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연필 - 연필이 연필이기를 그칠 때 아무튼 시리즈 34
김지승 지음 / 제철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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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연필 김지승 북토크 중에서

10. 30. 말과활아카데미 3층


연필 수집하시는 분들 중에서 수집에 의미를 두시는 분도 있고 실사용자, 실제 사용이 중요하신 분들이 있는 거 같아요. 저는 양쪽에 다 걸치고 있어서. 저는 무조건 아무리 좋고 귀해도 일단 써야 돼요. 깎아야 돼요. 근데 그러면 새 연필로 되돌릴 수 없으니까 특별한 날을 골라요. 새 글을 쓴다거나.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까? 아니면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 편지 쓸 때. 주변에 책 쓰시는 분들이 많으니까. 최근에는 한지혜 작가님의 소설집이 나왔는데 거기 나오는 어머니의 출생연도 정도 되는 연필을 골라서 그걸 깎아서 줄을 긋는 용도로 쓰고 있어요. 


제가 갖고 있는 것 중에 좀 오래된 게 이게 1890년대 연필이에요. 훨씬 예쁘고. 이걸 누구에게 선물하면 1890년대 나무를 선물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갖고 있는 물건 중에 1890년대만큼 오래된 것이 없을 거잖아요. 그냥 연필이다, 해서 주면 그런데 이게 1890년대 나무고, 흑연이다. 그리고 흑연은 점토를 섞어서 만드는데 흙도 여기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그냥 연필이라는 사물보다는 과거로부터 오는 뭔가 같아서 빈티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거 같아요.


저는 중고신인 같은 작가거든요. 지금까지 책을 안 쓴 게 아닌데 제가 그전에 쓴 책들은 주어의 자리에 단체나 여성 노인의 이름을 놓고 썼어요. 저는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책은 주어의 자리에 ‘나는’을 박아놓고 쓰니까, 나를 드러낸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글을 쓰지? 제 주변 여성작가들도 창작에 대한 억압이나 공포가 한층 더 큰데, 잠이 안 오더라고요. 글을 써놓고 꿈에 그 글에 대해 비판받는 꿈. 내가 뭐라고. 내가 이런 글을 쓰면 내가 무슨 대단한 삶을 사는 게 아닌데 나까지 책을 내나. 문제가 뭐였냐면 매주 강의를 하면서 여러분의 글을 쓰십시오, 그러는 거예요. 매주 여러분을 앉혀놓고 여러분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염치가 없는 거예요, 제가. 그래서 집에 돌아가는 마을버스에서 머리를 박으면서 니가 그럴 일이 아니지. (웃음) 그 수업이 아니었으면 못 썼을 거예요. 어떻게 하면 이걸 안 쓸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런데 김혼비 작가가 언니, 나는 이제 남성이 쓴 연필 이야기를 보고 싶지 않아, 라고 해서. 자기는 꼭 내가 썼으면 좋겠다고, 주변에서 많이들 그런 이야기를 해서 등 떠밀리듯 앉았는데 쓰다보니까 그런 거 같아요. ‘나는’이 무서우니까 자꾸 타자를 불러오게 되더라고요. 내 안의 타자를 끌어오든, 기억 속의 타자를 끌어오든 해보자 했는데 곰곰이 생각하니 있더라고요. 그분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제 이야기를 슬쩍. 그런 글을 쓰려고 엄청 고민을 하고 노력했던 거 같아요. 잘못 생각했던 건 내 얘기보다 그분들을 등장시키는 게 더 어렵더라고요. 살아 있는 사람은 쓰기가 어렵고, 그래서 죽은 사람 아니면 아주 멀리 있는 사람에게. 실비아 할머니는 한글을 배우고 계시는데, 나오는 글의 제목을 찍어서 보내드렸더니 너무 좋아하시면서 한글로 쓴 좋아요를 제게 보내주셨어요.


이 책을 쓸 때 제가 몸이 많이 아팠어요. 생에 대한 감각이 마치 깜깜한 밤에 안 보이는 계단을 내려가다보면 수직의 감각으로 내려가다가 어느 순간 허방을 딛는 듯한 때가 찾아오고 그러다 땅에 닿으면 수평의 감각으로 살아가는데... 그 수평의 감각. 내가 내 땅에 발을 붙이고 내 감각을 가지고 걸어가야 되는 시기가 왔구나, 늙음이나 노화, 그런 것으로 내 몸에서 받아들이기도 하는 순간 같아요. 죽음에 대해서도 달라졌고, 이 연필이라는 게 아이러니하거든요. 좋아해요. 근데 쓰면 없어지잖아요. 소멸의 순간을 같이하는 거거든요. 사람의 죽음하고도 비슷하지 않나. 그런데 마지막에 몽당이가 되게 귀여워요. 최선을 다해서 깍지 끼워서 쓰는데. 그게 예의인 거 같아서. 최선을 다해서 쓰는 거. 사용하는 거.


(-) 주로 여성이었던 비서는 연필을 들고 무언가를 ‘임시로’, ‘예비로’ 쓴다. 마지막 결정, 명령, 실행은 대부분 남성 상사의 결재로 이루어지며 공공의 의미 체계를 획득하는 결재란의 그 표식은 연필이 아닌 볼펜이나 만년필로 남겨졌다. 그곳은 연필의 자리가 아니다. 연필의 자리가 아니면 여성인 나의 자리도 아니기 쉬웠다. (-) 공식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문서의 효력과 그것을 발생시키는 서명으로부터 여성은 지속적으로 소외되어 왔다.






사람이 잘 부서지는 존재이고, 의아할 만큼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은 ‘안다’고 말하기보다 ‘모를 수가 없다’고 해야 한다. 삶이 환기시키는 건 그런 거다. 우리는 그냥 알기보다 대체로 모를 수가 없는 경험으로 자란다. 상담가가 내려놓은 연필 끝이 뭉툭해져 있었다. 흑연은 잘 부서졌다. 사람이 그런 것처럼 흑연도 강하지 않았다. (-)




다이아몬드와 흑연 구성 성분의 일치와 구조적 차이를 소비하는 한국적 방식은(-) 노력하는 사람과 노력하지 않는 사람의 예시로 곧잘 쓰였다. 흑연처럼 헐렁하고 약하고 잘 부서지는 이들은 패배자가, 고온과 고압을 견딜 만큼 단단한 다이아몬드는 승자가 되었다. (-) 모두가 동일한 욕망을 즉, 다이아몬드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할 거라고 전제한 글들이 많았다. 그중 ‘작은 자극에도 무너지는 흑연 같은 삶’을 나무라는 표현은 당황스럽게 문학적이었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이기도 했다. 다른 것들과 포개지고 더해지고 섞이는 삶을 상상하는 건 무너지고 부서져본 사람들이다. 홀로 단단할 수 없어서 ‘약한 인간 1’과 ‘약한 인간 2’가 손잡고 ‘좀 덜 약한 인간들’로 살아가는 먹먹함에 대해 아는 것도 그들이다. 몇 세기에 걸쳐 흑연에 점토(주로 고령도) 등을 섞어 강도를 높이고 잘 부서지지 않는 연필심을 만드는 데 투자한 것도 흑연의 약함을 충분히 이해한 사람들이었다. (-)




사람은 그렇게 강하지 않아요. 그 말이 여전히 내 옆에 있다. 그럼 나는 잘 무너지고 부서지는 사람들 곁에 있기로 한다. 강함과 약함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그걸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지, 그 각각의 의미와 위계는 누가 정하는 것인지를 자문하면서. 사람이 어떤 순간에 무너질 수 있으며 그 무너짐이 어떤 죄책감을 만드는지에 예민할 수 있는 건 내가 잘 무너지고 부서지는 사람이어서다. 모를 수가 없다. 모른 척은 해도. 연필을 쓰는 사람은 부서진 흑연 가루가 종이의 섬유질에 남는 것이 연필 필기의 원리임을 매 순간 경험한다. 종이 위에 남는 건 바로 그 부서짐의 노력이니까.






(-) 시선이 마주치는 것들마다 나에게 같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다 끝났어. 나는 원하는 대로 살지도, 살지 않지도 못하는 자신에게 계속 화가 나 있었다. 분류하고, 버리고, 팔고, 잊기로 마음먹는 일련의 정리 수순이 내게는 그 화를 표현하는 방식이자 정말 정리하고 싶은 걸 숨기는 방어의 몸짓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분명했던 게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졌다. 나 자신을 많이 속인 일일수록 그랬다. 단념과 관련된 일일수록.


(-) 가지고 있던 책의 3분의 2는 버렸고, 어떤 이유로 도저히 그럴 수 없는 것들만 차곡차곡 상자에 담았다. 책 한 권 구입도 부담이 되던 시절에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내게 선물하고는 도로 빌려가곤 했던 친구들의 메모가 남은 책들이 섞여 있었다. 영어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 펑펑 울고 있는 나에게 “당신이 표현하는 것보다 깊고 넓은 세계가 당신 안에 있다는 걸 안다”라고 했던 지도교수의 논문과 저작도 넣었다. (-)






연필의 나무가 연필을 구성할 때는 심을 단단하게 고정하고 외부 충격으로부터 심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해요. 하지만 연필에서 깎여나갈 때 나무는 칼날과 결을 맞춰 부드럽게 움직이고 저항이 덜해야 합니다. 언뜻 모순처럼 느껴지는 이 이상적 조건을 한 나무에 구현하기 위한 노력이 몇 세기에 걸쳐 이어졌지요. 그들 덕분에 나는 강하면서 결이 고운 또는, 단단하게 사라지는 무언가가 세상에 있다는 걸 압니다. 늙음과 사라짐이 쇠약함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당신의 손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종의 97% 이상이 이미 사라지고 없어요. 인간이라고 영원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런 이야기를 듣고 쓰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새벽이고, 혼자일 때, 영원해야 할 이유가 없는 인간은 홀가분하고, 깜빡하거나 놓친 일에 대한 죄책감도 어렵지 않게 지운다. 1분에 세계를 이루는 인간 존재 중 100여 명이 죽는다고, 한 시간이면 6,000여 명이, 그럼 하루면… 이런 생각들은 죽음을 이해하는 데 물론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죽음은 “아침이 행복해야 하루가 행복해요” 하는 사람과 “새벽 3시에 행복해야 나를 사랑하기 수월하다”라고 방금 쓴 사람이 어디쯤에서 만날 수 있을까를 생각했을 때 퍼지는 쓸쓸함 옆에 있다. 영원해야 할 이유가 없는 누구도 출생률로 와서 사망률 숫자로 사라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이어서 한쪽이 사라지면 ‘과 사람’이 남는다. ‘과’는 관계다. 그중에서도 사별은 만나지 못하면서 계속 헤어지지도 못하는 이별이고, 만나지 못한 채 계속계속 재회하는 일이라서 우리는 죽은 사람의 무엇으로 계속 살아간다. 겹겹 아픈 이름으로. 아파야 기억을 하니까. 기억해야 새벽 3시를 좋아할 수 있으니까.


삶에 그리 애착이 없던 나도 투병 중에는 새벽에 자꾸 잠이 깼다. 잠들 때는 ‘이렇게 끝나도 괜찮겠다’ 하는 생각을 붙잡았고, 30분 만에 잠이 깰 때는 “아, 아직!” 하는 탄성을 앞세웠다. 그렇게 잠이 깨면 종말 이후 혼자 세상에 남은 느낌이란 게 그리 먼 감각이 아니었다. 보통 새벽 3시. 간혹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긴 꼬리로 이어지는 날이면 잠들기가 가장 위험한 일 같았다. 내가 잠들면 누가 나를 보호하지? 불면은 그런 질문과 함께 오곤 했다.


혼자이고, 공기의 흐름이 들릴 정도로 고요하며, 낮에 붙잡고 있던 세상과의 연약한 연결점이 사라진 새벽, 잠드는 게 제일 무서운 일이 되면 나는 거실에 난 작은 창 너머로 언뜻 푸른빛이 돌기 전까지 창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몸이 힘들면 창이 보이는 곳에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 아픈 사람에는 창이 신전이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온통 기도다. (-)




“엄마, 죽은 사람 유골로 다이아몬드를 만들어 주는 장례 서비스가 있대요.”


“엄마 죽으면 만들어 너 가져. 비상금으로 갖고 있다가 힘들면 팔아 쓰고.”


팔 수 있는 다이아몬드가 아니라고 굳이 말하진 않았다. 알았다고 했다. 엄마가 물었다.


“혹시 통뼈면 다이아몬드를 더 많이 만들 수 있고 그런 걸까? 알아보고 알려줘. 엄마 운동 열심히 할게.”


언젠가부터 엄마가 뭘 ‘열심히’ 한다고 하면 나는 눈물이 났는데, 다이아몬드 많이 만들어주려고 운동 열심히 한다는 말에는 웃음이 났다.




(-) 아픈 몸은 자주 멈췄다. 막막하다가도, 기도하다가도, 신나서 유서를 쓰다가도. 대신 시간이 흘렀다. 시간 속에서 천천히 회복되었다가 다시 나빠지기를 반복하던 몸은 그 반복을 기록하는 데에만 연필을 썼다. 반복은 규칙을 만들고 규칙은 중요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감각, 최소한을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을 유지하려면 규칙을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아파서 줄곧 아무것도 못 하는 상태보다 투병과 삶이 비균질적으로 섞여 어떤 예상, 각오, 낙관, 두려움의 주기가 제멋대로인 상태가 몇 배 더 힘들었다. 규칙적인 통증이 불규칙하고 비균질적인 평화보다 나았다. 둘 중 선택하라면 통증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어둠을 사랑하도록 훈련되는 걸까.




투병기와 회복기를 명확하게 가르는 시점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 그런 게 있기나 할까. 나는 여전히 잘 모른다. 투병한다는 건 회복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믿어야 겨우 지나가는 시간이 있긴 했다. 그런 시간들을 오래 지났다. 나는 이제 전혀 아프지 않은 상태나 조금도 불편하지 않고 말씀한 상태가 어떤 건지 기억하지 못한다. 투병이자 회복이었던, 다른 피와 몸의 시간을 통과하며 병이 내게 남긴 건 어딘가 조금쯤은 항상 불편한 채로 살다가 연필이 되겠다는 꿈. 꿈이 이래도 되는 건가, 하면서 나는 다이아몬드와 흑연과 같은 탄소로 이루어진 숯을 떠올렸다. 꿈보다 쉼 같은 느낌으로. 마르셀 그리올의 『물의 신』을 읽다가 연하게 스며들던 그 느낌처럼.


‘연필을 아낀다’를 연필 쓰는 사람의 언어로 번역하면 ‘연필을 즐겁게 자주 쓴다’이다.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몽당연필이 되기까지 이 세상에서의 소멸을 돕는 방식으로의 아낌이다. 연필들은 천천히 사라진다. 그들을 아끼는 사람들의 손에서. 『물의 신』 속 도곤족들도 그 아낌의 방식을 잘 알았다. 마르셀 그리올의 딸, 인류학자 즈느비에브 칼람 그리올은 마르셀 그리올이 죽었을 때 이 인류학자의 연구와 글로 세상에 알려진 도곤족이 보여준 정중한 인사를 서문에 남겼다. 그들의 전통 장례 의식에는 지상에서의 노동이 끝났음을 의미하며 고인이 쓰던 괭이를 부러뜨리는 순서가 마지막에 있었다. 그들을 이해했던 한 인류학자에게 이 원시 부족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아름다운 소멸을 선언했다. 괭이를 대신해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마르셀 그리올의 손에서 떠나지 않던 노동의 도구이자 생의 도구를 부러뜨린 것이다. 그의 연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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