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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
최승자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전 일생토록 어떤 순간을 기다려왔는데요, 그게 그 순간일까요? 그 순간에 몹시 아플까요? 「심장론」 부분
나더러, 안녕하냐고요?/그러엄, 안녕하죠. 「안부」 부분
그것들이 나를 지나치기 전에, 내가 먼저 통과한다./일번 국도에서, 통과할 것으로서의 이 세계,/스쳐 지나가야 할 것으로서의 이 세계를. 「일번 국도」 부분
산다는 것은 결국 싼다는 것인데 「“그릇 똥값”」 부분
최승자의 이 시집을 읽으면 벼락이 내리치거나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은 어떤 순간을 기다려온 나와 그 전조에 무심한 세계를 일별하게 된다. 시인은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고, 우리가 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뉴스를 듣고 기뻐한다. 그 소식을 듣지 않았더라면 세상을 이렇게 창조해놓은 신을 죽여버리고 말았을 테니까. “도대체 이런 스토리를 쓴 작자는 누굴까./죽여버려야지, 나는 그 안의 한 고통스런 배역으로 존재하긴 싫으니까”(「구토」).
시인에게 눈은 오직 길 잃고 헤매려 만든 연기 가득한 스크린이자 허상만을 보려 만든 필름이다. 스크린 안의 무서운 형상에 놀란 눈들은 그 필름을 행복한 필름으로 고치려 애를 쓰다 죽어버린다. “영원한 고쳐 쓰기의 과정, 구제불능의 패러디”(「눈이란 무엇인가」)인 이 세계에서 나는 끊임없이 만지고 싶어하는 손, 맛보고 싶어하는 혀, 냄새 맡고 싶어하는 코, 듣고 싶어하고 보고 싶어하는 귀와 눈, 생각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고서 “먹어도 만족할 줄 모르는/거대한 식귀”이다. 나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허섭스레기들에 목이 말라/쓸어담기만 하는 거대한 동냥 바가지”였으며 ‘그것들의 조립이 나라고 믿었’다(「또다른, 걸인의 노래」).
시인은 “패혈증처럼 숨가쁘게,/어질어질” 진달래가 피어오르는 바깥의 봄을 견디지 못하고 쪽문을 닫아버린다. 시인은 자신이 ‘닫혀버린 집안 한구석에서 무게 없이 깊이깊이 가라앉는 인조 장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용서한다(「아득한 봄날」). “네 몸, 내 몸을/나의 눈, 나의 귀, 나의 코, 나의 입을.” 그리고 썼던, 쓸 모든 시를(「나는 용서한다」). 시인은 이제껏 먹여 키워왔던 슬픔들, ‘사실이었고 진실들이었던 그 대책 없는 픽션들’을 밟아버리기로 한다. 한때는 그것들이 나를 뜯어먹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야말로 그것들을 얼마나 정성스레 먹여 키웠는지 알고 있다고 고백하면서(「더스트 인 더 윈드, 캔자스」).
이제 시인은 ‘긴 여행의 한 출발점에서’, 자신에게 이것이 너의 삶이라고 속삭이며 삶의 무대를 꾸며주고 삶의 줄거리를 하염없이 이어온(「?」) “태초의 빈 공책” 위에 아무것도 더이상 쓰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나는 더이상 쓰지 않을 것이다, 라고”도 그 위에 더는 쓰지 않는다(「빈 공책」). 그제야 시인은 자신이 디딘 땅, 그 흙 속에서 말없이 천 년, 만 년 기다린 신부를 발견한다. “몸 다 굳어져/흙 인형으로 변했다가/이제 마침내 흙으로 부서져버릴” 그토록 오래 기다려온 납빛 절망의 눈을(「연인들 1」).
어느 날 아침, 방에서 눈을 떴을 때 시인은 움직임이 없는 돈벌레를 발견한다. 볼펜으로 밀어보아도 딱 그만큼만 밀려나는 작은 벌레. 섬세한 가는 다리들을 수없이 지닌 그것은 명상에 잠긴 듯 고요하다. 그러다 잠시 후 돈벌레는 얇은 껍질을 벗고 더 짙은 고동색의 벌레가 되어 사라진다. 꼬물거리며 사라지는 작은 돈벌레를 보며 느꼈던 감정이 슬픔인지, 기쁨인지 시인은 판정을 내릴 수 없다. 그러다 시인이 떠올린 것은 타로 12번 카드, hanged man이다. 빚을 갚지 못한 벌로 교수대에 한쪽 발이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려 죽음을 당한 남자. 그 카드를 거꾸로 놓고 보면 남자의 얼굴은 평안하다. 시인은 묻는다. “죽음보다는 속세의 모든 빚과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쪽이 훨씬 덜 괴롭다는 뜻일까.” 벌레의 허물을 버리려 볼펜에 꿰어 들고 마당으로 나간 시인은 마당 한 끝에서 거미집을 발견한다. 분명 어제 부숴버렸던 것인데 같은 자리에 다른 거미가 커다랗게 집을 지어놓았다. 몇 개의 이슬방울들을 매단 둥근 거미집은 빛 속에서 “제가 전 우주인 것마냥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돈벌레 혹은 hanged 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