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앞에 두 번 깨어나는 - 사랑하거나, 고독하거나, 소설가 오성은의 영화 소리 산문
오성은 지음 / 책밥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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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런 소중책이 출간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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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
최승자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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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전 일생토록 어떤 순간을 기다려왔는데요, 그게 그 순간일까요? 그 순간에 몹시 아플까요? 「심장론」 부분

나더러, 안녕하냐고요?/그러엄, 안녕하죠. 「안부」 부분

그것들이 나를 지나치기 전에, 내가 먼저 통과한다./일번 국도에서, 통과할 것으로서의 이 세계,/스쳐 지나가야 할 것으로서의 이 세계를. 「일번 국도」 부분

산다는 것은 결국 싼다는 것인데 「“그릇 똥값”」 부분


최승자의 이 시집을 읽으면 벼락이 내리치거나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은 어떤 순간을 기다려온 나와 그 전조에 무심한 세계를 일별하게 된다. 시인은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고, 우리가 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뉴스를 듣고 기뻐한다. 그 소식을 듣지 않았더라면 세상을 이렇게 창조해놓은 신을 죽여버리고 말았을 테니까. “도대체 이런 스토리를 쓴 작자는 누굴까./죽여버려야지, 나는 그 안의 한 고통스런 배역으로 존재하긴 싫으니까”(「구토」).

시인에게 눈은 오직 길 잃고 헤매려 만든 연기 가득한 스크린이자 허상만을 보려 만든 필름이다. 스크린 안의 무서운 형상에 놀란 눈들은 그 필름을 행복한 필름으로 고치려 애를 쓰다 죽어버린다. “영원한 고쳐 쓰기의 과정, 구제불능의 패러디”(「눈이란 무엇인가」)인 이 세계에서 나는 끊임없이 만지고 싶어하는 손, 맛보고 싶어하는 혀, 냄새 맡고 싶어하는 코, 듣고 싶어하고 보고 싶어하는 귀와 눈, 생각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고서 “먹어도 만족할 줄 모르는/거대한 식귀”이다. 나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허섭스레기들에 목이 말라/쓸어담기만 하는 거대한 동냥 바가지”였으며 ‘그것들의 조립이 나라고 믿었’다(「또다른, 걸인의 노래」). 

시인은 “패혈증처럼 숨가쁘게,/어질어질” 진달래가 피어오르는 바깥의 봄을 견디지 못하고 쪽문을 닫아버린다. 시인은 자신이 ‘닫혀버린 집안 한구석에서 무게 없이 깊이깊이 가라앉는 인조 장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용서한다(「아득한 봄날」). “네 몸, 내 몸을/나의 눈, 나의 귀, 나의 코, 나의 입을.” 그리고 썼던, 쓸 모든 시를(「나는 용서한다」). 시인은 이제껏 먹여 키워왔던 슬픔들, ‘사실이었고 진실들이었던 그 대책 없는 픽션들’을 밟아버리기로 한다. 한때는 그것들이 나를 뜯어먹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야말로 그것들을 얼마나 정성스레 먹여 키웠는지 알고 있다고 고백하면서(「더스트 인 더 윈드, 캔자스」).

이제 시인은 ‘긴 여행의 한 출발점에서’, 자신에게 이것이 너의 삶이라고 속삭이며 삶의 무대를 꾸며주고 삶의 줄거리를 하염없이 이어온(「?」) “태초의 빈 공책” 위에 아무것도 더이상 쓰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나는 더이상 쓰지 않을 것이다, 라고”도 그 위에 더는 쓰지 않는다(「빈 공책」). 그제야 시인은 자신이 디딘 땅, 그 흙 속에서 말없이 천 년, 만 년 기다린 신부를 발견한다. “몸 다 굳어져/흙 인형으로 변했다가/이제 마침내 흙으로 부서져버릴” 그토록 오래 기다려온 납빛 절망의 눈을(「연인들 1」).

어느 날 아침, 방에서 눈을 떴을 때 시인은 움직임이 없는 돈벌레를 발견한다. 볼펜으로 밀어보아도 딱 그만큼만 밀려나는 작은 벌레. 섬세한 가는 다리들을 수없이 지닌 그것은 명상에 잠긴 듯 고요하다. 그러다 잠시 후 돈벌레는 얇은 껍질을 벗고 더 짙은 고동색의 벌레가 되어 사라진다. 꼬물거리며 사라지는 작은 돈벌레를 보며 느꼈던 감정이 슬픔인지, 기쁨인지 시인은 판정을 내릴 수 없다. 그러다 시인이 떠올린 것은 타로 12번 카드, hanged man이다. 빚을 갚지 못한 벌로 교수대에 한쪽 발이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려 죽음을 당한 남자. 그 카드를 거꾸로 놓고 보면 남자의 얼굴은 평안하다. 시인은 묻는다. “죽음보다는 속세의 모든 빚과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쪽이 훨씬 덜 괴롭다는 뜻일까.” 벌레의 허물을 버리려 볼펜에 꿰어 들고 마당으로 나간 시인은 마당 한 끝에서 거미집을 발견한다. 분명 어제 부숴버렸던 것인데 같은 자리에 다른 거미가 커다랗게 집을 지어놓았다. 몇 개의 이슬방울들을 매단 둥근 거미집은 빛 속에서 “제가 전 우주인 것마냥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돈벌레 혹은 hanged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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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연필 - 연필이 연필이기를 그칠 때 아무튼 시리즈 34
김지승 지음 / 제철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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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연필 김지승 북토크 중에서

10. 30. 말과활아카데미 3층


연필 수집하시는 분들 중에서 수집에 의미를 두시는 분도 있고 실사용자, 실제 사용이 중요하신 분들이 있는 거 같아요. 저는 양쪽에 다 걸치고 있어서. 저는 무조건 아무리 좋고 귀해도 일단 써야 돼요. 깎아야 돼요. 근데 그러면 새 연필로 되돌릴 수 없으니까 특별한 날을 골라요. 새 글을 쓴다거나.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까? 아니면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 편지 쓸 때. 주변에 책 쓰시는 분들이 많으니까. 최근에는 한지혜 작가님의 소설집이 나왔는데 거기 나오는 어머니의 출생연도 정도 되는 연필을 골라서 그걸 깎아서 줄을 긋는 용도로 쓰고 있어요. 


제가 갖고 있는 것 중에 좀 오래된 게 이게 1890년대 연필이에요. 훨씬 예쁘고. 이걸 누구에게 선물하면 1890년대 나무를 선물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갖고 있는 물건 중에 1890년대만큼 오래된 것이 없을 거잖아요. 그냥 연필이다, 해서 주면 그런데 이게 1890년대 나무고, 흑연이다. 그리고 흑연은 점토를 섞어서 만드는데 흙도 여기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그냥 연필이라는 사물보다는 과거로부터 오는 뭔가 같아서 빈티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거 같아요.


저는 중고신인 같은 작가거든요. 지금까지 책을 안 쓴 게 아닌데 제가 그전에 쓴 책들은 주어의 자리에 단체나 여성 노인의 이름을 놓고 썼어요. 저는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책은 주어의 자리에 ‘나는’을 박아놓고 쓰니까, 나를 드러낸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글을 쓰지? 제 주변 여성작가들도 창작에 대한 억압이나 공포가 한층 더 큰데, 잠이 안 오더라고요. 글을 써놓고 꿈에 그 글에 대해 비판받는 꿈. 내가 뭐라고. 내가 이런 글을 쓰면 내가 무슨 대단한 삶을 사는 게 아닌데 나까지 책을 내나. 문제가 뭐였냐면 매주 강의를 하면서 여러분의 글을 쓰십시오, 그러는 거예요. 매주 여러분을 앉혀놓고 여러분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염치가 없는 거예요, 제가. 그래서 집에 돌아가는 마을버스에서 머리를 박으면서 니가 그럴 일이 아니지. (웃음) 그 수업이 아니었으면 못 썼을 거예요. 어떻게 하면 이걸 안 쓸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런데 김혼비 작가가 언니, 나는 이제 남성이 쓴 연필 이야기를 보고 싶지 않아, 라고 해서. 자기는 꼭 내가 썼으면 좋겠다고, 주변에서 많이들 그런 이야기를 해서 등 떠밀리듯 앉았는데 쓰다보니까 그런 거 같아요. ‘나는’이 무서우니까 자꾸 타자를 불러오게 되더라고요. 내 안의 타자를 끌어오든, 기억 속의 타자를 끌어오든 해보자 했는데 곰곰이 생각하니 있더라고요. 그분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제 이야기를 슬쩍. 그런 글을 쓰려고 엄청 고민을 하고 노력했던 거 같아요. 잘못 생각했던 건 내 얘기보다 그분들을 등장시키는 게 더 어렵더라고요. 살아 있는 사람은 쓰기가 어렵고, 그래서 죽은 사람 아니면 아주 멀리 있는 사람에게. 실비아 할머니는 한글을 배우고 계시는데, 나오는 글의 제목을 찍어서 보내드렸더니 너무 좋아하시면서 한글로 쓴 좋아요를 제게 보내주셨어요.


이 책을 쓸 때 제가 몸이 많이 아팠어요. 생에 대한 감각이 마치 깜깜한 밤에 안 보이는 계단을 내려가다보면 수직의 감각으로 내려가다가 어느 순간 허방을 딛는 듯한 때가 찾아오고 그러다 땅에 닿으면 수평의 감각으로 살아가는데... 그 수평의 감각. 내가 내 땅에 발을 붙이고 내 감각을 가지고 걸어가야 되는 시기가 왔구나, 늙음이나 노화, 그런 것으로 내 몸에서 받아들이기도 하는 순간 같아요. 죽음에 대해서도 달라졌고, 이 연필이라는 게 아이러니하거든요. 좋아해요. 근데 쓰면 없어지잖아요. 소멸의 순간을 같이하는 거거든요. 사람의 죽음하고도 비슷하지 않나. 그런데 마지막에 몽당이가 되게 귀여워요. 최선을 다해서 깍지 끼워서 쓰는데. 그게 예의인 거 같아서. 최선을 다해서 쓰는 거. 사용하는 거.


(-) 주로 여성이었던 비서는 연필을 들고 무언가를 ‘임시로’, ‘예비로’ 쓴다. 마지막 결정, 명령, 실행은 대부분 남성 상사의 결재로 이루어지며 공공의 의미 체계를 획득하는 결재란의 그 표식은 연필이 아닌 볼펜이나 만년필로 남겨졌다. 그곳은 연필의 자리가 아니다. 연필의 자리가 아니면 여성인 나의 자리도 아니기 쉬웠다. (-) 공식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문서의 효력과 그것을 발생시키는 서명으로부터 여성은 지속적으로 소외되어 왔다.






사람이 잘 부서지는 존재이고, 의아할 만큼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은 ‘안다’고 말하기보다 ‘모를 수가 없다’고 해야 한다. 삶이 환기시키는 건 그런 거다. 우리는 그냥 알기보다 대체로 모를 수가 없는 경험으로 자란다. 상담가가 내려놓은 연필 끝이 뭉툭해져 있었다. 흑연은 잘 부서졌다. 사람이 그런 것처럼 흑연도 강하지 않았다. (-)




다이아몬드와 흑연 구성 성분의 일치와 구조적 차이를 소비하는 한국적 방식은(-) 노력하는 사람과 노력하지 않는 사람의 예시로 곧잘 쓰였다. 흑연처럼 헐렁하고 약하고 잘 부서지는 이들은 패배자가, 고온과 고압을 견딜 만큼 단단한 다이아몬드는 승자가 되었다. (-) 모두가 동일한 욕망을 즉, 다이아몬드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할 거라고 전제한 글들이 많았다. 그중 ‘작은 자극에도 무너지는 흑연 같은 삶’을 나무라는 표현은 당황스럽게 문학적이었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이기도 했다. 다른 것들과 포개지고 더해지고 섞이는 삶을 상상하는 건 무너지고 부서져본 사람들이다. 홀로 단단할 수 없어서 ‘약한 인간 1’과 ‘약한 인간 2’가 손잡고 ‘좀 덜 약한 인간들’로 살아가는 먹먹함에 대해 아는 것도 그들이다. 몇 세기에 걸쳐 흑연에 점토(주로 고령도) 등을 섞어 강도를 높이고 잘 부서지지 않는 연필심을 만드는 데 투자한 것도 흑연의 약함을 충분히 이해한 사람들이었다. (-)




사람은 그렇게 강하지 않아요. 그 말이 여전히 내 옆에 있다. 그럼 나는 잘 무너지고 부서지는 사람들 곁에 있기로 한다. 강함과 약함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그걸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지, 그 각각의 의미와 위계는 누가 정하는 것인지를 자문하면서. 사람이 어떤 순간에 무너질 수 있으며 그 무너짐이 어떤 죄책감을 만드는지에 예민할 수 있는 건 내가 잘 무너지고 부서지는 사람이어서다. 모를 수가 없다. 모른 척은 해도. 연필을 쓰는 사람은 부서진 흑연 가루가 종이의 섬유질에 남는 것이 연필 필기의 원리임을 매 순간 경험한다. 종이 위에 남는 건 바로 그 부서짐의 노력이니까.






(-) 시선이 마주치는 것들마다 나에게 같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다 끝났어. 나는 원하는 대로 살지도, 살지 않지도 못하는 자신에게 계속 화가 나 있었다. 분류하고, 버리고, 팔고, 잊기로 마음먹는 일련의 정리 수순이 내게는 그 화를 표현하는 방식이자 정말 정리하고 싶은 걸 숨기는 방어의 몸짓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분명했던 게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졌다. 나 자신을 많이 속인 일일수록 그랬다. 단념과 관련된 일일수록.


(-) 가지고 있던 책의 3분의 2는 버렸고, 어떤 이유로 도저히 그럴 수 없는 것들만 차곡차곡 상자에 담았다. 책 한 권 구입도 부담이 되던 시절에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내게 선물하고는 도로 빌려가곤 했던 친구들의 메모가 남은 책들이 섞여 있었다. 영어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 펑펑 울고 있는 나에게 “당신이 표현하는 것보다 깊고 넓은 세계가 당신 안에 있다는 걸 안다”라고 했던 지도교수의 논문과 저작도 넣었다. (-)






연필의 나무가 연필을 구성할 때는 심을 단단하게 고정하고 외부 충격으로부터 심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해요. 하지만 연필에서 깎여나갈 때 나무는 칼날과 결을 맞춰 부드럽게 움직이고 저항이 덜해야 합니다. 언뜻 모순처럼 느껴지는 이 이상적 조건을 한 나무에 구현하기 위한 노력이 몇 세기에 걸쳐 이어졌지요. 그들 덕분에 나는 강하면서 결이 고운 또는, 단단하게 사라지는 무언가가 세상에 있다는 걸 압니다. 늙음과 사라짐이 쇠약함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당신의 손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종의 97% 이상이 이미 사라지고 없어요. 인간이라고 영원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런 이야기를 듣고 쓰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새벽이고, 혼자일 때, 영원해야 할 이유가 없는 인간은 홀가분하고, 깜빡하거나 놓친 일에 대한 죄책감도 어렵지 않게 지운다. 1분에 세계를 이루는 인간 존재 중 100여 명이 죽는다고, 한 시간이면 6,000여 명이, 그럼 하루면… 이런 생각들은 죽음을 이해하는 데 물론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죽음은 “아침이 행복해야 하루가 행복해요” 하는 사람과 “새벽 3시에 행복해야 나를 사랑하기 수월하다”라고 방금 쓴 사람이 어디쯤에서 만날 수 있을까를 생각했을 때 퍼지는 쓸쓸함 옆에 있다. 영원해야 할 이유가 없는 누구도 출생률로 와서 사망률 숫자로 사라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이어서 한쪽이 사라지면 ‘과 사람’이 남는다. ‘과’는 관계다. 그중에서도 사별은 만나지 못하면서 계속 헤어지지도 못하는 이별이고, 만나지 못한 채 계속계속 재회하는 일이라서 우리는 죽은 사람의 무엇으로 계속 살아간다. 겹겹 아픈 이름으로. 아파야 기억을 하니까. 기억해야 새벽 3시를 좋아할 수 있으니까.


삶에 그리 애착이 없던 나도 투병 중에는 새벽에 자꾸 잠이 깼다. 잠들 때는 ‘이렇게 끝나도 괜찮겠다’ 하는 생각을 붙잡았고, 30분 만에 잠이 깰 때는 “아, 아직!” 하는 탄성을 앞세웠다. 그렇게 잠이 깨면 종말 이후 혼자 세상에 남은 느낌이란 게 그리 먼 감각이 아니었다. 보통 새벽 3시. 간혹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긴 꼬리로 이어지는 날이면 잠들기가 가장 위험한 일 같았다. 내가 잠들면 누가 나를 보호하지? 불면은 그런 질문과 함께 오곤 했다.


혼자이고, 공기의 흐름이 들릴 정도로 고요하며, 낮에 붙잡고 있던 세상과의 연약한 연결점이 사라진 새벽, 잠드는 게 제일 무서운 일이 되면 나는 거실에 난 작은 창 너머로 언뜻 푸른빛이 돌기 전까지 창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몸이 힘들면 창이 보이는 곳에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 아픈 사람에는 창이 신전이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온통 기도다. (-)




“엄마, 죽은 사람 유골로 다이아몬드를 만들어 주는 장례 서비스가 있대요.”


“엄마 죽으면 만들어 너 가져. 비상금으로 갖고 있다가 힘들면 팔아 쓰고.”


팔 수 있는 다이아몬드가 아니라고 굳이 말하진 않았다. 알았다고 했다. 엄마가 물었다.


“혹시 통뼈면 다이아몬드를 더 많이 만들 수 있고 그런 걸까? 알아보고 알려줘. 엄마 운동 열심히 할게.”


언젠가부터 엄마가 뭘 ‘열심히’ 한다고 하면 나는 눈물이 났는데, 다이아몬드 많이 만들어주려고 운동 열심히 한다는 말에는 웃음이 났다.




(-) 아픈 몸은 자주 멈췄다. 막막하다가도, 기도하다가도, 신나서 유서를 쓰다가도. 대신 시간이 흘렀다. 시간 속에서 천천히 회복되었다가 다시 나빠지기를 반복하던 몸은 그 반복을 기록하는 데에만 연필을 썼다. 반복은 규칙을 만들고 규칙은 중요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감각, 최소한을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을 유지하려면 규칙을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아파서 줄곧 아무것도 못 하는 상태보다 투병과 삶이 비균질적으로 섞여 어떤 예상, 각오, 낙관, 두려움의 주기가 제멋대로인 상태가 몇 배 더 힘들었다. 규칙적인 통증이 불규칙하고 비균질적인 평화보다 나았다. 둘 중 선택하라면 통증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어둠을 사랑하도록 훈련되는 걸까.




투병기와 회복기를 명확하게 가르는 시점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 그런 게 있기나 할까. 나는 여전히 잘 모른다. 투병한다는 건 회복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믿어야 겨우 지나가는 시간이 있긴 했다. 그런 시간들을 오래 지났다. 나는 이제 전혀 아프지 않은 상태나 조금도 불편하지 않고 말씀한 상태가 어떤 건지 기억하지 못한다. 투병이자 회복이었던, 다른 피와 몸의 시간을 통과하며 병이 내게 남긴 건 어딘가 조금쯤은 항상 불편한 채로 살다가 연필이 되겠다는 꿈. 꿈이 이래도 되는 건가, 하면서 나는 다이아몬드와 흑연과 같은 탄소로 이루어진 숯을 떠올렸다. 꿈보다 쉼 같은 느낌으로. 마르셀 그리올의 『물의 신』을 읽다가 연하게 스며들던 그 느낌처럼.


‘연필을 아낀다’를 연필 쓰는 사람의 언어로 번역하면 ‘연필을 즐겁게 자주 쓴다’이다.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몽당연필이 되기까지 이 세상에서의 소멸을 돕는 방식으로의 아낌이다. 연필들은 천천히 사라진다. 그들을 아끼는 사람들의 손에서. 『물의 신』 속 도곤족들도 그 아낌의 방식을 잘 알았다. 마르셀 그리올의 딸, 인류학자 즈느비에브 칼람 그리올은 마르셀 그리올이 죽었을 때 이 인류학자의 연구와 글로 세상에 알려진 도곤족이 보여준 정중한 인사를 서문에 남겼다. 그들의 전통 장례 의식에는 지상에서의 노동이 끝났음을 의미하며 고인이 쓰던 괭이를 부러뜨리는 순서가 마지막에 있었다. 그들을 이해했던 한 인류학자에게 이 원시 부족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아름다운 소멸을 선언했다. 괭이를 대신해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마르셀 그리올의 손에서 떠나지 않던 노동의 도구이자 생의 도구를 부러뜨린 것이다. 그의 연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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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의 역사 - 침묵과 고립에 맞서 빼앗긴 몸을 되찾는 투쟁의 연대기
킴 닐슨 지음, 김승섭 옮김 / 동아시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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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던 책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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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자의 내면 심리 들여다보기 - 중독의 늪, 충동과 유혹의 심리
아놀드 루드비히 지음, 김원.민은주 옮김 / 소울메이트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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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코올중독은 치료에 실패했을 때 환자 개인을 탓하는 특이한 병이다. 이는 알코올중독뿐 아니라 모든 중독 치료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치료를 받던 중독자가 다시 술을 마시면, 치료 팀은 치료 자체의 한계보다는 그 사람이 단주하려는 의지나 도움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 입원치료중인 알코올중독자가 치료에 비협조적이거나 술을 끊으려는 의지가 없을 때, 또는 이 때문에 다른 환자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될 때 많은 병원이 즉시 환자에게 퇴원 조처를 내린다. 병원 안에서 술을 마시거나 취한 채 발견될 때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앓고 있는 병은 음주를 통제하지 못하는 것인데, 그런 증상이 있다는 이유로 치료 대상에서 제외하는 셈이다. 알코올중독자는 치료를 받으려면 반드시 증상이 없는 상태, 즉 단주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놓인다.


• 알코올중독이라는 질병의 핵심은 술을 조절해서 마시는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치료 프로그램의 대부분은 음주를 중단하고 나서 다시는 ‘첫 잔’을 마시지 않는 일에 집중한다. 음주를 조절할 힘을 되찾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 알코올중독자는 병에 걸려 ‘아픈 환자’다. 적어도 병원에 입원하거나 치료가 필요하다고 논할 때는 환자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이들이 술을 마시고 아픈 상태에서 저지른 잘못이나 범죄에 대해 사회는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다.


• 알코올중독의 특징적인 증상은 술에 대한 갈망이다. 갈망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나타나고 또 사라진다. 예를 들면 저녁 시간이나 주말에는 술 생각이 간절해지지만 일할 때나 교회에 있을 때는 갈망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환자의 증상이 심리나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중독 질환은 내과 질환과는 다르다.


• 중독 회복에 가장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동료 중독자를 꼽는 사람이 많다. 몸에 다른 병만 없다면, 중독을 앓은 적이 없는 의료전문가보다는 직접 중독을 경험한 사람이 더 큰 힘이 될 거라고 믿는다. 알코올중독은 직접 그 병을 앓다가 회복한 사람이 의사보다 그 병에 관해 더 잘 안다고 여겨지는 유일한 질병이다.


• 알코올중독은 그 병에 걸렸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규정되어버리는 유일한 병이다. ‘알코올중독자’라는 호칭을 지울 수 없는 낙인이나 도덕적 비난으로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동병상련인 사람들 모임에 회원 가입 자격을 부여하는 명예 훈장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든 알코올중독은 진단받는 순간 그 사람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암이나 고혈압, 혹은 다른 내과 질병과는 다르다. 일단 진단을 받으면 개개인의 특성은 무시된 채, 모두 똑같은 알코올중독자로 취급된다. 설령 술을 끊더라도 ‘중독자’라는 인상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도덕적 관점에서 알코올중독은 부도덕함의 소치이고, 그릇된 심성이나 악덕이 겉으로 드러난 결과다. 문제의 근원은 자기탐닉·향락주의·무기력·무책임·게으름·부도덕함에 있다. 술을 마시는 것은 나약하다는 증거이므로 완치하려면 강한 의지력이 필요하다. 중독자가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애초에 일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중독을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는 도덕적 관점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알코올중독을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만취된 상태로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면 유치장이나 감옥에 가두고 벌을 준다. 대다수 사회 구성원뿐만 아니라 의사를 포함한 의료 전문가들도 알코올중독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본다. 중독자는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것이다.


알코올중독자도 이런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아 폭음 후 술에서 깨면 자신을 비난하고 책망하며 혐오하고 절망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말 술을 끊겠다고 다짐한다. 실제로 많은 중독자가 개인의 책임감과 의지력을 강조하는 도덕적 관점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단주를 결심한다. 한심한 자신의 모습을 더는 참을 수 없어서 마침내 술을 멀리하기로 결심하고 ‘단주 서약’을 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알코올중독은 몸에 생긴 ‘병’이다. 이 병은 생화학적 이상이나 알레르기, 영양 결핍, 신체적 취약성, 유전적 소인으로 발생한다. 따라서 중독자가 벌인 어떤 행동을 이들이 ‘선택’했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몸에 발생한 생리적 압박으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보아야 한다. 알코올중독자는 병에 걸린 ‘아픈’ 사람이므로 그 병 때문에 저지른 행동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심리적인 측면에서 알코올중독은 도덕적으로 실패한 것도 아니고 몸에 생긴 질병도 아니다. 이들의 행동을 비행이나 악행으로도 볼 수 없다. 고의로 선택한 행동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는 다양하다. 과거에 겪은 일 때문일 수도 있고, 그렇게 학습되거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특정 상황에서 술을 마시도록 길들여진 결과일 수도 있다. 부정적인 자아상이나 잠재적인 긴장감, 우울감이 원인일 수도 있다. 심지어 갈망을 조절할 능력이 없으니 술을 마실 수밖에 없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술을 마시기도 한다.


문제는 몸이 아니라 마음에 있으므로 알코올중독은 질병이 아니라고 본다. 문제 해결의 답은 개인의 사고방식과 감정, 행동에 있다. 그 외에는 관심을 둘 이유가 없다. 따라서 치료법은 알코올중독자가 술을 마시는 계기와 감정상태, 행동패턴에 대한 통찰력을 갖추는 일에 중점을 둔다. 알코올중독자는 치료를 통해 술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단서를 찾아내서 피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술을 마시도록 충동질하는 잘못된 생각과 불합리한 사고방식을 바로잡고 자신감을 되찾아야 한다. 음주를 대체할, 다른 효과적인 문제 해결 방식을 익혀야 한다. 이들이 새롭게 깨우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치료의 목표다.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알코올중독은 환경이 개인에게 끼치는 악영향 때문에 생긴다. 알코올중독자는 주변 사람이나 살아온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예컨대 술을 구할 방법이 전혀 없거나 술을 마시면 처벌받고, 술값이 너무 비싸 마실 엄두가 나지 않는 사회에서 자란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이런 사람이라면 알코올중독자가 되기 힘들다. 그러므로 알코올중독자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속한 넓은 의미의 사회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중독자의 배우자와 가족, 중독자가 속한 지역사회와 사회 전체의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음주를 억제하기 위한 사회정책에는 주류세나 주류 판매 제한 법률, 공공장소에서 만취한 사람에 대한 구금이나 벌금 부과 등이 있다. 범위를 더욱 좁혀 치료의 측면에서 보면 주 관심대상은 가족 간의 역학관계다. 사회적 관점에서 알코올중독은 중독자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함께 사는 가족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지닌 병적인 정서가 한 사람의 알코올중독으로 분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알코올중독자는 가족 전체의 희생양인 셈이다.



영적 관점에서 알코올중독은 ‘위대한 힘’과 같은 어떤 신성한 존재에게서 멀어져서 생긴다고 본다. 알코올중독자가 저지르는 죄는 교만이다. 술을 마시는 것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인데도 이들은 자신에게 통제력이 있다는 자만에 빠져 있다. 그리고 이런 자만심 때문에 오히려 유혹에 취약한 상태가 된다.


이들이 잘못된 자만심을 내려놓고 외부에 필요한 도움과 지도를 요청할 마음가짐을 가지려면,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고 술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산산조각내야 한다. 이때가 중독자에게는 계시의 순간이 될 수 있다. 이 순간에 중독자는 새로운 무언가를 깨닫고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재편되면서 자신보다 위대한 힘과 교감을 나눌 준비를 마친다. 여기서 말하는 위대한 힘이란 개인적으로 믿는 신일 수도 있지만, 자연법칙이나 신앙 공동체일 수도 있다. 같은 고통을 겪는 다른 중독자와의 동료애가 위대한 힘이 될 수도 있다. 위대한 힘을 무엇으로 여기든 간에 그 위대한 힘과 자신 사이의 관계 단절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알코올중독의 치유를 기대할 수 없다. 이는 A.A. 같은 단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전제이기도 하다.



• 알코올중독이 질병이라고 해서 중독자 자신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 중독자는 일단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중간에 멈출 수 없다. 하지만 첫 잔을 마실지 말지에 대한 결정권은 가지고 있다.


• 자기탐닉이라는 심리적 특성 때문에 많은 사람이 중독자가 된다. 하지만 이들은 애초에 유전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과음할 성향을 더 많이 지니고 태어났을 수도 있다.


• 알코올중독은 중독자 자신의 책임이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역할을 떠안기는 가족관계 역시 문제일 수 있다.


• 알코올중독자가 절박한 심정으로 도움을 청했다고 해서 치료받을 때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기만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 알코올중독자가 술을 끊지 않는다고 해서 낫고 싶은 마음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 많은 사람이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만으로 회복에 이르지만, 영적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도 있다.



어떤 의도나 행동은 내면에 죄책감이나 불안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럴 때 우리의 마음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의도와 행동에 그럴듯한 이유를 붙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지금의 선택이 최선이라고 스스로 설명하고 안심하는 것이다. 이런 합리화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잭 런던의 자전적 소설 『존 발리콘John Barleycorn』의 등장인물인 존 발리콘의 마음속에도 같은 논리가 작동한다.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해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를 내세우고 편리한 핑계를 대면서 보고 싶은 현실만 골라서 보는 식이다. 잭 런던은 이 부분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존 발리콘은 술을 마시는 이유에 대해 ‘그냥 마시고 싶어서’라고 담백하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한 잔 마실 만해서.’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운다.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한 잔 정도의 보상은 받을 자격이 있으니 마신다고 말한다. 때에 따라 ‘몸을 좀 녹이기 위해서’나 ‘해장이 필요해서’ 위스키를 조금 마시기도 하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마무리하는 의미로 한 잔, 그리고 이왕에 마실 거라면 한 잔보다는 ‘2잔 걸치고’ 취해서 집에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한다. 한 잔을 마시고 들어가든 2잔을 마시고 들어가든 어차피 아내는 바가지를 긁을 테니까. (-)



결국 중독자는 자신이 다니는 길에 계속 바나나 껍질을 던져두고 있는 셈이다. 그러고는 어떻게든 자신이 그 길을 걷게 만들어 ‘실수로’ 바나나 껍질을 밟고 넘어지게 한다. 중독자의 두뇌는 다니는 길목마다 지뢰를 설치하고 무심결에 빠질 함정을 파놓는다. 불운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내가 만났던 알코올중독자 중에는 합리적이고 지적인 사람도 많았다. 그런 사람조차 이런 일이 진행되는 내내 스스로 위험을 깨닫지 못했다고 말한다. 놀랍게도 그들은 뻔해 보이는 합리화, 자기 편한 대로의 현실 왜곡, 우연과 실수로 위장한 자기기만을 그대로 믿고 있었다. (-)



알코올중독자는 술을 끊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고통받지는 않는다. 그런 생각은 이미 수천 번도 더 해보았다. 알코올중독자를 가장 심란하게 만드는 건 사는 동안 다시는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이는 알코올중독자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다.


이들은 당장 술을 끊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문제없이 마실 수 있다고 자신을 안심시킨다. 술 때문에 엉망진창이 된 삶이 다시 제자리를 찾으면, 뒤죽박죽 어지러운 머릿속이 정리되면, 술판을 벌이던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정도로 현명해지면, 술에 대한 갈망이 완전히 사라지면, 의학의 발달로 알코올중독에 대한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되면 등등. 이런 희망 때문에 중독자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가볍게 한 잔’하고 싶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음주 방식을 바꾸면 술을 조절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들도 많다. 이전에 마시던 독한 술을 도수가 낮은 술로 바꾸거나, 물과 섞어 희석해서 마시거나, 기준을 정해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마시거나, 급하게 벌컥벌컥 마시던 술을 조금씩 천천히 마시는 식으로 말이다. 이들은 술을 마셔도 되는 수천 가지 이유를 생각해낸다. ‘다음에는 다를 거야.’라는 믿음 때문이다. 과거의 뼈아픈 실수에서 얻은 교훈으로 자신이 바뀌었고, 그래서 이제는 충분히 술을 조절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고, 중독자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이런 무의식적인 기대가 술에 대한 욕망의 불씨를 살려놓는다. 이것이 중독자가 오랫동안 취약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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