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철학의 최전선 - 가장 뜨거운 다섯 가지 주제와 그 사유의 지도
나카마사 마사키 지음, 박성관 옮김 / 이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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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혼이 오기 전 날아오르는 부엉이 

이 책은 현대 철학의 "가장 뜨거운 다섯 가지 테마"를 다루고 있다. 정의론, 승인론, 자연주의, 마음 철학, 새로운 실재론. 시작은 존 롤스(1921~2002)이고 끝은 마르쿠스 가브리엘(1980~)이다. 그야말로 '현대 철학'의 '최전선'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녘에 날아오른다"는 말이 있다. 헤겔의 <법철학> 서문에 나오는 유명한 경구로 철학은 이미 이루어진 역사적 현상이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뜻이 분명해진다는 의미다. 철학(지혜)적 판단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일종의 '거리두기'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철학을 알아가는 건 황혼이 오기도 전에 날개를 편 부엉이 같달까. 밤과 달리 굼뜨고 눈도 덜 뜨인 부엉이. 


<현대 철학의 최전선>은 개론서지만 각 장의 테마를 요약정리하거나 사상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 논의의 지점을 짚어 가며 다음 목표를 향해 갈 수 있는 이정표에 가깝다. 철학의 역사만큼 수많은 철학자의 주장과 반론이 쏟아져 나온다. 아마르티아 센, 화이트헤드, 딜타이 등 언급하는 수준으로 등장하는 사상가들의 무게도 만만치 않다. 이에 저자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물줄기를 스스로 헤쳐 가길 요구하며 이 책은 '이것으로 끝!' 하는 입문서가 아님을 미리부터 밝힌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다섯 가지 사상 중에서도 자연주의, 마음 철학, 새로운 실재론은 강 인공지능이라는 화두와 맞물려 가장 '핫'한 주제다. 하나의 영역 안에서도 다양한 논의와 접근을 다루는 실로 끓는 솥단지 같다.




> 한 길 사람의 마음을 알기까지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알기 어려우면 두세 길도 아니고 '한 길' 사람 속을 모른다는 속담이 생겼을까. 한 길은 거의 3미터로 어찌 보면 꽤 깊다. 실상 한 길은커녕 한 치의 사람 속, 앞날도 모르는 게 우리 아닌가. 4장에서는 애매한 말의 용법을 바로잡아 통일 과학적 세계를 세우고자 한 빈 학단부터 자연주의의 다양한 양태를 다룬다. 50페이지도 채 안 되지만 밀도가 상당하다. 


특히 진화론적 관점에서 심-신의 관계와 자유의지를 이야기하는 데니얼 데닛의 논의가 흥미롭다. 자유의지에 관해 데닛은 미래는 현재에서 미리 결정될 수 있지만 우리가 이를 시뮬레이션하기에는 뇌의 정보 처리 장치와 언어를 비롯한 각종 외부 장치의 한계, 그리고 너무나도 복잡한 주변 환경과의 관계 때문에 모두를 시뮬레이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이 양립할 수 있는 이유다. 


5장 마음 철학에서는 마음을 물리적으로 설명하는 다양한 전략과 그 비판을 개괄한다. 마음이 의식을 가진 뇌라고 한다면 인간의 의식(마음)에 '단순히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는 것 이상의 실체가 있는가, 바로 데카르트가 미완의 과제로 남긴 그 의문(168)이 남을 수밖에 없다. 


이 문제에 대한 데닛과 존 설의 논쟁은 이 책의 종장인 새로운 실재론까지 그 영향을 드리운다. 엘런 튜링에 의해 재점화된 강 인공지능 문제는 마음 철학의 핵심이다. 존 설은 의식은 뇌의 기본 작용으로 발생한다는 물리주의적 태도를 견지한다. 하지만 행동주의와 기능주의에 반대하며 강 인공지능을 부정한다. 특히 지향성에서 그러한데 이에 대한 '중국어 방' 사고 실험이 유명하다. 문장에는 대상이나 사태에 대한 우리의 지향성이 담기기 마련이다. 문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문장이 표상하는 타인의 지향성을 이해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AI는 중국어 규칙 프로그램을 '실체화'할 뿐 지각, 이해, 학습 등 인간의 다양한 의식 형태의 근저에 있는 지향성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존 설의 주장이다.


존 설의 '중국어 방'에 대응하여 데닛은 '다원적 초고'-'팬더모니엄'이라는 의식 모델을 제안한다. 다원적 초고란 학교나 직장에서 협업 툴을 사용하여 다수의 참여자가 하나의 원안을 다듬어 가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팬더모니엄은 '진정한 자기'에 반하는 개념으로, 역할이 확정되지 않은 수많은 도깨비(뇌 내 모듈)가 병렬 분산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중국어 방'이 참이면 인간의 뇌 역시 생물학적 조작이 이루어질 뿐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된다.     


데닛은 합리적인 행위체로서 대상이나 시스템의 행동이 예측 가능하다면 지향성이 있다고 본다. 그의 관점으로는 존 설이 주장하는 1인칭 존재론과 결합한 지향성은 무의미하다. 단일한 자기 이야기는 허구이며 그때그때 말하기를 통해 자기는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데릭 파핏의 경우 장기적인 변화라는 퍼스팩티브(197)로 동일성 불변이라는 기존 윤리의 틀을 재고하는 "자기로부터의 해방"까지 제창한다.


의식을 둘러싼 공방에서 또 하나의 축은 퀄리아다. 기본적으로 물리주의에 반대하는 토머스 네이글의 경우 '박쥐의 의식' 사고 실험을 통해 경험의 주관적 성격은 1인칭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 1인칭 관점에서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이 퀄리아라는 한편, 물리주의 측에서는 '메리의 방'을 통해 퀄리아는 불필요한 것, '날 것으로의 감각'이라고 본다. 폴 처칠랜드는 퀄리아라는 어휘는 신경 과학 용어로 대체될 것이라고 한다. 데닛은 지향성 논의에서 처럼 퀄리아는 물리적 자극에 반응하는 '성향 복합체'로 사용자 환상에 불과하다고 정의한다.




> 매트릭스 '네오'와 신실재론

마음 철학, 어렵지만 흥미롭다. 생각의 가지를 뻗다 보니 <AI>, <그녀>, <블레이드 러너>, <아이 로봇>등 몇몇 영화가 떠오른다. 특히 <아이, 로봇>은 오래전에 봐서 기억은 희미하지만 로봇 서니의 대사는 (짧기도 해서) 기억에 남는다. "Can you?" — 형사인 스푸너가 용의자인 로봇 서니를 취조하면서 로봇이 교향곡을 만들고, 빈 캠퍼스를 그림으로 아름답게 수놓을 수 있냐고 묻자 서니가 한 대답이다. 스푸너의 질문은 인간만이 감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술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의도였는데 21세기 현재, 이 책을 읽다 보니 우문현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신실존주의 Neo-Existentialism의 'Neo'가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를 함의하고 시스템에 저항하는 네오의 태도와 매력을 이 사상에 담았다고 한다. 직관적이다. 영화에 빗대어 자신의 사상을 설명하는 게 참신하기도 하고. 이 책의 대미를 장식하는 사상가가 독일의 젊은 철학자 가브리엘이다. 그는 기능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춘 '마음'과, 역사(문화)에 의해 형성된 '정신'을 구별한다. 마음=뇌라는 물리주의적 견해는 자연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라고 정의한다. 마음=정신이라는 신실존주의는 개별 인간들이 실존을 살아가는 자세를 중시한다.


가브리엘의 사상은 신존재론에 기반한다. 신존재론 혹은 사변적 실재론은 칸트 이래 상관주의와 실재를 상대화하려는 포스트모던에 반기를 들고 형이상학적 세계관이 아니라 주체의 의식을 '초월'하는 실재에 대해 사유한다. 이 안에서도 다양한 접근이 존재한다. 퀑탱 메이야수는 실재를 주체로부터 분리하는, 특히 인간의 의식을 배제한 실재 파악을 지향한다. 이를 위해 수학과 자연 과학의 냉철한 논리를 전제한다. 스티븐 샤비로는 메이야수의 견해에 의문을 표하며 화이트헤드에 들뢰즈(대상과의 '만남')와 칸트(미학 논의)를 맞대어 사물들의 생생한 활동을 밝히는 미적 실재론을 시사한다. 


여기에서 좀 더 밀어붙이는 것이 그레이엄 하먼일 것이다. 하먼은 하이데거와 화이트헤드의 이론을 수정하여 '객체 지향 존재론'을 피력한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결정하는 주체로서 인간을 특권화했는데 하먼은 여기서부터 문제를 제기하며 인식 주체 없이 대상 상호 간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는 틀을 제시한다. 사극을 통한 시간(대치), 공간(매혹), 본질(인과), 형상(이론)의 네 가지 패턴이 기본이다. 하먼은 주체가 세계에 어떻게 접근하는지를 기준으로 사유해 온 기존 철학과 확실하게 선을 긋는다. 객체 지향론은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하던 이분법에서 벗어나 미학에서도 새로운 구도를 제시한다. 이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아이, 로봇>에서 스푸너는 인간 감상자와 비인간 작품을 구분 짓는 '인간 예술 인식'을 (로봇을 혐오하는 캐릭터답게) 보여준다.




> 철학책을 읽는 이유

<아이, 로봇>의 원작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 소설이다. 이 작품은 '로봇 3원칙'이라는 개념으로도 유명해서 현실에서 인공지능 개발 윤리를 이야기 할 때 한 번은 언급되곤 한다. 그만큼 강 인공지능은 더 이상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 진행형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을 '인간'을 폐기하려는 시도로 보고 이에 저항해야 한다는 가브리엘의 주장이 여운을 더한다. 


[인간-비인간], [인간-그 밖의 것]의 경계가 꿈틀대고 있다. 언젠간 새로운 선 — 사고의 틀 — 이 그려질 것이고 가브리엘이 말하는 Neo나 <블레이드 러너>, <아이 로봇> 같은 영화는 더 이상 SF가 아니라 사실주의, 어쩌면 다큐멘터리가 될지 모른다. 여기서 철학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 가능성이 극히 낮은 일에도 정색하고 성찰하는 일 말이다(13). 레이 커즈와일의 말처럼 마음과 존재의 문제는 아무리 실험으로 입증한다고 해도 철학적 가정이 없으면 결론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고대 그리스 이래로 형이상학인 철학이 어떤 실천인지 밝히고자 한다. 이 글에서 미처 다루지 않았지만 정의론과 승인론 역시 존재와 자유의지, AI라는 우리 시대의 윤리 문제와 맞물려 있다. 자유, 평등, 연대에 기초한 공론장을 활성화하고 끊임없이 메타 의미장(253)을 다듬어 가는 과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현대 철학은 어쩌면 해가 채 지기 전 날개를 편 부엉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현실이 닥치기 전에 사태를 인식하고 여명을 알리는 갈리아의 수탉인 것도 분명하다. 


철학하면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들 한다. 철학은 우리 삶과 직결돼 있기보다 유리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경제 상식은 알아야 하지만 철학 상식 좀 모른다고 손해 날 것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저자는 철학은 경제학이나 법학 같은 정책학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철학이 탁상공론이니 운운해도 신경 쓰지 말라고 힘주어 말하는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철학하는 자신을 재인식했다고 한다. 


<현대 철학의 최전선>은 좋은 개론서지만 쉽지 않은 책이다. 넓지만 얕지 않은 철학적 사유를 요구한다. 그래도 한낮의 부엉이처럼 더듬더듬 현대 철학의 주요 지점을 좇다 보면 어느새 수탉의 울음도 듣게 될 것이다. "꿋꿋하게 살아가기 위한 지혜"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어려운 철학책을 읽는 이유 아닐까. 




+ 출판사의 지원으로 읽고 주관에 따라 작성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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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만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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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메이르, 뉘신지...?


Johannes Vermeer (1632~1675)

아...! 요하네스 베르메르. 근데 언제부터 "페르메이르"가 표기 규범이 된 거지.


(이참에 알아본) 네덜란드 외래어 표기법

1. 2005년 네덜란드 외래어 표기 용례집 마련

① ‘v’가 어두에 올 경우에는 ‘ㅍ, 프’로 적고, 그 외에는 모두 ‘ㅂ, 브’ 적음. 

② ‘ee’는 ‘에이’로 적음.

③ 위의 표기법에 따라 “Vermeer”는 "페르메이르"로 적음.

표준국어대사전에도 "페르메이르"로 등재되어 있음.


2. 깨달은 점

① 그간 미술 관련 서적을 너무 안 봤구나(인정).

② 페르메이르라고 하니까 바로크보다 데 스테일/데 스틸 de Stijl 계열 느낌이다(베를라헤, 두스부르흐, 페르메이르).

③ 페르메이르라고 해도 네덜란드에선 못 알아들을 것 같은데(의심).



책 내용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너무 늘어놨네. 

<기묘한 미술관>은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그림들의 숨겨진 이야기다. 저자는 상상의 책장을 열고 '기묘한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5개의 관을 구성해서 33개의 작품을 큐레이션 했다. 숨겨진 미스터리라고는 하지만 작품의 유명세에 따라 친숙한 이야기들도 있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또 다른 실타래를 품고 있는 법. 그 줄을 따라가 볼까.



+++



[죽음의 방: 프란시스코 데 고야 Francisco José de Goya]

고야는 미술사는 물론 미학, 철학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작가다. 신고전주의 시대 화가지만 로코코와 낭만주의를 아우르는 그는 최초의 근대 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낭만주의의 선구자이자 근대 미술의 창시자라고 할까. 푸코 역시 근대 미술은 고야로 대표된다고 정의한 바 있다.


고야의 그림을 미술사 어느 한 지점에 콕 점찍을 수 없듯 그의 삶도 종잡을 수 없는 궤적을 그렸다. 궁정 화가로 스페인 독립 전쟁을 거쳐 귀머거리 집에서 '검은 그림 연작'을 그리기까지. 반항아이자 출세주의자로, 변절자이자 계몽주의자로 여러 점을 오갔다. 



- 1808년 5월 3일이 탄생하기까지 -

'시간의 할아버지' 앞으로 늙은 두 여인이 있다. 모두 최고급 옷과 장신구로 치장한 귀부인이다.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거울을 들고 있다. 'Quetal'이라고 쓰여 있는데 '어떻게 지내냐'는 뜻이다. <노파들 혹은 시간>/<시간과 노파들>은 세월의 덧없음, 아름다움의 허망함을 풍자한다. 



<Old Women or Time> or <Time and the Old Women> France, Lille, Palais des Beaux-Arts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스페인 명문 귀족이자 고야의 후원자였던 오수나 공작부인이라는 설이 있다. 흰 옷의 여인은 마리아 루이사 왕비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다이아몬드 화살촉 머리 장식이 왕비가 즐겨 착용하는 액세서리였기 때문이다. 고야의 다른 왕실 작품을 볼 때 — <카를로스 4세 가족의 초상>도 그렇고 — 확실히 마리아 루이사 왕비와 닮았다. 그림의 연대는 다소 분분하지만 1810년대다. 카를로스 4세 일가가 망명길에 오른 이후다.


가족의 초상에서 당당히 중앙을 차지한 왕비는 높은 신분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좋지 않은 쪽으로. 한데 카를로스 4세는 사냥으로 밖으로만 돌고 왕비는 급기야 마누엘 델 고도이라는 젊은 정부와 국정을 농단하기에 이른다. 국민들의 분노는 높아가고 나라는 엉망진창이 되고. 가족 초상화의 두 아이가 왕비와 고도이의 자식이라는 소문도 있었으니 그림을 그리던 고야의 표정이 저럴 만도 하다. 


결국 스페인 독립전쟁(반도 전쟁) 와중인 1808년 카를로스 4세의 아들 페르난도가 쿠데타로 즉위한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페르난도 7세를 폐위하고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의 왕 호세 1세로 세운다. 주권을 빼앗긴 민중은 분노하고 나폴레옹 군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다. 1808년 5월 2일과 5월 3일의 사건이다. 


왕비의 정부 고도이도 망명 동지였다. 그리고 고도이는 1819년 왕과 왕비가 로마에서 죽을 때까지 함께한다. 별난 의리다. 


고야는 호세 1세의 초상화를 그려 1811년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웰링턴 공작이 마드리드에 입성하자 호세 1세의 얼굴을 웰링턴으로 고쳐 그렸다. 나폴레옹이 물러나고 폐르난도 7세가 복위하자 1814년 스페인 독립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을 그린다. 고야 최고의 걸작이자 최초의 근대적인 그림은 이렇게 탄생했다. 


저자는 고야가 입체적인 인물이라고 했다. 그는 스페인 왕가, 종교재판소, 나폴레옹, 영국군 모두를 비판하고 또 협력했다. 어느 쪽이든 처벌은 없었다. 기묘한 일이다. 




[지식의 방: 오노레 도미에 Honoré Daumier] 

고야의 걸작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의 배경이 된 1808년 오노레 도미에가 태어났다. 도미에 역시 그림으로 시대를 풍자했다. 고야의 판화 연작 <전쟁의 참상>이 그러하듯 도미에의 석판화는 격변하는 프랑스 사회를 생생하게 담은 르포르타주였다. 


프랑스 시민혁명은 언론 검열에 맞선 투쟁이기도 했다. 대중이 사회 변혁에 눈 뜨는 데 신문의 역할은 컸다. 그리고 신문과 팸플릿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게 바로 도미에의 삽화였다. 도미에의 1848년 삽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를 보면 잘 차려입은 살찐 부르주아는 쇼윈도에 정신이 팔려있고 여윈 노동자는 열기 띤 눈으로 신문을 읽는다. 그의 그림 논평은 시민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최고의 무기였다. 


보들레르가 도미에의 예술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역설한 이래 도미에의 그림은 단순 삽화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 발자크 등 문인들이 활자로 녹여낸 사회상을 도미에는 그림으로 풍자했고 유기체로서 급변하는 도시, 파리의 모습을 예견하듯 보여줬다. 부르주아의 목가적 유토피아를 조롱하고 이름 없는 서민에겐 따뜻한 시선을 보냈지만 냉철한 감각을 잃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한 시대를 증언하면서 근대 정치 캐리커처의 전형을 세웠다.



-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행복 -

확고한 공화주의자인 도미에는 루이 필리프를 거인 왕 가르강튀아에 비유한 그림으로 1834년 6개월 간 옥살이를 한다. 의자 아래 부르주아 식객들을 숨겨주고 민중에게 음식을 받아먹는 가르강튀아. 도미에가 탐욕스럽게 그린 이 거인 왕은 16세기에 프랑스의 프랑수아 라블레가 쓴 풍자 소설의 주인공이다. 


라블레가 쓴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은 중세 말기 봉건주의와 가톨릭 교회를 풍자하는 르네상스 걸작 중 하나다. 수도사 출신이 쓴 책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패러디와 '과격한' 유머가 가득하다. 



팡타그뤼엘과(1532년)과 가르강튀아(1537년) 




가르강튀아는 거인 왕 그랑구지에와 가르가멜의 아들로 출생부터 기괴하다. 임신 중인 가르가멜은 기름진 내장 요리를 너무 먹어서 대변을 보다 항문이 빠져버린다(맙소사). 해서 가르강튀아는 위쪽으로 거슬러 가 어머니의 귀로 나왔는데 태어나자마자 먹을 것부터 찾는다. 도미에의 저 풍자가 이해가 되고 남는다. 아래는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1873년 삽화. <신곡>, <실낙원>, <돈키호테>로 유명한 귀스타브 도레가 그렸다.



The Childhood of Gargantua,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Illustration for Gargantua, Book I, ch. XXII




Illustration for Gargantua, Book I, vol. 1, ch. XXXVIII

샐러드 야채에 숨어있다 먹힌 순례자들은 지팡이로 가르강튀아의 충치를 찔러댔고 덕분에 가르강튀아는 충치가 나아서 순례자들을 꺼내 준다.





Illustration of Pantagruel for the Fourth Book in the Pantagruel and Gargantua series, Book IV, vol. 2, ch. XXXV

(images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런데 식탐과 탐욕의 화신일 것 같은 가르강튀아는 거대한 몸집만큼 지성을 갖춘 왕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고, 아들 팡타그뤼엘도 그랬다. 모두 학문과 덕성을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웃나라 레르네의 피크로콜 왕이 사소한 분쟁으로 침략하자 가르강튀아는 이를 막아내고 그를 도와준 쇠이예의 수도사를 위해 텔렘 수도원을 지어주었다. 이 수도원의 계율은 단 한 가지 — 원하는 바를 행하라.


가르강튀아는 땡땡 울리는 종소리가 아니라 양식과 분별에 따라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는 걸 알았다. 이 거인 왕은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강화하는 데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늘 잔치를 열어 끊임없이 웃고 떠들며, 마음껏 먹고 마셨다. 정신의 행복만큼이나 육체적인 만족을 중요시하여 지금, 여기서 원하는 바를 행했다. 이는 19세기 혁명기에 부르주아지를 옹호하고 민중을 수탈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졌지만, 러시아 문학비평가 미하일 바흐친은 민중의 축제이자 공동체로 높이 샀다. 시대는 달라도 라블레와 도미에, 바흐친 모두 가르강튀아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행복을 찾고자 했다. 인본주의라는 돋보기를 들고. 그리고 지금 우리 역시.



이 책을 읽는 친애하는 독자들이여,

모든 정념을 떨쳐버리시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성내지 마시기를.

악하거나 추한 것은 없다 해도,

웃음에 관한 것 외에 완벽함은 거의 찾기 힘들 테지만,

당신들 마음을 상하게 하고 괴롭히는 큰 슬픔을 보면,

다른 이야깃거리가 내 마음을 끌 수 없음을

여러분은 이해할 것이오.

눈물보다는 웃음에 관하여 쓰는 편이 나은 법이라오.

웃음이 인간의 본성일지니.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문학과지성사(14) 




피의 일주일로 파리코뮌이 막을 내리고 이듬해 1872년 도미에의 눈은 급격히 나빠진다. 1877년엔 시력을 거의 상실하고 창작 활동에 손을 놓는다. 묘하게 고야와 닮은 듯 닮지 않은 도미에의 궤적은 젊은 날의 고야처럼 화려한 궁정화가의 삶은 없었지만, 말년의 고야처럼 어둠에 천착하지도 않았다. 화단의 인정도 받았고 풍족하진 않지만 지인들과 교류하며 궁핍하지 않은 삶을 꾸렸다. 그의 묘비명은 말한다.


보라, 여기 한 명의 선한 인간이자 위대한 미술가이며, 최고의 시민이었던 도미에가 잠들어 있다.




+++



여전히 미술관이 재밌고 위로도 받는다는 저자.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다. 미술관을 안 간 지 오래지만, 한적한 미술관에서 그(림)멍(때리기)하던 날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지니 말이다. 사람 바글바글한 미술관만큼 괴로운 곳도 없다. 메트, 구겐하임의 악몽이여(그래도 후회는 없지만). 사람이 많아도 좋은 곳 프릭. 꼬꼬마 시절 부모님과 처음으로 간 국현. 각양각색의 미술관, 공간, 작품이 떠오른다. 나만의 '기묘한 미술관'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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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일기
하인리히 뵐 지음, 안인길 옮김 / 미래의창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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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진하면서 경쾌한 필치에 담은 아일랜드의 애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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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 vs 가슴

<인어가 잠든 집>

예전부터 알던 책인데 이번에 읽고 책장을 덮을 때야 제목이 <인어가 잠든 집>이란 걸 알았다. 이제껏 '언어'가 잠든 집으로 알고 있었다는... 해서 신쇼 선생이 미즈호에게 책을 읽어 주는 대목부터 (잘못 안) 제목처럼 뇌와 기억, 지각과 의식, 삶과 존재의 회로가 본격적으로 그려지는구나 싶어 초집중,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는......


점점 가오루코가 섬뜩하게 느껴지다가도 갈가리 찢어지는 마음이 어슴푸레나마 (노견을 돌본 경험으로) 헤아려져 애처로움이 커졌다. 날이 갈수록 '죽음'에 대한 의학적 정의와 사회적 함의가 정교해지고, 스스로도 죽음은 삶의 마지막 권리라고 생각하고 연명 치료도 반대하지만 내 ‘머리’와 ‘가슴’이 받아들이는 죽음은 분명 다를 수 있으리라.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라면 더더욱.



"지금 그 집에 있는 아이는 예전의 미즈호가 아니야. 빈껍데기란 말이야. 너, 영혼이 뭔지 알지? 그 아이는 그게 다 빠져나가고 없어. 와카바가 잘 아는 미즈호는 이제 천국에 있으니까 그 아이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늘을 보고 얘기하면 돼."



+ 게이고의 프롤로그-에필로그는 사족이다 싶은 게 다반사지만 이번만큼은 너그럽게 넘어가기로. 



<변두리 로켓: 가우디 프로젝트>


쓰쿠다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출신이 나사인지 나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이 묘하게 흘러가는군.” 



쓰쿠다가 이런 말을 한 데다 실제 원문도 '나발'일 것 같아서 풉, 하고 웃어버린 대목.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일하는, 소설에나 존재할 것 같은 사람들. 그래서 소중한 변두리 이야기.   



++ 머리는 받아들여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삶이고 꿈이고 거추장스러울 뿐이지만 그럼에도 살아지는 건 본능일까? 













2. 올드데블스 vs 살인곰 서점

올드데블스에서 '8권의 완벽한 추리소설'을 소개합니다.

  • A.A. 밀른 <붉은 저택의 비밀>
  • 앤서니 버클리 콕스 <살의>
  • 애거서 크리스티 <ABC 살인사건>
  • 제임스 M. 케인 <이중 배상>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열차 안의 낯선 자들>
  • 존 D. 맥도날드 <익사자>
  • 아이라 레빈 <죽음의 덫>
  • 도나 타트 <비밀의 계절>

작가에게 ‘자기 세계’가 있는 건 당연하고 또 독자와 한 세계를 공유한다는 건 장르 소설의 매력이지만, 친숙함과 식상함은 한 끗 차이도 안 되고 여기서 취향이 갈리는 것이겠지. 스완슨 월드는 내게 식상했다.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이토록 게으른 서사라니.


추리소설 전문 서점, 고전 미스터리, 이를 모방하는 살인 사건(그리고 고양이). 연이어 읽은 와카타케 나나미의 <이별의 수법>과 비교가 안 될 수 없다. 고서점은 나나미 소설의 단골 소재로 <이별의 수법>은 '살인곰 서점의 사건 파일'이라는 부제가 붙는 하무라 시리즈다. 작중 등장하는 작품을 말미에 살인곰 서점 도야마 야스유키 점장이 101식으로 소개하는 게 시리즈 포맷이다.


살인곰 서점의 점원이기도 한 하무라는 악덕(후) 고용주 도야마 점장 밑에서 고서적 수급에, 이벤트 준비에, 본업인 탐정 일까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다. 오만한 간판 고양이의 밥도 챙겨줘야 한다. 하무라 왈, [도야마의] 좌우명은 “서 있을 수만 있다면 부모라도 써먹어라”다. 정신을 차렸을 무렵에는 부모도 아닌데 혹사당하고 있었다(조용한 무더위 中).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 역시 고전 미스터리가 주요 소재다. 보스턴에서 추리소설 전문 서점 올드데블스를 경영하는 맬컴 커쇼는 몇 년 전 완벽한 살인이 나오는 미스터리 8권을 서점 블로그에 올렸는데 이 소설을 모방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맬컴은 FBI 요원 그웬 멀비와 함께 소설 내용을 좇아 범인을 추적한다.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은 고전 미스터리의 추억과 더불어 요즘 잘 나가는 작가들도 언급되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지만 명작 나열하기(좋게 말하면 오마주) 이상을 넘지 못한다. "다층적", "속도감"이라는 소개 문구가 와닿지 않는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이별의 수법>에서 미스터리 책은 이야기의 씨줄과 날줄 사이에 걸린 작은 비즈처럼 반짝인다.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은 실에 구슬이 제대로 들어가지 못했다. 전직 추리소설 편집자 도야마 점장이 소개하는 리스트의 친절함까지 고려하면 살인곰 서점의 손을 번쩍 들어주련다. 스완슨 월드와는 당분간 이별을.



3. 유능하지만 불운한 탐정 하무라 아키라

일본 소설을 그다지 읽지 않는 나는 하루키 책도 읽은 게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 될까? 많아도 다섯 손가락은 안 넘을 텐데 추리 소설 위주로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본 작품을 많이 접하게 되고 급기야 마니아가 된 듯한 착각이 들려고 한다. 살짝 울렁거리는, 멀미하는 느낌도 드는데 이거 추리 소설 과식 증상? (단순히 달리는 체력 때문일지도...) 아이고, 한 템포 쉬어 가야지. 그래도 '하자키 시리즈'를 마무리하려면 <고양이섬 민박집의 대소동>은 읽어야겠지. 


몇 년 전 호기심에 읽은 <녹슨 도르래>. '코지'하지만 미스터리라고 할 순 없는 이야기. 그렇게 읽고 끝이었다. 그러다 올해 '하자키 시리즈'를 접하고 '하무라 시리즈'도 읽게 되어 <이별의 수법>까지 뜻하지 않게 출간 역순으로 읽게 됐다. <이별의 수법>은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시즌 2'의 첫 번째 작품이다.














📗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시즌 2'

이별의 수법  —> 조용한 무더위(단편) —>  녹슨 도르래 —> 불온한 잠(단편)














📘

하자키 일상 시리즈

하자키 목련 빌라의 살인 —> 진달래 고서점의 사체 —> 고양이섬 민박집의 대소동



하세가와 탐정 사무소 소속으로 일하던 하무라는 실력도 있어 동년배 회사원보다 통장 사정이 넉넉했다. 셰어하우스에 살며 수입보다 지출이 적은 것도 한몫했다. 덕분에 탐정 사무소가 폐업했어도 느긋하게 소일할 수 있었지만 국민연금법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사정에 노후가 걱정이다. 어느덧 40대가 됐기 때문이다. 임시로 일하는 살인곰 서점은 곧 관두고 탐정 복귀를 모색 중이다.


하지만 하무라가 누구인가. '세상에서 가정 불운한 탐정'아니던가. 고서적 수집을 위해 먼지를 뒤집어쓰고 유품 정리를 하던 집에서 우지끈! 굉음과 함께 하무라는 경천동지의 사건과 맞닥뜨린다. <이별의 수법> 시작이다.


근래 읽은 '속삭이는 자 시리즈'의 밀라 형사는 미스터리/스릴러에 어울리는, <언더월드> 같은 오라를 풍긴다면 하무라 탐정은 밥벌이 생활인의 일상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하무라에게 묘하게 감겨는 이유는 이 때문인지도. 나이에 반비례하는 체력과 기력에도 불구하고 일흔일곱 살에도 탐정이기를 소망하는 '진짜' 탐정 하무라 아키라. 


코지 미스터리 여왕 와카타케 나나미의 작품을 즐겁게 읽었지만, 좋아하는 장르가 생겼다고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장르적 호기심으로 다른 작가의 책을 (당분간은) 찾아 읽지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하무라는 언제고 다시 만나고 싶다. 



탐정 일에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와고 가쓰히로 건으로 나도 모르게 이바라키까지 날아가려 했을 그때 깨달았다. 나는 역시 탐정 일을 좋아한다고. 체력은 떨어지고, 냉정하지 못한 글러먹은 탐정이지만 그래도 일하고 싶다. 



"어라, 문제가 있나요? 하지만 하무라 씨는 탐정이잖아요."

태연하게 말하는 도야마를 보다가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깨닫고 웃음이 터지니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나는 제대로 신고를 한 탐정사의 종업원이자, 진짜 탐정이었다. 위법탐정 따위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노안과 사십견을 달고 오늘도 열일하는 하무라 아키라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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