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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공항 ㅣ 타이피스트 시인선 13
이원석 지음 / 타이피스트 / 2026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 잠기는 것은 내가 순찰 중이기 때문이다
순찰은 삶을 되감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흐르는 시간을 두 다리로 천천히
되밟는 것이다
설정에 집착하는 것은 이 섬 전체가 하나의 작은 생각 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다른 자아가 개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물어볼 사람도 도움을 구할 존재도 없고
모든 걸 스스로 설정해야 한다
미처 설정하지 못한 문을 열면 흰 벽이 나오고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다
여기가 삶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
돌아가야 한다 폰트가 깨지기 시작한다
흰 벽을 그대로 두고
문의 이음새가 될 가는 선을 그린다
문을 열고 마주한 흰 벽은 사실
숨겨진 또 다른 통로
손잡이 없는 벽을 누르면
걸쇠가 풀리며 문이 열리게 설계되어 있다
_이원석 시, <순찰 기록> 부분
물에 가라앉는 것이 필요해
손에 쥘 수 있는 마음 같은 것
쇠로 만든 막대 같은 것
두드리면 울리고 손에서 놓으면 가라앉는 것
내려다보면 일렁이는 바다
바닥을 바라고 가라앉기 위해
파도를 버리고 내려가는 위안
_이원석 시, <쇠막대의 규격> 부분
날이 좋은 날 공사를 시작하는 게
이 바닥의 상식이지
하지만 비 오는 날이 어울려
아무것도 없는 돌무더기 위에 터를 잡고
쇠락한 공항을 짓기엔 말이야
교차로를 지나는 차량들처럼 모여든 사람들과
서로 부딪혀 부서진 차들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피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과
그 사람을 응원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일일이 설득해서
돌려보낸다
운전석에서 간신히 나와 소리친다
이제 그만 피를 흘리겠어요
그러니 모두 돌아가 주세요
기념품으로 파편들을 모아 놓았으니
한 조각씩 가지고 떠나 주세요
더 달릴 수 있지 않겠냐고 어깨를 두드려 주는 친구도
눈을 감고 마주 오던 사람도
보조석에 허락 없이 앉으려던 사람도
이젠 고개를 저으며 삼삼오오 떠나간다
빈 병이 쓰러진 탁자에 엎드려 있었지
손님이 모두 떠나고
먼 자리부터 불이 꺼지고
하나 남은 배려마저 캄캄해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일어난다 비가 오는
아무것도 없는 돌무더기 위에 서서
바닥돌 하나를 골라
반듯하게 놓아 본다 쇠락한 공항을 세우기엔
비 오는 날이 제격이지
보시기에 좋았더라 울기에 좋았더라
우는 모습을 감추고 숨어들기에 좋았더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살아남기에 좋았더라
전자식 관찰소가 아니라 부서진 돌과 콘크리트로
정밀한 기록들을 각각의 위치와 방향에 맞추어
세워 놓기에 좋았더라
아무것도 아니기에 좋았다
_이원석 시, <기초공사> 전문
“어려운 때 가게 되어 미안해요.
용기를 잃지 말고 항상 즐겁게 지내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_이원석 시, <우리들의 리스트> 부분
우리가 희망을 믿어도 끝까지는 믿지 말자
_이원석 시, <이고 있는 이야기> 부분
날이 매우 추워
독감이 유행이래
한번 걸리면 일주일을 아프다고 했어
로이는 전자식 자연 관찰소에 박제되어 있으니
가끔 만나 보러 가도 좋을 거야
다행이다 그치
고통도 수치도 망각하고 일그러진 표정 그대로
멈춰 있을 테니
시간을 탈각시킨 고통은 중심을 잘라 얇게 저며 낸
뇌의 단면처럼
아주 잠깐이자 영원일 테니까
플래시처럼 터지는 한순간의 고통이
영원의 기억 속에 끼얹어져
그걸 불러일으킨 존재를 쉼 없이 재생시키고 있을 거야
행복하게
그가 떠나기 전에
내게 메시지를 남겼는데
읽어 보지 않았어
타이레놀과 알코올은 함께 먹으면 안 된대
<Duo showdown>은 잘 읽었어
둘의 이야기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아주 세세한 것까지
그들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무슨 일로 돈을 벌고 어디에 집을 얻었는지
사는 곳 근처에 차이니즈 레스토랑은 있는지
아직도 양장피를 좋아하는지
그 둘의 이야기와 우리의 맹세와
어릴 적 이야기까지 하나하나 생각하다 보면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하나의 세계가 완성되고
그러면 너는 거기 가서 너의 슬픔을 위해 울 수 있을 거야
_이원석 시, <겨울 편지> 부분
시계는 새벽 세 시를 가리킨다. 세계는 고요하다. 시간은 분절되지 않고 이어져 있다. 지금이란 감각은 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내가 붙잡고 싶어 하는 밤의 한가운데 있다. 매 순간 인생에서 가장 아끼고 붙잡고 싶어 했던 시간, 그 시간 속에서 가장 순정한 나로 존재했던 순간이 지금이다. 이런 밤은 매일 주어지지만 매번 잡을 수는 없고 내가 무언가에 사로잡히는 순간 간신히 붙잡을 수 있는 패닝 접시 위의 결정으로 존재한다. 그 결정을 내 운명의 접시 위에 남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의 모래를 흘려보내야 했는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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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었던 나는 너와 <다락방의 꽃들>을 바꿔 읽고 각자의 학교에서 이란성 쌍둥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문을 잠그고 몇 시간씩 전화 통화를 했다. 밤에는 촛불을 켜고 교회에서 나누어 준 작은 밥상을 껴안고 앉아 사과즙을 짜내어 세필로 비밀 편지를 썼다. 쌍둥이는 떨어져 있어도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대. 다락방에서 빠져나가려면 어른이 되어야 해. 하지만 넌 늘 손발이 가늘고 키가 자라지 않는구나.
사랑은 유실될 수밖에 없다. 그와 함께 너도 유실된다.
세계를 밤과 너, 둘로 나누고 그중 하나에 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잃어버린 것을 찾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가장 있을 법한 곳부터 찾아 나가는 방법과 가장 없을 법한 곳부터 찾는 방식이다. 나는 없을 법한 곳부터 찾는 사람이다. 있으리라 짐작되는 곳은 다른 모든 곳을 찾아본 후, 가장 나중에 찾는다. 왜냐하면 가장 있을 법한 곳부터 찾는다면 찾을 수 없음을 너무 빨리 알게 되기 때문이다. 세계를 밤과 너, 둘로 나누고 밤의 순찰을 시작한다. 모든 밤의 바깥에 너는 있고 나는 내내 밤을 헤맨다.
_이원석 산문, <럼주 상자>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