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실은 글쓰기가 ‘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진실’)은 전적으로 저 아래에, 아주 아득하게 멀리 있습니다. (-) 우리는 세상에 살아 있는 입자, 반딧불이이고, 주위에는 진실의 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소음과 소문 제조기들’이 기를 쓰고 만들어내는 엄청난 소음과 소문의 합주가 울려 퍼집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내적인 적들도 많습니다. 우리의 공포와 관련된 것들이지요. 우리를 구성하는 것, 우리의 약점 말입니다.
(-) 글쓰기는 그 원초적인 그림, 우리의 그림,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그 그림을 복원하고 발굴하고 다시 찾으려는 시도입니다. 이상하게도 그 시도는 어떤 장면에 관련됩니다. 그 그림이 이유 없이 거기 있는 게 아니지요. 열린 문과 접촉했던 이들은 그 문을 하나의 장면이라는 연극적 형태 속에서 지각했습니다. 왜 장면일까요? (-) 우리가 그 장면의 관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장면 안에 있지 않습니다. (-) 우리는 어느 예외적인 장면을 목격하는 자들이고, 비밀은 다른 쪽에 있습니다. 비밀을 가진 이는 우리가 아닙니다. (-)
(-) 글쓰기는 죽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법, 다른 말로 하자면 삶의 극단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그게 망자들이,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세상의 끝을 줍니다. 인간이기 위해 우리는 세상의 끝을 경험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우리는 세계를, 한 세계를 잃을 필요가 있고, 세상에 한 세계보다 더 많은 세계가 있음을, 세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의 세계가 아님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각자 짊어진 필멸과 불멸의 운명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게 됩니다. 죽음과 대면하지 않는 한에서만 살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
(-) 어머니는 죽었습니다. (-) 그 죽음은 그녀가 어떻게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가끔 용납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이것이지요. 우리는 그 일에 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 이것이 우리의 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늘 죄책감을 느끼는 죄목,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한 채 이 예상치 못한 끔찍한 얻음을 받는 죄입니다.
저의 첫 책은 아버지의 무덤에서 솟아났습니다. (-) 아마 가난하고 경험 없던 그때 제가 써야 했던 유일한 것, 유일한 자산이 아버지의 죽음이었기 때문이겠지요. 저를 살게 했고, 제가 살았고, 저를 시험에 들게 했고, 저를 완전히 무너뜨렸기 때문에 제가 느낄 수 있었던 유일한 것. 그것은 이상하고 기괴한 저의 보물이었습니다. 그때는 이런 것들을 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했다면 글을 쓰지 않았겠지요. 저는 오랫동안 반전된 동화 속에 있는 듯이 더없는 상실감과 어린애 같은 슬픔에 젖어 아버지의 죽음을 견디며 살았습니다. 아,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는 다른 멋진 이야기들을 지어내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세상의 색깔이 달라지고 크게 애를 쓰지 않아도 다른 장면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 저는 아버지가 없는 다양한 장면들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 ‘글 쓰지 말라’라는 금지의 장면. 그리고 저는 혼잣말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쓰지 않았을 거라고… 죽음을 갖지 않았을 거라고요. (-) 아버지가 제게 죽음을 주었다고요. 시작할 죽음을요.
단순하고 솔직한 영혼의 소유자이신 어머니가 최근에 제 책을 읽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아버지의 죽음이 너한테 그렇게 심각한 일이었구나.” “예. 엄마한테 그 얘기를 한 백 번쯤 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 의미가 어머니에게 전달되지 않은 건 분명했지요. (-)
(-) 우리는 살해됩니다.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지만, 당신과 나 사이에, 당신의 사랑과 나의 사랑 사이에 살인이 있습니다. ‘누가 나를 죽이는가? 나는 어느 살인자에게 나를 내맡기고 있는가?’ 모든 위대한 글은 이 질문에 사로잡힌 포로입니다. 우리는 살인 이야기에 열광하지요. 우리는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읽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탐닉하는 것은 자신이 살해된 사건에 대한 설명입니다.
초상화가 초상화 안에 있고, 책이 책 안에 있습니다. 이 과정의 마지막 순환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조심해, 그림을 그릴 때 모델한테 무슨 일이 생기지? 화가는 모델과 어떤 관계야? (-) 모든 화가의 모델이 그런 질문을 합니다. (-) 우리는 생명을 주는 사람이 화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모델입니다. 화가는 모델의 생명을 빼앗는 자이죠. 모든 예술에 대한 은유입니다.
우리의 처지가 어떻든 간에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진실에 대한 의무, 무엇이 위험에 처했는지 알고 그것을 부정하지 않을 의무입니다.
(-) 화자는 ‘그런 일이 재능이 있고’, 처음부터 치명적으로 다쳤기 때문에 그 죽음의 광경을 받아들입니다. 그 장면에 불가항력으로 새겨진 죽음을 보는 걸 견뎌내려면 정말이지 다친 상태일 필요가 있습니다.
전 속으로 말했죠.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어떻게 이렇게 뻔뻔한 글을 쓸 수 있어?
(-) 무언가가 진실과 죽음을 엮습니다. 우리는 대단원의 시간, 마지막 순간 외에는 차마 진실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보다 일찍 진실을 말하는 건 너무 큰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 순간은 언제일까요?
진실이라 부르는 것 쪽으로 간다는 건 최소한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것이겠지요. 우리 삶은 거짓말로 세워진 구조물입니다. 살려면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글을 쓰려면 거짓을 말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무언가가 진실 쪽으로 가기와 죽기를 거의 같은 뜻으로 만듭니다. 진실 쪽으로 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리는 진실을 읽을 수 없고, 견딜 수 없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직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무엇을 말할지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할 뿐입니다. 비록 그 마지막 순간이 언제일지는 전혀 모르지만 말입니다.
(-)
진실을 쓰거나 말하는 건 진실에 상당합니다. 우리가 진실을 들려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에게 상처를 입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진실을 말하는 건 금지되었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말해서는 안 되고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대체로는 두 가지 필요 때문입니다. 사랑과 비겁에의 필요 말입니다. (-)
(-) 이 집, 우리로서는 전혀 아는 바 없고 보기에는 검은 것이 하나 움직이는 듯한 이 낯선 집, 이 집을 위해 우리는 가족의 집을 포기합니다.
알려진 것이자 알려지지 않은 것, 제일 덜 알려진 것이자 제일 잘 알려진 그것, 이것이 글을 쓸 때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일 잘 알려진 알려지지 않은 것을 향해, 앎과 알지 못함이 닿는 곳,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고자 할 곳으로 갑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를, 보이지 않는 것을 마주보기를, 들리지 않는 것을 듣기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싶어 할 곳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히 생각입니다. 생각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는 건 애쓸 가치가 없는 일입니다. 그리기는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리려 애쓰는 일이고, 글쓰기는 쓰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을 쓰는 일입니다. (-)
‘인간다움’이라고 부르는,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선과 악의 얽힘. 악보다 선, 증오보다 사랑을 택하는 이 기호. 어둡고, 난폭하고, 좋고도 나쁜 우리의 한 부분. 인간에게 있는 짐승의 부분. (-) 우리는 때로 우리 자신을 평가하고, 우리는 우리와는 완전히 다르면서 우리와 같은 종인 어떤 존재에 비해 평가되고, 때로 우리는 여성으로서 어떤 남성에 비해 평가되고, 때로는 여성으로서 어느 거지에 비해, 아니면 어느 맹인에 비해, 아니면 어느 암탉에 비해, 아니면 어느 바퀴벌레에 비해 평가되고, 때로 우리는 남성으로서 어느 개에 비해 평가되고… 평가되고 저울질당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가서 우리보다 더 순수하고 적나라한 존재인 우리의 최악 또는 ‘최선’을 찾아야 합니다.
한 남자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어떤 여자가 자신한테서는 찾을 수 없는 무언가를 찾으러 동물원에 갔습니다. 혐오의 원천, 혐오의 비밀을 말입니다. (-)
고백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고백할까요?
(-) 고백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두려워하는 어떤 것과 접촉하게 됩니다. ‘혐오’ 말입니다. 우리는 사랑만큼이나 혐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혐오가 사랑의 일부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혐오 물질을 게워버리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사랑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사랑-혐오해야 하는 이 이상하고 상호 배치되는 관계를 이해하려면 개가 필요합니다. (-) 제가 개를 키우지 않으려고 피해 다닌다는 걸 늘 알고 있었지요. 개는 위협입니다. 개의 위협은 그 끔찍한 사랑입니다. 어떤 개를 보는 순간에 알게 됩니다. (-) 대부분은 사랑으로 똘똘 뭉쳐 있지요. 이 무한하고 완전하고 끝없이 베푸는 사랑이 인간에게는 버겁습니다. 우리는 사랑과 그 반대의 것이 섞인 혼합물입니다. (-)
(-) 어떻게 그 연소점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지금껏 사랑과 비겁 때문에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한 것들을 모두 쓰거나 말할 수 있을 그 ‘최후의 시간’으로 말입니다.
우리가 그 은총의 시간에 닿으면 생길 일은 지금껏 말하지 않았던 것을 말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죽는다면, 그게 죽음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왜 그렇게 죽기를 욕망할까요? 우리가 너무나도 말하기를 욕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그 수수께끼 같은 순간에 도달하고자 욕망할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했던 상태를, 완전히 발가벗은 채 살기를 욕망하기 때문입니다. (-) 숨기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기는 엄청나게 힘든 과제이니, 내내 노력해 왔다면, 우리는 사랑과 비겁으로, 비겁인 사랑으로, 절대 말하지 않았을 것을 모두 말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유하지 못하고, 우리는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마지막 시간이 오기 전에는 이런저런 여성이 남성이었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 그 말을 할 수 없을까요? 왜냐하면 세상이 아직 들을 준비가 되지 않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위험합니다. (-) 내적으로는 남자인 여자를 사랑한다고 상상해 봅시다. 정확히는 우리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인 여자를 사랑한다는 의미인데, 둘은 다릅니다. 그것은 남성이기도 한 여성, 다른 종입니다. 아직은 이런 복잡한 얘기들이 들리지 않습니다. 이게 사실인데도, 너무나 이상하게 요즘 우리는 여전히 명쾌한 차이를 내세우면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데도, 계속해서 남자와 여자를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복잡한지 드러내게 되지를 않습니다. (-) 글쓰기만이 이걸 할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가 어떤 남자와 결혼하는 이유는 그 남자가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누구와 결혼했을까요? 아마도 우리 할머니겠지요. (-)
(-)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기에, 늘 우리를 우리라고 여겼기에, 한 번도 고려해 보지 않은 어떤 것을 적거나 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우리는 더는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됩니다. (-) 저는 저를 지각할 수 있는 타자가 아닙니다. 저에 대해 아는 것도 있지요. 제가 누가 아닌지는 안다고, 저는 믿습니다.
(-) 죽었다가 살아났음이 분명한데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데도, 그 얘기에 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은 이들도요.
글쓰기는 고백할 수 없는 것을 고백하는 데 성공할지도 모르는, 정밀하고 까다롭고 위험한 수단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저의 욕망입니다. 저 또한 죽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성공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요. 저는 노력합니다. 지금까지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저는 할 수 있는 한 그에 근사한 일을 합니다. 제가 거짓을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곳으로, 그리고 클라리시가 꿈꾸듯이 죽음과 무언가를 공유할 수 있는 곳으로 다가가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