장은 시름과 외로움을 잊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다 읽으면 비애가 가득한 책인 거 같으면서도 외로움이라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 껴안고 가야 한다고 느껴지게 되더라고요. 어떤 책을 보면 외로움은 자기가 자신을 잘 다스리고 극복해야 하는 감정처럼 이야기하는데 그러지 않아서 좋았던 거 같은데 외로움을 껴안고 가는 좋은 팁 같은 걸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유성원: 저는 2020년이 되어서 글을 정리하면서 제가 하나 착각하게 되는 게 있어요. 뭔가 내가 나아졌다, 아니면 달라졌다 성장했다 이런 식이 전혀 아니고 제가 동일하게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순간이나 상황에 놓인다면 이때와 똑같은 감정과 위기를 느낄 거라는 점을 배우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시간을 지나오면서 내가 어떤 것에 감정적으로 어려워하는지 어떤 상황에 내가 놓이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 그런 것들을 기록해나가는 과정에서 그런 목록들을 파악했고 그래서 거기에 노출되지 않도록 디자인해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지금도 동일하게 똑같이 여기 기록된 어떤 순간에 놓인다면 나는 성장했으니까 아무렇지 않아 이런 게 아니라 여전히 똑같이 나한테는 아프거나 괴로울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오은: 보통은 약간 자기계발서처럼 외로울 때마다 5분 명상이 도움이 됩니다. 이런 말을 해줄 줄 알았는데 진솔한 이야기여서 더 와닿네요. 두번째 글, 아까 소리 내어 말하기의 한 부분 읽어주신다고 했어요. 102페이지.


유성원: 


나는 혼자이고 혼자라면 아무것이나 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사람들에게 나를 판단할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럽다. 혼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된다. 저는 혼자입니다. 혼자라고 생각하면 덜 부끄럽다. 나는 ‘나’라고 생각되지 않는 내가 ‘나’로 전시되어 있는 상황이 힘이 든다. 나는 ‘아닌데요’라고 말하고 싶고 늘 ‘아닌데요’라고 말하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다.

종로 가서 술 먹고 고기 먹으면 최소한 사오만 원 들겠지. 그 돈이면 마트 가서 귤 사고 고기 사와서 구워먹거나 치킨 시키는 게 낫다. 근데 돈을 쓰더라도 사람을 보고 싶은 건 말하고 싶어서다. 혼자 글 쓰는 거 말고 입으로 소리 내서 대화라는 걸 하고 싶다. 나는 평일에 거의 말 안 한다.

하고 싶은 것은 목으로 소리 내어 말하고 만질 수 있는 실물 호모를 만나 그의 손을 잡거나 몸을 껴안는 것이다. 후자는 찜방 가면 할 수 있지만 목으로 소리 내어 말하기는 그보다 좀더 어렵다.

의미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결정을 하고 싶다. ‘예……’ 하고 간단히 답하는 것 말고 정말 오랜만에 고민하고 싶다. 죽지 않고 사는 건 가능한가요? 예, 가능하지요, 너는 자살하지 않았잖아요. 아뇨. 죽지 않음 말고 살아 있는 거 말예요. 살고 싶다. 어떻게? 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면서. 지금은 죽지 않기만을 할 수 있을 뿐이지만 죽지 않기를 하다보면 갑자기 삶으로 넘어가게 되지 않을까?


오은: 이 글에서는 우리가 지금 죽지 않은 상태라고 해서 이것이 살아 있다라고 확신할 수 있는지 묻고 있는 거예요. 이때 가장, 내가 지금 살고 있지만 죽지 않은 상태에 불과한 것일 수 있겠다 느껴진 어떤 상황이 있었을까요? 자극이랄지. 어떤 일에 실패를 했다거나 하는 개인적인 사정들이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이 진하게 쓰인 것 같거든요.


유성원: 제가 항상, 그런데 여러분께 노파심에 말씀드리고, 여러분은 다 이해하시겠지만 저는 저 개인의 경험을 말할 뿐이고 저의 경험을 일반화할 수 없다는 건 다들 공감하실 거예요.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제가 어떤 사람을 처음 좋아했을 때 남성, 동성의 사람을 좋아했었을 때 그것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거부와 부인과 더러움, 그런 학습된 감정들이에요. 그러다보니까 예를 들면 제가 어떤 짝꿍 여자친구를 좋아한다 그러면은 그 감정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저 사람에게 마음에 들지 안 들지 그런 것만 노력하면 되는데 내가 어떤 사람에게 끌림을 느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내 감정을 의심하도록 교육받고 훈련된 사회에서는 굉장히 제가 제정신으로 있기가 어려웠어요. 내가 저 사람을 좋아하지만 그 감정을 드러내도 안 되고 내가 저 사람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저 사람이 알게 되면 나를 경멸하거나 혐오할 거야, 하는 생각 자체가 저를 굉장히 힘들게 했고 그러다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람들이 반길 수 있는 일, 훌륭한 회사원이거나 말 잘 듣는 학생이거나 그런 받아들여질 수 있는 모습만을 원하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신경쓰지 않거나 그걸 교정해야 한다라고 외치는 것 같을 때 그럼 나는 왜 살아 있지?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다면 나는 왜 살아 있는 걸까? 나의 욕망,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고 이걸 어떻게 해야 이룰 수 있는지 알지 못하는데. 그런 맥락에서 이런 걸 쓰게 된 거 같아요.


오은: 책에 보면 왼손잡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우리가 생활하면서 문 돌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많은 것들이 오른손잡이에게 편리한 쪽으로 만들어져 있잖아요. 왼손잡이가 아닌 사람들은 이게 너무 편하고 편리하기 때문에 왼손잡이 입장을 이해할 수 없는데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소수자로서의 삶은 얼마나 살기가, 단순히 불편함을 떠나서 여러 가지로 이 사회에 받아들여지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진하게 전해지는 이야기였습니다. 다음으로 넘어가는데 활동가로서의 삶이에요. 그전에 제가 한 가지만 더 여쭤볼게요. 유성원 작가님께서 거의 모든 공모전이나 이런 데 낙선했다고 하지만 제가 알기론 소설 한 편이 전국 규모의 어떤 백일장인가요?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주실 수 있을까요?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유성원: 네. 제가 학교 다닐 때 지금 LH토지주택공사에서 하는 토지문학상이라는 게 있었어요. 대학생들 대상으로 하는 공모전이었는데 우리 국토의 땅과 집에 얽힌 이야기를 소설 내지 시로 투고받아서 대상 우수상 가작 이런 걸 주는 거였는데 당시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하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부동산에 가압류를 넣어가지고 그 이야기를 소설로 썼는데 그걸 대상을 주신 거예요. 그래서 오백만 원을 받았는데, 근데 당시만 해도 저는 제가 체험한 거 경험한 거를 글로 썼었고 아무한테도 안 보여줬었어요. 학교 사람들은 제가 누군지 모르잖아요. 그냥 수업 듣는 학생이지 나를 모르니까 보여줄 수 있는데, 가족들은, 저는 누나랑 엄마랑 살았는데 아무한테도 안 보여줬죠. 그런데 그 자리(시상식)에 어머니가 오셔서 처음으로 제 글을 읽은 거예요. 아들이 어떤 글을 쓰는지, 거기 묘사된 어머니의 모습이, 아시죠? 자식들은 나만 상처받았고 부모가 잘못했어 이렇게 쓰기 때문에 많은 상처를 받으셨더라고요. 그래서 다음부터 그런 내용을 안 쓰게 된 계기가 된 글입니다.


오은: 어찌됐든 자기가 경험한 것을 픽션화할 수도 있고 르포르타주나 에세이 형태로 쓸 수 있는 재능이 있다는 게 밝혀진 건데 아까 읽어주신 글도, 소리 내어 말하기라는 글이 첫 단락은 읽지 않으셨어요. 어머니와의 어떤 일화가 있는데 어머니가 도둑질을 했다고 우물가로 끌고 갔다는 이야기, 이런 부분을 조심스러워했던 거 같습니다. 


유성원: 어머니는 너무 소중하시고. 이 책을 다 읽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아무도 만나지 않고>를 어머니께 사인해서 드렸는데 엄마가 이걸 읽지 말라 그랬는데 너무 재밌어서 계속 읽었다고. 그러면서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 없어져야 된다고 어머니가. 그런 훌륭한 분이셔가지고 제가 이렇게 당당하게. 퀴퍼 같은 데 가서 혐오세력이 막 부모님이 너를 어떻게 키워서 이런 말을 하면, 우리 엄마는 나를 사랑하는데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우리 엄마가 와서 꿀밤 때린다고 그런 얘기도 할 수 있고. 그렇습니다.


오은: 어머니가 또 글을 쓰신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유성원: 네. 맞아요. 지금 어머니께서 원래 백화점이나 마트 식품 매장에서 반찬을 만들어서 파는 일을 하셨는데 코로나19로 점점 근로조건이 안 좋아지면서 퇴직을 하셨어요. 그래서 집에 있으면서 우울해하시니까 마트에서 갑질하시는 분들 이야기나 그런 소중한 사연들을 글로 풀어봐라, 했더니 어머니가 글을 열심히 하루에 앉은 자리에서 에이포 열 장씩 쓰고 계세요. 


오은: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으신 거 같습니다.


유성원: 네. 그래요. 


오은: 어머니도 현실에 발을 디디고 그 현실에 대한 고발이랄지 소중한 이야기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들을 뽑아주는 거잖아요. 그런 재능을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유성원: 네. 그래서 어머니 성함이 최연자인데 어머니가 얼마 전에 제가 이 책을 갖다드릴 때, 이 책은 별로 관심도 없어요. 아들, 엄마 원고 제목 정했어, 그러면서 59년생 연자는? 하고 물음표가 들어간. (오은:82년생 김지영 때문에) 네. 제가 그래서 그거 따라했느냐고 물으니까 아니라고. 


오은: 59년생 연자는? 출간될 때 저도 큰 기대를 갖고 보겠습니다. 활동가라고 하면 우리가 사실 이제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이나 이런 것들을 없애야 되고 사회 분위기를 다르게 해야 한다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많지만 동성애자이면서도 활동가까지 하는 사람은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을 것 같아요. 활동가로 활동할 마음을 먹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유성원: 저 같은 경우는 한국에는 큰 성소수자 단체가, 아주 크다고는 말할 순 없지만 나름 큰 규모의 단체가 몇 군데 있는데 게이 같은 경우에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가 있고 다양한 성적 지향과 정체성을 아우르는 곳은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이런 곳이 있는데 저는 그쪽에서 저 같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규범에 따르는 소수자,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람들. 동성혼에 관한 전략을 펼칠 때도 우리는 다르지 않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이 동성인 것뿐이다, 하는 식으로 접근하는 분위기가 있는 거 같았고 거기에서 저 같은 사람의 목소리와 삶이 지워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HIV/AIDS운동에서도 다가가는 전략이 ‘콘돔을 사용하세요’ 같은 거예요. 성병 감염에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그런 맥락으로 접근하는데 저는 그런 말이 닿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자신에게 위험한 성행동을 할 때는 왜 그 맥락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운동이 같이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면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해서 합류하게 됐고. 저는 저 같은 사람이 반응하는 글, 책에도 “안에 싸도 돼요?”라는 물음표 같은 글이 있는데 하지 않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걸 안 볼 거예요. 그런데 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반응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나 같은 사람이 읽고 싶고 반응할 수 있는 글, 그리고 그 사람이 그런 위험행동을 하거나 자신의 신체에 부담이 되는 결정을 할 때 자기를 도울 수 있거나 그 위험을 좀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알려주고 싶어서 그런 식으로 좀 외연을 넓히고 싶다 생각해서 참여해서 하고 있습니다.


오은: 소수자 운동을 할 때 다수가 지향하는 가치에 부합하는 쪽으로 하면 온건하거나 사회에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높지만 정작 소수자 속의 소수자, 더 작은 소수자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 소수자들의 욕망이나 그런 것들은 지워질 수 있어서 그런 측면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말이 있을 것이다, 하는 말이 밑줄을 여러 번 그어야 할 것같이 좋았습니다. 활동가들은 어쨌든 동성혼 법제화 같은 것들은 좀더 장기적인 목표로 삼는다면 단기 목표 이런 것들이 있을 거 같아요. 유성원 작가님이 활동가로서 단기 계획이 있거나 아니면 2, 30년 뒤에는 이런 일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라고 장기화할 수 있는 바람 같은 게 있을까요?


유성원: 일단 이성애자라고 해도, 이성애자 삶에 일어나는 문제는 굉장히 다양하고 넓잖아요. 누군가 나는 비정규직과 성불평등과 환경오염과 이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삶에 가장 맞닿아 있고 자기한테 간절한 질문을 푸는 방법으로 활동을 하는 거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저한테는 어떤 성적인 실천 부분과 그런 위험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었고, 그것에 대한 낙인에 관심이 있었어요. 낙인이라는 말이 노예들한테 찍는 인두를 뜻한다고 하는데요. 표식인 거예요. 주홍글씨. 저 사람이 누군지 저 낙인만 보고 알 수 있는. 그런 식으로 어떤 사람의 삶이 다양한 면과 모양과 능력을 갖고 있는데 그것을 넌 항문섹스하는 애, 하는 식으로 낙인을 찍어버리면 그 사람의 삶이 굉장히 축소되고 왜곡되고 편협해지는 거죠. 그런 면에서 저는 다양한 동성혼 운동, 가족구성권 운동, 이런 쪽으로 여러 운동의 단위들이 있고 저는 HIV/AIDS에 집중해서 하고 있고요. 근데 항상 여러분도 나와 같은 사람만 이 문제를 겪는 게 아니고 저 같은 경우도 장애운동, 여성운동 이런 쪽에서의 접점들을 계속 발견해요. 내가 겪은 감정의 문제나 어떤 사회적인 차별의 문제, 법제도의 문제를 저 사람들도 겪고 있고 그러기 때문에 서로 연대라는 걸 하게 되는데요. 우리가 너무 소수다보니까, 쪽수가 좀 많아야 해요. 그렇게 하고 있고. 그래서 저의 장기계획 단기계획은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여기에 결합하고 싶어요. 저는 출판인으로 일하고 있다보니까 저는 사실 이 책을 낸 거는 사람들이 너무 쫄지 않아도 된다, 이 정도 수준에서 이야기가 나와도 되고 여기서 출발할 거다, 하는 신호 같은 걸 제 친구들에게 보내고 싶었고 제가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저와 비슷한 이야기, 주목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야기, 좀더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들을 발굴해내고 그런 목소리들에게 김하나 작가님의 말을 빌리면 “마이크를 쥐여주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것이 저의 일단 단기계획입니다.


오은: 우리가 어쨌든 성소수자라고 한정해서 말씀드리면 이들이 행복하게 잘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회에 한 발 한 발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런데 성원 작가님이 택한 방식은 그 방식은 아니란 생각이 들기도 하고. 가려져 있었지만 늘 있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여서 저는 그 어떤 책보다 훨씬 더 입을 벌리는 순간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채널예스에서 이번에 인터뷰를 하셨던데요. 거기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보여줄 수 있는 것만 보여줘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다수인 것 같더라도 보여줄 수 없는 것만 보여줄 수 있는 사람으로서 나와 같은 독자를 상상하며 글을 썼습니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이 문장은 단순히 성소수자로서가 아니라 어떤 커뮤니티 내에서 다른 사람들이 지향하는, 어떤 거대한 가치들이 있다면 아니야 우리에겐 이런 것도 중요해, 라고 말하는 사람이 존재하잖아요. 소수자들 속에도 소수자가 있는데 그런 사람들의 입이 되어주는 사람이 바로 유성원 작가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을 한번 읽어볼까요?


유성원: 315쪽인데요.


오은: 활동과 살기라는 파트에서 읽어드릴 겁니다.


유성원: 327~328을 먼저 읽을게요. 여기에서는 두번째 단락부터 읽겠습니다.


아침에는 영등포구청으로 간다. 지하에는 홀이 일곱 개 있다. 돌잔치 전문뷔페이며 안에 들어가면 원형 테이블에 중년 커플들이 앉아 있다. 지긋지긋한 헤테로들. 여기에 성소수자들이 두세 테이블이라도 있었더라면 얼마나 신이 났을까? 엄마에게 인사하고 테이블에 앉는다. “괜찮아. 나는 입맛이 없어.” “그래도 뭐라도 먹어.” 회랑 과일을 접시에 떠서 온다. 사람들과 인사하는 게 싫고 인사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한다. 상대방 역시 느낄 부담이니까 내가 해치우는 것이 낫다. “가야 해. 저녁에 발표가 있어.” “무슨 발표?” 엄마에게 성소수자인권포럼 홍보물을 휴대폰으로 보여준다. “먼저 가려면 누나한테 얘기하고 인사하고 가.” 조카는 종일 수유실에서 잠들어 있다가 깨어나가지고 누나 품에 안긴 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깥에 나온다. 사람들이 다 조카를 바라보고 한껏 귀엽다는 표정을 지으며 적절히 반응하고 있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호모다, 나는 남자랑 똥구멍으로 섹스하는 호모고 남자 고추 빠는 호모다!라고 생각당해야 했다. 그래서 입맛을 잡쳐버렸다. 누나는 4홀에 있는데 저기 가장 넓은 7홀에서 사회자가 사회자 같은 목소리로 멘트를 하면서 아기를 안고 있는 부부 중 남자에게 어쩌구! 하는 모습이 내겐 보인다.

“삼촌만 웃으면 될 거 같아요. 삼촌 웃을 때까지 찍을 거예요.” 처음엔 민망해서 웃었는데 사진 찍히려고 억지웃음을 머금고 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으니까 사진사는 두 팔을 자연스럽게(남자답게) 늘어뜨리라고 한다. 나는 여전히 모은 채다. 단상 위에서 찍어 사람들에게 목격당하고 있다. 학교에 도착하니 네시 사십분쯤이다. 자료집을 사고 발제할 친구를 만나 카페에 간다. 나는 사람으로 살려면 해야 한다고 요구받는 것들에서는 탈락하였지만 나로서는 살 수 있었다. 내가 나일 때 너는 너구나라고 낯선 사람들이 말해서 아는 것만 이야기하자 다짐했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려면 폭식하지 말고 밤에 일찍 자고 야채 많이 먹고 이런 건 알고 있지만 우리가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폭식을 하고 뭔가 나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을 하게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게 어디서 오는 걸까. 만약에 이 위험을, 열 가지 위험 중에 하나라도 줄일 수 있다면 방법은 뭘까. 저는 그중 하나로 게이들이 사회에서 받고 있는 차별이나 이런 걸 일시에 없앨 순 없지만 그런 것이 개인에게 위험 행동으로 나타날 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한 방법으로 지금 트루바다나 프렙이 등장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오은: 트루바다와 프렙 이야기를 물어보기 전에 문체에 대한 이야기도 좀 하고 싶어요. 저는 이 책에서 유성원표 문체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보도자료에서 송원경 편집자도 얘기를 해주시고 뒤에서도 나영정 활동가께서도 살짝 언급해주시긴 하는데 피동 표현이 있어요. 가령 앞페이지에서는 “생각당해야 했다”라는 문장이 나오고요. 328페이지에는 “목격당하고 있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피동의 형태에 동사들을 자주 사용하시는 이유가 제가 생각하기에는 어떤 의도가 있을 거 같거든요. 그 의도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습니다. 


유성원: 저 같은 경우는 트위터를 굉장히 좋아해서 많이 했는데, 2013년에 출판사 갔었을 때 회사에서 시켰어요. 책 홍보를 해야 한다, 개인이 다 마케터가 되어서 책을 팔아야 한다 해서 계정을 만들고 책 홍보를 하기 시작했는데, 제가 트위터에서 팔로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거잖아요. 게이들이라든지, 있는데 계속 눈치를 보고 있는 거예요. 이 사람들을 팔로하고 그런 걸 언급하는 게 스스로 조심스러웠고 그래서 항상 제 계정엔 점잖고, 책 문구, 감상 이런 걸 올렸는데 언제부터인가 고된 일과 스트레스로 부계를 판 건 아니었고, 그걸 없애고 새로운 계정을 하면서 말들을 막 하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편집자로 일하면 맞춤법을 지켜서 글을 써야 된다, 이런 게 있잖아요. 한 작가님이 제가 이렇게 교정을 봐서, 내부 맞춤법 규칙이 있어서 이렇게 수정해서 드렸어요, 했더니 ‘왜 그래야 되는데요?’라고 제게 물으시는 거예요. 그런데 저도 답이 없었거든요. 위에서 시키니까 나도 이렇게 하는 거지, 나도 그냥 막 하고 싶지. 그때부터 저희가 사실 말을 할 때 맞춤법을 안 지켜도 우리가 그게 틀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건 답을 알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잘못됐다는 걸 아는 건 그 원래 의미를 안다는 건데 그렇다면 굳이 똑바로 쓸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됐고 그런 면에서 말을 맘대로 맞춤법을 쓰면, 외않되, 이런 걸 쓰면 사람들이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게 재밌었던 거예요. 맞춤법 그게 아니라면서. 그런 걸 즐기다가 피동 표현도 점차 하게 되었는데 그건 우울감과 관련 있었어요. 내가 일을 할 때든 다른 사람에게든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게 ‘괜찮아요’라는 뜻일 때, ‘아니에요’가 ‘안 할 거예요’가 아니라 ‘너 이거 괜찮니?’라고 누가 물었을 때 ‘안 괜찮아’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하는 대답이 정해져 있다면,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라는 상황에서 내가 어떤 의지를 갖고 내 삶을 컨트롤할 수 있을까. 그걸 표현할 수 있는 한 방법이라고 나름 의미부여를 하면서 써왔습니다.


오은: 아마 이 책 읽으신 분들은 피동 표현들이 뭔가 우리가 말 안 해도 당연히 해야 되는 일들을 수행할 때, 내 의지와 내 욕망과 상관없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하게 될 때를 생각하면서 읽으시면 더욱더 피부에 와닿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마지막 챕터에 큰 따옴표가 나오고 여러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지만, “이 위험을 열 가지 중에 하나라도 줄일 수 있다면 방법은 뭘까?” 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하셨어요. 트루바다나 프렙 같은 단어가 나오기도 하고 뒤 페이지까지 읽어보신 분들은 U=U 이런 용어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트루바다는 약 이름인 거죠? 프렙하고 같이 설명을 해주시겠어요? 많은 분들이 아실 수도 있겠지만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 거 같고 저도 처음 접하는 용어여서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유성원: 먼저 여기 오신 분들 중에 HIV와 에이즈에 대해선 잘 모르실 수 있고 이 이야기도 처음이지만 에이즈는 익숙하실 거예요. 에이즈 하면 뭔가 께름칙하면서 거부감이 들고 누가 에이즈야라고 하면 저 사람하곤 같은 공간에 있어선 안 될 것 같은 그런 불안과 공포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HIV는 에이즈라는 면역력이 저하된 상태, 그래서 HIV는 인간의 몸에 있는 면역체계를 파괴하는 바이러스예요. 우리가 이 컵에 어떤 바이러스가 있어도, 이 컵으로 물을 마셔도 병에 안 걸리는 건 몸에 있는 면역체계가 발동해서 그걸 적절히 싸우면서 저희 몸을 지켜주기 때문인데 HIV에 감염되면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으면 그 면역력이 점점 파괴되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 감염되어도 증상이 없어요. 물론 몇 가지 있지만 일반적인 몸살, 감기와 구분이 안 되기 때문에 감염 사실을 모르고 지낼 수 있는데 그러면 겉으로 볼 때는 건강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점차 면역체계가 파괴되면 동일한 바이러스가 건강한 사람에게 들어갔다면 걸리지 않을 병도 쉽게 걸리는 상태가 되거든요. 그걸 에이즈라고 해요. 그 HIV라는 바이러스가 몸에 없다면 에이즈는 당연히 일어나지 않죠. 그게 원인이고 결과니까. 그 HIV감염을 예방하는 약이 트루바다라는 약이에요. 이게 치료제로 쓰이는 약이기도 한데 오래전부터 과학자들이 실험을 해서, 사람들이 몸에 들어온 HIV를 치료하고 컨트롤하려고 약을 먹는데 이걸 예방 목적으로 먹으면 어떨까 했던 거죠. 바이러스가 들어오기 전에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약을 먹어두면 몸이 항바이러스 상태가 되어서 바이러스가 몸에 들어오더라도 영향을 주지 않는 상태를 만들어보자 했던 것이 트루바다를 이용한 프렙 요법인데요. 그건 이제 치료제로 쓰이는 예방약을 미리 먹고 혹은 후에 복용해도 똑같이 예방 효과를 갖는다는 실험 결과가 있어요. 우리가 콘돔 같은 걸 사용해야지 HIV감염에서 안전해진다고 하는데 콘돔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런 예방약을 복용함으로써 HIV감염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거죠. 그리고 이거는 복제약도 있고요. 더 저렴한. 그래서 프렙은 예방약을 복용해서 걸리지 않게끔 할 수 있는 방법을 프렙이라고 부릅니다. 


오은: U=U는 어떤 의미죠?


유성원: 그게 Undetectable=Untransmittable이라고 해서 미검출은 전파불가라는 뜻인데요. 마찬가지로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아무 치료를 하지 않으면 바이러스 수치가 계속 상승할 수 있어요. 수치가 높을수록 타인에게 전파할 우려가 높고 자기도 몸이 안 좋아지는 상황인데요. 항바이러스 치료를 계속 받으면 몸에 있는 바이러스 수치가 점점 낮아져서 어느 정도 미만으로 떨어지면 미검출이라고 부르는, 바이러스가 몸에 없는 것과 동일한 상태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타인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U=U라는 성명은 국제에이즈단체에서 발표한 것인데 우리가 에이즈에 대해 불치병, 그리고 소수자에 대한 공포와 결합해서 낙인을 재생산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HIV에 감염되었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면 안 되잖아요. 세상을 살아갈 방법을 계속 찾아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거는 낙인을 줄여주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감염되었어도 우리가 한 공간에 있을 수 있고 같이 밥을 먹어도 되고 김치찌개를 떠먹어도 되고 이런 기본적인 일상생활에서는 전파되지 않는다는 게 상식이 됐는데 U=U가 중요한 점은 뭐냐면 우리가 다른 상대방과 성관계를 맺을 때도 상관이 없어졌다는 뜻인 거예요. 그전에는 너는 감염됐으니까 성관계를 할 때는 꼭 콘돔을 사용해야 한다는 구속사항이 있었는데 그런 걸 뛰어넘어서 이제 정말 이 사람들이 자신의 상태를 알고 치료를 받으면 타인에게 전파할 수 없는 거죠. 사람들이 에이즈 환자를 가리켜서 전파의 온상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정작 이 사람들은 누구에게 피를 들이부어도 감염시킬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거예요. 근데 현실에선 너무나 많은 오해가 있어서 그런 걸 운동에서도 많이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죠.


오은: 편견과 고정관념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는 부분이었어요. U=U 파트가 특히 그랬던 거 같고요. 이 파트에서 하나 더 읽어주실 수 있을까요? 315페이지 읽어주신다고 했던 거 같은데.


유성원: 315페이지에서 중간 작은따옴표부터 읽을게요.


‘제가 해온 방법은 다 운이고 그걸 어떻게 통과했다, 라고 매뉴얼을 만들 수가 없는 거잖아요.’ ‘중독이 관계에서 오는 것이면 그러한 물질이 필요한 상태, 행위가 필요한 상태를 다른 뭔가로 채워넣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런 대상을 발견하고 허락받는 과정이 단약이나 행위를 금지하는 일보다 어려운 거잖아요. 그런 사랑이나 관계를 평생 살아도 발견하지 못할 수 있으니까.’


오은: 이 책은 편견을 깨고 사람들에게 이런 삶도 있어요, 라고 보여주기도 하지만 유성원 작가님께서 우리는 미화된 것을 봐야 소수자들에게 가슴을 열 수 있다고 믿는데, 흔히 말하는 거 있잖아요. 게이는 문란하다, 이런 편견도 굳이 해소할 마음이 없이 밀고나가는 데서 오는 힘이 있다고 보여요. 그런데 그것의 중심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내가 전하는 사람이라면 뭔가 과장되거나 혹은 문제를, 심각성의 척도로만 바라보려고 할 텐데 이게 나의 이야기니까 당사자성을 확보하는 거 같아서 그 부분이 참 좋았거든요. 편견을 공고히 하면서 깬다는 이야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유성원: 당사자성이라는 얘기를 해주셨는데 소수자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말하기거든요. 이 사람의 삶에 대해서, 나의 삶에 대해서, 혹은 여러분의 삶에 대해서 주변 사람들이 떠든다고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럼 얼마나 답답하고 속이 터질까요? 그거랑 비슷하게 당사자가 나와서 나의 삶은 이렇다,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 나는 이런 문제가 있고 이런 대책이 필요하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되는데 사실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편견이나 부정적인 시선 같은 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라고 말하지 못하게 막고 있거든요. 그런 목소리가 소수인 채로 고립당한 채, 다수의 비난 속에 있도록 내버려두는 거 같은데 그런 면에서 제가 제 이야기를 쓸 수 있고 내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는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 이런 이야기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고요. 항상 소수자, 소수자라고 말하면 뭐하지만 저 같은 남성을 좋아하는 남성에게는 이런 것들이 계속 던져지는 거예요. 질문들이. 별로 궁금해하지 않아요. 그냥 비난하고 싶어서 던지는 말인데 계속 거기에 대답해야 할 것처럼 질문들을 던지는데 이미 그건 합의가 끝난 질문들인 경우가 많거든요. 에이즈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너무 몰라요. 나에 대해서도 당연히 모르는데 모르는 것이 권력인 거예요. 몰라도 되게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래서 그런 커다란 목소리 앞에서 이걸 거기에 대답하는 방식, 이를테면 게이는 문란해라고 할 때 거기에 대답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냥 저의 이야기를 내놓고 여기에 이제 너희가 답해, 라고 하는 저의 소심하지만 소심하지만은 않은 그런 마음이 있었죠. 아까 프렙 얘기하면서 하나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위해감소전략이라고 있어요. 그게 뭐냐면 우리가 약물, 저는 마약이라는 말을 잘 안 쓰고 약물이라고 하는데, 약물이나 담배 같은 것을 끊을 때 단번에 끊을 수 없다는 거예요. 이거 몸에 나쁘니까 끊어, 하는 것이 이 사람이 실제로 끊도록 도와주지도 못하고 이 사람의 삶을 개선하지도 못해요. HIV관련해서는 해외에 약물 이용자들 사이에 감염률이 높은데 그 사람들이 일회용 주삿바늘을 공유하기 때문이에요. 주삿바늘을 구하기가 어려워서 한 사람이 쓴 걸 돌려가며 쓰다보니까 HIV에 감염되기가 쉬워지는데 그래서 그 HIV감염률을 낮추는 방향으로 약물이용자들에게 새 주삿바늘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하자고 했었어요. 그러니까 난리가 난 거죠. 어째서 세금으로 이런 사람들한테 지원해주느냐, 말도 안 된다. 이건 손쉽고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근데 결과적으로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주삿바늘을 나눠주었을 때 그 지역의 신규 감염률이 떨어졌거든요. 프렙 같은 경우도 우리가 어떤 소수자의 조건을 말할 때는 튀어나온 돌출된 행동만 가지고 얘기하는데 이 사람의 삶의 조건을 우리가 동등하게 꾸려놨는가 그 토대를 먼저 물어야 돼요. 동성혼 같은 게 가능한 사회인가? 가능하지 않잖아요. 그럼 이 사람의 삶이 어떤 문제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맞고 어떤 문제들을 안고 가야 하는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게 맞아요. 그런 면에서 위험 행동들에는 지원 전략, 접근 전략이 필요하고 그런 면에서 프렙이라든지 이런 걸 대중적으로 선진국 등에서는 보급하고 있어요. 한국에서도 그렇게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고요. 


오은: 이제 저희가 쓰는 이야기, 활동하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사랑과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이 책을 두 번 읽었는데 처음에는 순차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고요. 두번째는 뒤에 있는 나영정 활동가의 글과 유성원 작가님의 형, 안에 싸도 돼요?라는 긴 글을 읽은 다음에 다시 또 읽은 적이 있어요. 처음 읽을 때는 몰랐는데 두번째 읽을 때 발견한 게 이 책이 2014년부터 2020년까지의 기록인데 2017년 1월부터 2018년 3월까지 글이 멈춰 있어요. 혹시 발견하신 분 계실까요? 몇 분 계신 거 같고요. 이 시기에 대해 어떤, 두 가지 중에 하나겠죠. 너무너무 글쓰기가 힘들어서 글을 쓰지 않은 상황일 수도 있고 어쩌면 어떤 일이 너무 바쁘거나 좋아서 심취한 나머지 글 쓸 여유가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어떤 일이 있었나요? 이 사이에?


유성원: 2016년 후반에 보면 제가 어떤 한 친구를 만나는 장면이 나오고요. 2018년 3월 그때가 아마 헤어진 다음 이야기로 들어가는 걸로 기억하는데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기에는 아무 글도 안 썼어요. 제가 글을 썼으면 여기에 글이 있었을 텐데 물론 글이 있긴 하거든요. 리뷰 같은 건 쓰고 그랬는데 일기를 쓸 이유나 그런 욕구가 별로 없었고. 저는 삶이 힘들면 글을 많이 쓰게 되는데 이때는 그냥 모든 게 만족스러워가지고. 좋아서 안 썼어요.


오은: 그럼 성원 작가님의 다음 책을 기다린다고 말하기가 조금 미안한 느낌이 들기도 하네요. 좋아서 안 썼다고 하니까. 좋을 때 쓸 수 있는 글도 있잖아요. 아닌가? 없을까요?


유성원: 지금은 좋을 때 쓸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런데 그때는 뭔가 토해내듯이 썼기 때문에 그랬던 거 같습니다.


오은: 1년 3개월이라는 기간이 좋은 일 때문에 글을 안 쓰는 기간이었다고 하니까 마음이 놓이는 것도 같네요. 외로움이라는 정서,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비애의 정서가 굉장히 짙은 글들이에요. 그런데 그 비애가 저는 마지막에는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처럼 읽혔거든요. 외로움과 같이 살아가기 위해서 스스로 하는 일이 따로 있을까요?


유성원: 음... 외로움과 살아가기 위해 하는 일... 이게 너무 어려운 말이네요.


오은: 저도 질문 던지고 나서 나한테 이거 물어보면 어떻게 하지? (웃음)


유성원: 아, 근데 제가 하나 배운 게 뭐냐면 여기에서 보면 지금 같은 토요일 밤 이러면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예전에는. 나의 어떤 관계맺는 방식이 뒤틀려 있다고 스스로 느끼지만 이걸 긍정해야 하는 이중적인 게 있는데. 내가 동성애자로서 아까처럼 문제점, 불편함을 느낀다고 할 때 그게 소수자에 대해서 스테레오타입을 강화할까봐 일부러 긍정적으로 말해야 된다거나 하는 식의 이중적인 생각을 늘 갖고 있어서 어려운데. 토요일이나 주말에 늘 하던 행동 같은 것들의 대체품을 발견한 거죠. 오버워치라고. 게임을. 오버워치가 저 잘 못해요. 메르시, 힐러 이런 거 하는데 저는 총으로 쏴가지고 누구를 맞추는 건 잘 못하고 자동으로 전기로 지지고 이런 거 있잖아요. 감시포탑 설치해서. 그게 재밌었어요. 오버워치. 그런 것들처럼 대체할 수 있는 행동들을 발견했던 거 같아요. 예전에는 이런 감정상태에 놓이면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이런 것밖에 없어라고 생각했다면 점점 그 목록을 많지는 않지만 한두 개씩은 더 발견한 거 같아요. 


오은: 글을 두 편 정도 청해서 읽겠습니다. 처음에 읽어주실 글이 340페이지에 있는, 포기하면 값지고 가꾸면 헛된 인생. 


유성원: 


어떤 사람들은 보여줄 수 있는 것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보여줄 수 없는 것만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어떡하나요. 사라지면 된다. 없는 사람처럼.

글을 사람들이 읽는다고 생각하니 문제적인 표현들, 하지만 이 표현을 썼기에 가능한 이야기들을 없애야 하나 고민된다. 이것은 사람을 죽였는데 남들이 모르기만 하면 그만인가와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굳이 남들이 알아야 하나의 다툼이다.

사람들이 읽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읽기 시작하면 문제가 된다. 나는 읽는 행위 자체가 사건이 되기를 바라고 그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남들에게 내 글 읽으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할 수 있으려면 그 삶이 얼마나 보통의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게 모험해야 하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방법은 사실을 써놓고 이것은 허구라고 하면 된다. 그렇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이 글들을 사람들이 읽어야 하는 까닭이 뭘까? 누군가가 이걸 꼭 읽어줘야 하는 이유가 뭘까? 그것에 답하지 못해서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더 기다릴 수 있는데도 기다리는 걸 포기해야 할까? 언제까지 저는 기다려야 하죠?

이천구백 원짜리 토스트를 두 개 사고 만 원을 냈는데 잔돈을 얼마 가져가야 하는지 계산이 안 돼서 휴대폰 계산기 앱을 켰다. 사천이백 원 가져가세요, 하고 주인이 두 번 말했는데 계산기를 두들기고 있었다. 대답할 기운이 없어서.

엄청나게 거대한 아파트 앞 인도에 있는 마르고 빈약한 가로수 밑동에 침 뱉는 여자.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내가 그 일에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대응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보여준 합리성으로 사람들이 설득되리라고 낙관적인 착각을 하게 된다. 어떤 일은 막상 겪고 나면 회복이 안 되고 뭐가 부러졌으면 부러진 채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때는.

생각에 기대지 말고 벽이나 단단한 나무에 기대자. 호모라는 건 나의 작은 사실에 불과하다. 나는 왜 이 모양으로 살게 되었을까? 이렇게 살아도 저렇게 살아도 안 죽을 방법은 없다.

어리석거나 덜 자랐거나 인간이 안 된 사람이 솔직한 기록을 남길 필요가 있을까?

무얼 원하는 건지는 모를 수도 있다. 원하는 게 무언지도 모르면서 단지 원하고 싶어하는 것일 수 있다. 이렇게도 살 수 있는데 이렇게만은 살 수 없다고 느끼는 이야기. 글은 글이고 글 쓰는 사람은 글 쓰는 사람일 뿐인데 뭘 더 얼마나? 마음까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해야 할까?

내가 아는 만큼 볼 수 있는 만큼은 다른 사람들도 본다. 말을 안 할 뿐이지. 

 

오은: “이렇게도 살 수 있는데, 이렇게만은 살 수 없다고 느끼는 이야기.”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이런 말씀도 하셨어요. “저는 늘 어떤 문제 앞에서 넘어지고 있었고 그런 순간을 맞이하면 쓸 수 있는 일이 쓰기밖에 없었어요” 하는 대목이 생각이 나네요. 그리고 여러분 아까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나는 읽는 행위 자체가 사건이 되기를 바라고 그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여러분 모두 유성원이라는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분들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다음에 읽어주실 글이 좀 긴데.


유성원: 네. 뒤에 있는 10번 파트를 다 읽으려고 하는데요. 394쪽이고요.


그동안 삶의 방식을 바꾸어보려 여러 시도를 해보았으나 개인적 차원의 노력일 뿐이었다. 그것은 사회나 제도적 승인을 받을 수도 없는 소꿉장난 같은 것이며 미래를 그릴 수 없다는 감각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더라도 제도적 권리를 보장받는 관계가 될 수 없으며 우리는 ‘가족’이 아닌 현실은 미래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이는 일대일 관계 혹은 ‘일부일처제’의 결혼제도를 정답이라 보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한계를 가지고 있더라도 동일한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걸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살기 위해선 우울감과 스트레스를 꾸준히 관리하며 ‘나중에’가 과연 언제쯤일지, 그 ‘나중’을 ‘지금 당장’으로 바꾸는 데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분노하지 않고 침착해야 했다. 동성애 하면 에이즈 걸린다고 소리치는 저 혐오세력이 내게 주는 직접적인 모욕 앞에서 건강하게 욕망을 실천하는 법을 고민하고 그 경험을 나누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해결해야 하는 산적한 과제 앞에서 성적 실천은 늘 말하기 꺼려지고 부담되는 주제이기도 했다. 그것은 뒤에 남겨지는 것이고 생략되는 것이었고 오독하기 쉬운 것이었으므로.

이 글에서 말할 수 없는 주제들, ‘이다음’에 오는 문제들에 대한 고민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것은 더욱 섬세하게 말해져야 하고 더 많은 경험이 발견되어야 한다. 어느 한 명이 집단을 대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각각의 소수자들에게는 강요되는 모델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의 경험에 누군가 남긴 말은 이러했다. 당신은 변태성욕자일 뿐 동성애자가 아니다. 하지만 이성애자가 성적으로 활발하다고 하여 그에 대고, 당신은 변태성욕자일 뿐 이성애자가 아니라고 말하진 않는다. 나는 이 강요되는 건강함, 모범적인 모델, 시민권을 승인받으려면 연출해야 하는 무해하고 건강한 정체성을 수행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간다. 치료하면 전파하지 않는다고, U=U가 상식이 된 세상에서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사람과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 벽을 해소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약 일 년간 프렙을 하는 동안 나는 건강하지 않을 권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치료제를 꾸준히 먹었어, 예방약을 꾸준히 먹었어, 하는 모범적인 답만이 강요되는 듯 보이는 삶에서 이 건강함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정말 ‘선택’일까? 운동적 차원에서, 대국민적인 메시지 차원에서, 마치 연출된 광고에서처럼 활기와 긍정과 밝은 삶을 연출해야 한다고 느끼게 되는 어떤 부당함 앞에서 그만 침묵하게 되는 것이다. 아직도 이 약의 존재와 예방법을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고, 대중적으로 보급되지 않았으며, 정책적으로도 나아갈 길이 한참 남은 듯 보이는 이 시점에, 이것은 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이,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겉으로는 말하는 태도를 취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이 알약이, 어떤 치료제의 발달이 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그럼 노콘으로 해도 된다는 거예요? 바이러스 수치가 종종 튀는 경우가 있다는데 괜찮은가요? 감염인 파트너를 둔 사람의 질문 앞에서 나는 이 모든 글을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환원하고픈 욕구에 저항하면서 고개를 젓고 말을 이어간다. 하고 싶었던 말은 노콘 섹스를 하기 위해서 상대방이 자신의 몸을 관리해야 하는 게 아니고, 그가 살아가려는 의지를 빼앗기지 않으려 자신을 돌봐야 한다고. 포기하고 싶고 자신을 함부로 하고 싶을 때에도, 돌이킬 수 없어 보이고 내가 이 일들을 해낼 수 없는 듯 느껴질 때에도 할 수 있는 일들은 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하루에 약 한 알 먹는 것도 힘들었다. 프렙에서 말하는 확률은 결국 그 사람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제할 수 없다는 의미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약을 복용하면 예방 확률은 100%이지만 우리가 약을 매일 먹지 못하는 상황이 닥칠 수 있으니까. 어느 날은 먹어야 하는 시간에 직장 회식이 잡혀서, 술을 많이 먹고 깜빡 잠들어서, 약통을 잃어버려서, 약을 타러 병원에 가야 하는데 시간을 도저히 낼 수 없어서, 혹은 그냥 먹고 싶지 않아서. 누구도 삶의 변수를 통제할 수 없음을, 그렇기에 그것을 강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안심이 된다. 거기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경험들이, 이야기들이 자리할 것이다.


오은: 저는 이 마지막에 실려 있는 유성원 작가님의 이 글 있잖아요. 해설 전에 있는 마지막 글이 정말 훌륭한 명문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많은 분들에게 이 페이지가 좀 많긴 하지만 복사해서 읽히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기의 글이 사실 몇 개의 글이 편집돼서 쓰인 거라면서요?


유성원: 네. 제가 계속해서 써왔던 글들을 업데이트하면서. 정책 같은 면도 연구 결과도 바뀌고 있어서, 제가 2년 전에 썼던 글과 또 작년에 썼던 글 이런 것들이 다 변화가 있어서 그런 부분들과. 그리고 제가 항상 글을 쓰면 어떤 말을 할 때 더 섬세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수정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요. 채널예스 인터뷰에서도 우리가 합의된 성인과의 관계에서 따져야 할 것은 욕망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폭력적인 위계를 사용했는지 여부이지 두 사람이 합의했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비난할 대상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얘기했는데 거기에서의 ‘합의’라는 것도 생각하게 되거든요. 여기 안에서도 어떤 취약함에 대해 얘기하는데 인물이 항문섹스를 하기 전에 다 준비를 했는데 하기 전에 두려움을 느끼는 장면이 있어요. 이게 내가 정말 이걸 원해서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우울증이나 여러 요인으로 이걸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려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게 저한테는 어떤 분기점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데 누군가가 자신에게 해가 되는 행동, 자신의 몸에 부담이 되는 행동,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 그게 그 사람의 의지로, 내가 동의했어, 라고 했더라도 그게 동의가 아닐 수 있다는 거죠. 이 사람이 동의를 한다고 말하게끔 한 맥락이나 그 사람의 사정 안에서 그것은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해야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어서 계속 글을 수정하게 되는 거 같아요.


오은: 보이지 않는 맥락이 분명 존재할 것이고 그 맥락은 위계든 그 시점의 기분이든 그런 것의 영향을 받을 테니까 그런 것들을 더 섬세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현장에서 질문을 받아보려고 하는데요. 그전에 제가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이 책이 더 소중했던 것은 단순히 일기, 에세이, 르포르타주, 이렇게 하나의 장르로 콕 집어서 말할 수 없는 글이기 때문에 제겐 더 소중했던 거 같아요. 우리가 소설, 하면 소설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고 에세이, 하면 에세이에 기대하는 바가 있고 시, 하면 시에 기대하는 바가 있는데 그 어떤 기대를 하고 봐도 그 기대는 어떤 식으로든 깨지게 되어 있어요, 그 기대에 못 미치거나 기대를 뛰어넘거나 하는 책이 이 책이 아닐까 싶은데, 이 책을 묶을 때 이 책이 지금 에세이 장르로 분류돼서 판매가 되고 있잖아요. 저는 이 책이 사회문제 섹션에도 가야 한다고 보거든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유성원: 예. 저도 그 부분에 아주 동의를 하고요. 사회섹션에도 가면 좋겠네요. (웃음)


오은: 판매 가능성이 두 배로 올라간다고 생각하시는 거 같습니다. (웃음) 네. 그럼 이제 현장 질문을 몇 개 받아보려고 합니다. 


독자1: 저는 이 책을 다 읽진 않았고 작년에 독립출판했던 책을 다 읽어서 이런 질문을 드리는 걸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이 제목에 외로움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만큼 이 책의 주요 화두는 외로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저는 이 책의 화자이자 작가인 사람이 단순히 한 가지 외로움, 한 종류의 외로움에만 차 있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그러니까 이 화자가 게이로서 사회적 소수자로서 차별에 직면하면서 느끼는 그런 외로움뿐만이 아니고 거기엔 한 겹의 레이어가 더 있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소수자로서 느끼는 외로움뿐만이 아니라 게이사회, 게이 커뮤니티에서 성적 매력을 획득해야 하고 그걸 끊임없이 유지해야 하는 의무감이랄까요. 그런 의무감을 계속 겪으면서 느끼는 외로움, 그리고 내가 당장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서 성적 매력을 상대에게 어필해야 한다는 압박감, 그것이 실패했을 때, 성욕을 해결할 수 없다는 절망감, 그게 저는 두번째 종류의 외로움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거든요. 뒤에 작가님이 덧붙이신 설명글에는 제 생각에는 인권 문제에 대한 설명이 많이 들어가 있지만, 거기에서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계속 얘기되고 있는 외로움은 게이 커뮤니티에 속해 있는 사람으로서의 외로움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제가 계속 고민하고 있는, 어쩌면 평생에 걸쳐 고민해야 되는 문제일 수 있는데 저는 과연 동성혼이 가능해지고 게이들이 게이를 포함한 여러 사회적 소수자들이 차별을 더이상 겪지 않는다고 해서 외로움이 사라질까, 그런 생각을 되게 많이 했어요. 그러니까 동성혼이 가능해진다고 해도 게이들은 여전히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많이 겪을 것이고 자기의 성적 매력을 누군가에게 승인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될 것이고 그런 문제는 여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저는 굉장히 고민스러운데 작가님은 그 외로움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유성원: 너무 잘 읽어주셔가지고. 먼저 뒤에 실려 있는 글은 작년 2019년 겨울호였나요? 문학들이라는 계간지에서 우리 시대의 청년이라는 특집으로 글을 써달라고 해가지고 제가 우리 시대의 청년으로 무슨 글을 쓸까 하는데 제게 작년에 낸 독립출판물을 알고 있다면서 게이로서 마주하고 있는 그런 걸 써달라고 하시는 거예요. 너무 포괄적으로 요구하시더라고요. 저는 HIV/AIDS와 성적인 낙인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지 이런 다른 이슈들은 전문성이 필요하다, 나는 부족함이 많다 했는데 괜찮다고 하셔서 쓰기 시작해서 이 글 자체는 말씀하신 대로 그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루지는 못했어요. 게이 커뮤니티 안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쓰인 글이 아니라 일반 독자, 이 책을 서점에서 무심코 집어들었을 분들을 대상으로 쓰였기 때문에 그 이야기까지는 하기가 어려웠고요. 저는 이 다음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어떤 착시 같은 거예요. 게이로서 제가 사람을 만나고 할 수 있는 통로가 굉장히 제한적이라면 그 통로의 한계를 자기 정체성의 문제로 보게끔 하는 어떤 착시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또 하나 좋아하는 얘기 중에 테드 강연인데 중독에 관한 강연이에요. 보셨을 수도 있는데 어떤 쥐를 빈 우리에다가 넣고 물이 있는 물, 마약을 탄 물, 이렇게 놨더니 쥐가 마약이 든 물만 먹고 죽어갔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실험을 설계한 사람이 우리가 좀 다르게 생각해보자 우리가 이들에게 선택지를 그냥 물, 마약이 든 물만 줬는데 친구도 만들어주고 쥐공원이라고 해서 미끄럼틀하고 쥐가 달릴 수 있는 그런 여러 요소들을 만들어준 거예요. 그랬더니 마약이 든 물을 택해서 먹고 죽어가는 쥐가 없었다는 거죠. 다 건강하게 살아 있었고. 이거랑 비슷하게 또 우리가 어떤 약물 중독에 대해 생각할 때, 병원에 가서 뼈가 부러져서 치료를 받으면 그때 맞는 진통제가 굉장히 고순도의 약물인데 우리가 그렇게 약물에 취약하다면 병원에서 골절상을 입은 사람들이 치료를 마치고 나오면 다같이 약물을 구걸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는 거죠. 그럼 이 차이는 어디서 올까, 왜 어떤 사람은 자기가 중독될 뭔가를 찾아 헤매고 어떤 사람은 거기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할 수 있을까. 그게 그 사람은 어떤 관계에서 온다고 봤고요. 그래서 중독이라는 것은 약물과 이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과 그 개인을 둘러싼 사회에 집중해야 된다고 본 거예요. 시점을 이동시킨 거죠. 그래서 저도 그것과 비슷하게 게이들은 성적으로 매력적이어야 돼, 잘생겨야 되고 어려야 되고 근육질이어야 된다고 우리가 학습한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우리가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만나는 어플이라든지 사진을 교환하는 채팅이라든지 클럽이나 술집 같은 곳에서 외양적인 매력을 뽐내게끔 된 곳인데 그 공간에서 소통하는 문법, 플랫폼의 한계를 우리의 한계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같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성애자라면, 제가 만약 이성애자 남성이라면 어떤 여성이 마음에 들었을 때 상대가 레즈비언일 거야라는 가능성을 생각하진 않을 거란 말이에요. 당연히 나와 저 여자 사이의 매력을 교환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저 사람이 다른 정체성을 가졌으리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데 저는 늘 그런 가능성을 기본값으로 깔고 사고해야 되는 사람으로서 선택지가 제한적이고, 그래서 결국 그런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기 위한 요구들, 운동해야 되고, 자기관리해야 되고 이런 것들이 다 이 한계에서 오는 것 아닌가? 이걸 저의 다음 고민으로 잡고 있어요.


독자2: ‘소중’이라는 말을 되게 많이 사용하시잖아요. 작가님이 ‘소중’이라는 단어를 언제부터 쓰시게 됐는지, 그리고 그 ‘소중’이라는 단어가 작가님한테 어떤 의미인지, 왜 자꾸 쓰시는지 그게 궁금했어요.


유성원: 저는 소중하다라는 말을 여러 의미로 쓰는데 예를 들면 어디서 갑질하는 사람을 봐도 소중한 거예요. 저 사람이, 그래 저렇게 하면 저 사람 삶이 좀더 좋아지나보지, 약간 이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무례함을 드러내면서 타인에게 자기 욕망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모습이 저 사람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면 소중한 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그래비티라는 영화가 있는데, 졸다가 앞부분은 못 보고 깨어나서 본 게 조지 클루니랑 산드라 블록이 거기서 우주인으로 일하다가 무슨 문제가 생겨서 산드라 블록이 뱅글뱅글 돌면서 멀리 우주공간으로 멀어지는 장면을 봤어요. 산드라 블록에게 무슨 문제가 생겨서 우주에 혼자 남게 되고 거기서 지구로 돌아가려고 자기가 살아남으려고 노력을 많이 해요. 그런데 자기가 노력한 이유로 위기에 빠지고 거기서 다시 또 노력해봤지만 실패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사람이 모든 의욕을 다 잃고 어디 들어가가지고 멀리 지구를 보는데 제 기억에는 그분이 딸을 잃었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사실 이분은 지구로 돌아갈 이유를 사실 찾지 못하는 거예요. 그동안 계속 도망친 것도 죽음 앞에서 나온 자연적인 반응이었고, 죽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 때문에 나온 자연적인 생존 반응이었는데, 거기서 지구로 돌아가도 나의 가장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저 세상에서 하루하루 살아가야 하는 것과 이 우주에 홀로 남아서 죽어가야 하는 것 사이에 이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는 거죠. 그 상황에서 이 사람이 지구로 돌아가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런 마음을 먹게 되는지가. 저는 그해 본 영화 중에 처음으로 울었는데. 그러한 맥락에서의 소중함으로 쓰고 있고요. 그런 걸 가르쳐준 건 여기 잠깐 일기를 쓰지 못하게 했던 시간들, 그 시간에 배운 거죠. 나는 왜 살아야 되지?라는 이유가 없었는데 그것도 노력해야 만들 수 있다는 거를 누군가가 가르쳐준 거 같아요. 그냥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고. 얼마 전에 제가 물어봤는데. “넌 왜 이렇게 소중해?”라고 물어보니까 모른다고 그러는 거예요. 소중하게 대해주니까 소중해졌나봐요, 라고 하는데 저는 그게 좋았거든요. 어떤 사랑이든 좋아하는 감정이든 노력해야 된다는 거. 그런 노력의 의미로 소중함을 의도적으로 쓰고, 발견해내려고 하는 거 같아요.


오은: 소중함은 일종의 노력인 거네요. 갑질하는 사람이 갑질을 통해서 어떤 쾌락을 느낀다면 그것도 소중하다고 바라보는 게 인상적인데 제가 유성원 작가님한테 소중하다는 얘기를 한 두세 번 들었거든요. 집에 가서 빨리 카톡을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있네요. (웃음)


독자3: 저는 사실 말씀해주신 데서 끼워맞춰서 답이 된 거 같아서 말씀을 안 드리려고 했는데 두 가지가 궁금하고 묻고 싶었었던 게 저는 책을 읽고 나서 처음에는 낯선 부분이 확실히 있었어요. 그래서 잘 넘어가지 못하다가 계속 읽고 넘어가면서 저는 뭐랄까, 게이의 어떤 이야기라기보다 말 그대로 유성원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이 들었고 읽어가면서 더 듣고 싶다, 무슨 얘기를 할지 궁금하다 생각을 하면서 책장을 넘겼거든요. 그래서 책장을 덮고 해설에 넘어갔는데 해설에서는 문란한 게이라는 키워드가 사용되고 그런 게이의 서사, 존중되어야 한다라는 글을 보면서 되게 새삼스럽게 느껴졌어요. 저한테는 유성원의 이야기였는데 이게 게이의 이야기로 읽혀야 하는 건가? 내가 너무 게으르게 책을 읽은 건가? 생각이 들기도 했거든요. 작가님의 입장에서 이게 어떻게 읽혔으면 좋겠다라는 방향이 혹시 있을지, 아까 반은 장난으로 사회 부문에도 들어가야 한다 말씀을 해주셨지만 한번 더 말씀을 해주시면 너무 좋을 거 같고. 또 한 가지는 이것도 약간 답을 해주신 거 같기는 한데, 말하고 만들고 운동하는 그 원동력, 왜냐면 말을 하고 계속 해도 들어지지 않을 거 같다고 하면 힘을 잃게 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할 수 있는 힘이 무엇인지.


유성원: 이게 우리가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퀴어영화제인가? 배지에 이것은 퀴어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간의 라고 하는 이동진님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배지를 팔고 있어요, 기념품으로. 항상 퀴어나 소수자 재현에 있어서 신경질적이기까지 한 어떤 반응 중의 하나가 이거는 이 사람의 총체성을 띤 이야기로 봐야 한다라는 시선에 대해서 보편성으로 환원하려는 논리에 대해 지적하는, 소수자 안의 다양성? 차이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반응들이 있는 거 같은데, 저는 그런 면에서 오히려 그런 것은 이 책의 면면에 충분히 해냈고 거부감이 있을 수 있거나 문제적일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한 사람의 이야기로 읽어주길 바랐거든요. 여기에는 의도해서 성적인 면을 강조해서 쓰기도 했지만 사실 제가 일기를 썼던 것들은 더 많은 양이 있어요. 그런데 원래 이거는 장편소설을 생각하고 썼거든요. 장편소설을 생각하고 일기들을 추렸고 거기에서 이야기들을 가공했어요. 그래서 아까처럼 졸았던 거를 나갔다가 늦게 들어왔다 정도로 수정한다거나, 사실들의 시간대를 뒤섞기만 해도 그건 충분히 허구적인 거예요. 여기에서도 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오지만 이 형이 저 형인지 저 형이 이 형인지 읽는 사람은 모르게끔 되어 있거든요. 왜냐면 저는 그분들의 이름을 모르거든요. 그러한 저의 한계나 그런 것들을 적극적으로 넣어서 허구적으로 썼는데 그때는 장편소설을 생각하고 썼기 때문에 한 인물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면에서 저는 그렇게 읽어주신다면 너무나 뿌듯하고 감사한 일이고요. 말하고 만들고 운동하는 어떤 원동력 같은 거는 너무 어렵죠. 너무 어렵고. 근데 제가 좋아하는 것 중에 그런 말이 있어요.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이라는, 안 읽어보신 분들은 읽어보시면 좋을 텐데, 거기에 보면 우울증에 무엇보다 도움이 되는 건 오만함이라는 얘기가 있거든요. 누군가가 자기가 나약해가지고 혹은 슬픔에 빠져서 죽음을 택했다라고 생각하는 게 싫은 거예요, 내가 죽고 난 뒤에 누군가가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에 대해 자신이 통제력을 잃는 것이 너무 싫기 때문에 안 죽을 거다 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저는 그런 것들이 굉장히 좋았고. 그것과 조금 비슷한 맥락으로, 제가 아무도 만나지 않고를 작년에 만들고 올해 이것을 묶을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제가 이 책을, 아까 엄마가 59년생 연자는을 쓰시면서 엄마가 이런 얘기까지 써야 되는지, 너희들에게 상처가 되는 건 아닌지 고민이 된다 그래서 엄마 내가 쓴 글 봤잖아 이 정도까진 써도 돼, 그랬더니 엄마가 그래도 너무 갔다면서, 엄마가 말은 안 했지만 남은 남이니까 이걸 재밌게 읽을 수 있을지 몰라도 엄마는 힘들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 근데 나는 새로 책을 낼 거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그 책 10년 뒤에 내면 안 되겠느냐고 하는 거예요. 그 책, 알겠는데 10년만 있다 내면 안 되니? 너희 누나 시댁도 보는 눈이 있고 조카들도 아직 어린데. 그래서 그 말을 들으니까 정신이 번쩍 드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답이 될진 모르겠지만 그런 어떤 엉뚱한 오해 같은 것을 오해인 채 놔두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기다리다가 그렇게 자극하는 순간을 만나면 그냥 해버려야지 하게 되는 거 같아요. 그래서 늘 이걸 보여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갖고 있으면 언젠가 써먹게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혹시 글을 쓰고 계시다면 계속, 언제 올지 모르지만 때를 기다리다가 누가 나를 빡치게 한다 그러면 보여줘야지, 이때다 하고.


오은: 이 책 제목이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이잖아요. 제가 이 행사의 사회를 맡게 된 이유가 올해가 삼십대의 마지막이어서 저를 불러주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이 책 마지막에 친절한 설명이라고 되어 있고 유성원 작가님이 지금도 수정하고 있는 긴 글과 나영정 활동가의 글을 향한 빨래집게 같은 글들이 빨랫줄에 걸려 있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 책을 두 번 다 읽고 나니까 정상성, 정상적인 삶이라는 우리 규범을 깨부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우리만의 빨랫줄을 가져야 되겠다 그 빨랫줄에 우리가 원하는 빨래집게를 배열하는 게 좋겠다. 마치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이 이렇게 알록달록한 하트들로 구성돼 있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만의 빨랫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끝으로 제가 질문을 하나 드릴게요. 다음에 쓰고 싶은 책, 쓸 예정인 책이 있을까요?


유성원: 요즘 들어서 계속 그런 생각이 들어요. 다른 사람들이 생산한 글, 다른 사람의 질문을 읽고 거기에 나름으로 메모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오은: 질문을 하나 더 드리고자 합니다. 어쩌면 이 책은 슬픔과 실패와 무기력, 무능력 이런 것으로 가득차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으면 어떤 사랑의 기운 같은 게 느껴졌어요. 유성원을 버티게 해주고 지금 여기까지 오게 해준 힘, 그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면 유성원이 생각하는 사랑이 대체 무엇일까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질문으로 유성원에게 사랑이란?


유성원: 맞아요. 이 얘기 하고 싶었는데요. 제가 아까 소중함에 관해 얘기하면서 사랑이 마치 만능인 것처럼, 소중함, 이런 것이 마치 해결해주는 것처럼 얘기했지만 해결해주지 않거든요. 여기 잠깐 읽었었던 부분에서도 그 중독이나 이런 것이 필요한 상태를 타인의 사랑에서 구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불확실성이 많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어렵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내가 어떤 소중한 사람이 있어서 지금 건강해졌어, 아니면 살아가는 것이 괜찮아, 라고 생각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답이라고 누군가에게 제시되거나 얘기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제가 학교 다닐 때 도서관에서 어플로 메시지가 왔어요. 가까운 거리에서. 그 어플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을 보여주거든요. 같은 학교에 저와 같은 사람이 메시지를 보낸 거죠. 그래서 만난 거죠. 그 사람은 저의 학교 선배였는데 굉장히 안정적으로 보였어요. 게이 친구들도 많았고 사귀는 사람도 있었고 근데 저는 혼자였고 그런 사람들을 만나거나 어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 사람이 뽐내는 듯한 안정감, 주변의 인맥들이 굉장히 저한테는 상처였거든요. 그럼 나를 거기 끼워주겠다는 거야? 그런 것도 아니에요. 그럼 어쩌라구. 그 사람은 나는 이런 사람들이 있어, 하고서 저는 다시 혼자가 된 거예요. 저는 그런 부분들에 있어서 제가 지금 운이 좋게 어떤 관계를 노력하면서 함께하고 있지만 우리 삶에는 원하지 않아도 헤어져야 할 때가 있고 여러 변수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떠나서, 건강, 건강이라는 말은 좀 아니지만 그런 걸 관리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그래서 사랑은 답이 될 수 없지만 그것이 부재하더라도 자신을 관리할 수 있는 동기,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랑은 잘 모르겠어요.


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게 만드는 게 있다면 그게 사랑일 거 같아요. 비단 이성 간 동성 간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뿐만 아니라 사물이나 내가 하고 있는 일이나 이런 것들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어쩌면 기대를 품게 하고 희망을 품게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성원: 하나만 더. 제가 처음에 읽었었던 희망이 물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저 사람을 구할 수 없는 희망인 채 빛나는 걸 보고 싶다고 쓴 거는 로제타라는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를 보고 인상적인 장면이 있어서. 로제타가 제가 너무 좋아하는 영화인데 거기에 보면 여주인공이 너무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어요. 주변 상황이 악화되는 중에, 그러다가 이 친구가 늪에 빠지던가 그러는데, 알코올 중독이던 어머니가 이 친구를 도와주지 않고, 도망가다 빠졌던가 그랬을 거예요. 이 친구가 혼자 늪을 기어나오는 장면을 아주 길게 보여주거든요. 집요하게. 그걸 보면서, 예를 들면 사랑, 희망, 이런 단어들 혹은 감정, 이런 것들이 언어일 뿐인 거, 감정일 뿐인 거, 그리고 실제 삶은 너무나도 다른 층위에 있잖아요.


오은: 추상어는 추상어로 남겨두고 우리는 구체적인 삶을 살자는. 역시 활동가로서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오늘 2시간 동안입니다. 토요일이고, 삼십대가 아닌 분도 계셨을 테지만 외로움은 없었길 바라면서 오늘 행사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행사 어떠셨는지 한 말씀 해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유성원: 오늘 이렇게 토요일에 와주셔가지고. 비가 많이 온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지금 또 오고 있네요. 자리에 와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그냥 책 내면서는 많이 배우고 있는 거 같아요. 오늘 진행, 제가 걱정했어요. 책을 사람들에게 선물할 때도 늘 하는 말이 봉변을 당하게 해드리는 거 같다고, 괜히 난감하게. 어려운 자리에 사회를 맡아주셔서 이렇게 진행을 잘해주신 오은 시인님과 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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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울병, 나는 이렇게 극복했다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 지음, 박민철 옮김 / 하나의학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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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아서 뭐해?

나는 그런 질문을 자꾸만 던졌다. 

다른 사람들은 내게 이런 위로의 말을 해 주었다.

"그건 일시적인 현상이야. 곧 지나가 버린다구. 넌 곧 괜찮아질 거야."

이런 사람들은 내 기분을 잘 모르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내 기분을 안다고 그릇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자신을 향해 백 번도 넘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느낄 수 없고, 움직일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고, 세상사에 관심이 없다면, 그건 시체잖아? 과연 그런 상태로 살 필요가 있을까? 정말이야. 사람이 그저 숨만 쉬면 살아 있는 거야?

내 마음의 병적인 상태는 자신도 깜짝깜짝 놀랄 정도였다. 죽음과 그 일행이 늘 주위에서 맴돌았다. 나는 어디에서나 죽음을 보았다. 그러면 마음의 눈에는 시체를 덮는 거적, 시체의 발가락에 둘러치는 인식표, 시체를 넣는 마대자루가 크게 확대되어 보였다. 그 어떤 것을 보아도 예사롭지 않았고, 그 모든 것이 결국 인간은 영안실에서 끝장난다는 것을 일러 주었다.

내 기억은 마음의 하수도를 들여다보는 창구가 되었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라고는 과거의 괴로웠던 추억뿐이었다. (-)

(-) 머리를 감는 데 몇 시간이 걸렸고, 또 머리를 말리는 데 몇 시간이 걸렸다. 얼음 얼리는 트레이(그릇)에다 물을 담아 냉장고에 넣는다는 것은 감히 생각해 볼 수 없는 큰 일이었다. 나는 낮에 입었던 옷을 입은 채 잠드는 경우가 많아졌다. 너무너무 피곤하여 옷을 갈아입을 힘마저 없었던 것이다.


"(-)환자는 자신의 느낌에 매우 당황하고 있으며 우울증이 어떻게 진행되든 상관없이 '그런 느낌을 참을 수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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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인간적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 - 인간과 종교, 제사, 축제, 전쟁에 대한 소묘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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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의 정점을 정하는 것은 바로 불가능이다. 또는 말을 바꾸면 불가능에 대한 의식은 의식으로 하여금 적어도 어떤 성찰이 가능한 성찰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미완성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미완성이 결코 답변을 지연시키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늑대는 늑대를 잡아먹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지만, 그 규칙은 깨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다른 늑대를 잡아먹는 늑대는 규칙을 어긴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 규칙이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늑대와 세계 사이의 연속성은 남는다. 그러나 늑대 앞에는 매혹적인 또는 고통스러운 현상이 벌어진다. 즉 같은 종류의 개체들이나, 음식, 그리고 매혹의 또는 고뇌의 어떤 것도 이제는 전과 같지 않다.


 


동물을 사물로 간주하는 태도에는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일종의 위선이 개입한다. 동물은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며, 동물이 사물이 되려면 동물은 죽어야 하든지, 순치되어야 한다. 그래서 동물은 죽은 상태의 음식일 때만 대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요리는 (-)'인간은 사물로 만들지 않고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일상적인 삶의 조건에서는 인간은 먹이가 되지 않는 동물이다. (-)요리란(-) 살아 있는 동물을 처음부터 사물로 규정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죽여서, 자르고, 익힘으로써 나는 암묵적으로 그것이 과거에도 사물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자르고, 익혀서, 먹는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속이 메스꺼워진다. 죽은 사람의 살을 먹는 일은 아무에게도 해가 되는 행위는 아니다.




제사장은 말한다. "(-)나는 희생자 너를 과거에 네게 있던 세계로부터, 너의 내적 본성과는 상관없는 의미를 갖는 사물의 상태로부터 너를 건져낸다. 그래서 나는 네게 신적인 세계의 내밀성과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심오한 내재생을 회복시켜준다."




끝에 이르면 사물은 더 이상 사물이 아니다. 만져서 알 수 없는 특성들을 넘어서는, 모든 가능성을 향해 열린 문이 그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은 그 자체로는 텅 빔이다. 문은 무한 종속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면서 부서질 때만 사물일 수 있다.


초기의 내재적 신성은 인간과 세계의 동물적 내밀성에 근거하며, 반명 속세의 세계는 내밀성-인류에 내재하는-을 갖지 않는 사물의 초월성에 근거한다. (-)

신성은 그 자체로 둘이다. 암흑의 불길한 신성(-)은 길조의 밝은 신성(-)에 대립적이다.


이원론적 전개과정에서 발견되는 신성은 합리적, 도덕적이며, 불길한 속세적 신성을 거부하는 신성이다. (-)유동적이고 위험한 그리고 불완전하게밖에 이해할 수 없는 형태의 우연, 폭력에 불과한 물질세계의 분할은 고정된 작동적 형태들을 파괴하려고 위협한다.


폭력은 사물의 질서를 제거하되, 사물의 질서를 우선 확립시킴으로써 그렇게 한다. 반면 이성과 도덕의 초월성은 그 절대적 지배권을 폭력(폭발의 전염적 참해)이 아닌 사물의 질서에 부여한다. (-) 폭력은 세계 안에서 사물의 질서 다음의 권리를 가지며 폭력이 악으로 정의되는 것도 오직 사물의 질서를 위험에 빠뜨릴 때만 그렇다.

제사의 약점은 애초의 미덕을 상실한 신성한 사물의 질서를 현실적인 사물의 세계와 별로 다름 없이 비하시킨 데 있었다. 


제사, 위험한 폭력의 절대성에 대한 긍정으로서의 제사는 내밀성에 대한 향수(-)를 각성의 상태에 이르게 하고 고뇌를 유지시켜주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를 그 상태에 이르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폭력뿐이다. 그러나 충동적 순간에는 초월성이 아주 대단한 폭력적 폭발을 일으키고 폭력은 가능성의 각성인 것은 사실이지만-왜냐하면 그렇게 전적인 폭력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이원론적 각성의 입장은 다시 졸음으로 이어질 뿐이다.

이원론적 초월성은 세계가 두 원칙으로 분할되는 졸음의 상태(사실 졸음만이 그 분할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로 이어진다.(-)남아 있는 것은 복종이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하는, 대립적 보완물 없는 현실적 질서의 제국. (-)폭력이 부정적인 자리밖에 차지할 수 없는 세상이다. 

 


악은 언제라도 끼어들 수 있다. 만약 악의 현실적 힘들이 내 눈앞에서 나의 친구를 죽인다면 폭력은 내밀성을 아주 활발하게 만들 것이다. 죽음의 내밀성이 고통스럽게 드러나는 폭력을 당하면 (-)잔인한 행위를 단죄하는 신성한 선의 편에 서게 된다.

나는 폭력에 호소해서 질서를 회복시킨다. 그러나 내게 신적 내밀성을 열어준 것은 복수가 아니라 죄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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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종로3가 / 종로3가 타자
서울퀴어콜렉티브 지음 / 서퀴콜프레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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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 퀴어 이렇게 스스로 설명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나를 설명하는 말, 이 말을 고정적이고 단단한 개념으로 하는 것이 필요한가요? 다들 그렇게 설명하고, 설득하고 싶어 하는데 저는 그렇게 하는 게, 역으로 현실 트랜스젠더들의 삶을 안 좋게 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트랜스젠더들이 자기를 설명하기 위해 난 이렇게 태어난 거야, 난 트랜지션을 하고 싶고 수술을 받고 싶고, 그러며 행복해하고. 이걸 계속 말하게끔 요구 받으니까. 호르몬하다가 식을 수 있잖아요. 좀 피곤하다, 이럴 수 있는데 계속 뭔가 만족스럽고 지금의 내가 너무 좋아, 그래야 하는 거예요.

 

(-) 저는 안 당당할 수도 있었으면 좋겠거든요. 사람이 그렇잖아요. 당당할 때도 있지만 어떨 땐 좀 주눅들 때도 있고 좀 내가 싫을 때도 있고. 그런데 헤테로가 나 내가 싫어이러면 옆에서 요즘 너 그렇구나이러는데, 게이가 갑자기 요즘 내가 싫어이러면 사람들이 심각해지고. 혹시 자살할까봐 옆에서 괜찮아, 너는 아름다운 사람이고이러는 게. 그게 고마울 때도 있죠. 죽고 싶을 때도 있으니까. 그런데 어떨 땐 . 이거, 사람 누구나 다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감정 아닌가? 그럼 난 항상 행복한 사람이어야 하나이런 생각들 때가 있어요.

 

(-)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탐구하는 이유가 어디 딱 도착해야 될 데가 있어서, 도착하면 갑자기 아 난 이제 찾았어, 완벽해.” 이런 게 아니잖아요. 끊임없이 고민하고 나를 탐색하고 나를 알아가고 나를 둘러싼 세상과 나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고. 나와 나의 몸, 나와 내 삶의 관계를 탐색하는 과정이 저는 정체성을 고민하는 것이라고 봐요.

 

(-) 2~3년 전까지만 해도 일상적으로 치마를 많이 입고 다녔어요. 학교 갈 때 치마 입고 가고 생활할 때, 외출할 때 많이 입었죠. 근데 종로는 치마 입고 못 가겠단 생각을 했어요. 오히려 강의실엔 들어갈 수 있어요. (-) 종로는 치마를 입고 가면 그 사람들의 표정? ‘아 나 저거 뭔지 알아. 트랜스.’ 이런 표정으로 있거나, 괜히 와서 너는 살을 좀 빼는 게 좋겠다는 둥 이런 참견을 하기도 하고. 종로라는 공간이 사실은 굉장히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여기 오면 우리 다 동질적이야라고 느끼게 하는 그런 이상한 측면이 있어요. 제가 어떤 이질적인 존재가 되는 거예요. 거기서 오는 불편함도 있고. 그래서 치마 같은 걸 잘 안 입고 갔죠.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여긴 우리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야라고 얘기하는데,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거죠.

 

(-) 인권 운동하는 사람들이 아 왜 이 공간 안에 이런 사람들이 오지 못할까. 우리가 그 사람들을 배제하고 있는 건 아닐까이런 고민을 하는데 어떤 순간에 보면 너네가 그 사람들을 배제하는 게 아니라, 광대한 영역이 있고 오히려 너희는 구석에서 너희들끼리 모여서 놀고 있는데 네 눈에 안 보인다고 배제하고 있나?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않아?”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순간도 있어요.

 

(-) 인권단체를 가니까 저한테 정체성이 어떻게 되세요라고 물어보는 거예요. 전 그게 좋더라고요. 설명을 하는 게 좋다기보다 이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어떤 공통된 속성을 가진 사람일 거라고 가정하지 않는 데서 오는 편안함. 하나하나 정체성으로 인정을 해 달라 여기에 방점을 찍는다기보다는,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이 공통된 욕망이나 뭔가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너무 쉽게 가정하지 말자는 거죠.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왜냐면 그럴 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되게 불편하니까.

(-) 저도 저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을 거 같아요. 그런 개념을 하나하나 다 빠르게 업데이트하는 데 초점을 두기보단 이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어떤 가정들을 버리기 시작하면 그게 훨씬 편안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잘 모르는 어떤 개념, 이 안에서 잘 통용되지 않는 어떤 개념으로 자기를 설명하고 자신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는 사람이 오더라도 훨씬 더 잘 적응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이 공간으로 올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사실 LGBT라는 게 기획이잖아요. (-) 예를 들어 저는 트랜스젠더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데, 레즈비언 공동체의 문화나 이런 어떤 부분들보다 장애운동이나 이주운동을 볼 때 엄청 와 닿거든요. 이주운동에서 그 사람들이 겪는 문제와 제가 겪는 어떤 문제들이 비슷한 구조로 만나는 부분이 있어요. 그러면 저는 저쪽이랑 같이 뭔가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 사실은 경제적 차이나 정치적 차이, 사회제도적 차이 같은 것들이 훨씬 더 크게 있고, 거기에서 오는 온갖 종류의 문제들이 있는데, (-) 우리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던져야 되는 거죠. 이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정말 어떤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나? 이 안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할 때 이게 단순히 어울리기 힘들기 때문일까? (-)

 

도균, 존재의 위계, 공간의 위계」 『타자 종로3/종로3가 타자(서퀴콜 프레스, 2020)

 

소중이 도균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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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 - 코로나19와 일상의 사회학
공성식 외 지음 / 돌베개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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