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메이르, 뉘신지...?


Johannes Vermeer (1632~1675)

아...! 요하네스 베르메르. 근데 언제부터 "페르메이르"가 표기 규범이 된 거지.


(이참에 알아본) 네덜란드 외래어 표기법

1. 2005년 네덜란드 외래어 표기 용례집 마련

① ‘v’가 어두에 올 경우에는 ‘ㅍ, 프’로 적고, 그 외에는 모두 ‘ㅂ, 브’ 적음. 

② ‘ee’는 ‘에이’로 적음.

③ 위의 표기법에 따라 “Vermeer”는 "페르메이르"로 적음.

표준국어대사전에도 "페르메이르"로 등재되어 있음.


2. 깨달은 점

① 그간 미술 관련 서적을 너무 안 봤구나(인정).

② 페르메이르라고 하니까 바로크보다 데 스테일/데 스틸 de Stijl 계열 느낌이다(베를라헤, 두스부르흐, 페르메이르).

③ 페르메이르라고 해도 네덜란드에선 못 알아들을 것 같은데(의심).



책 내용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너무 늘어놨네. 

<기묘한 미술관>은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그림들의 숨겨진 이야기다. 저자는 상상의 책장을 열고 '기묘한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5개의 관을 구성해서 33개의 작품을 큐레이션 했다. 숨겨진 미스터리라고는 하지만 작품의 유명세에 따라 친숙한 이야기들도 있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또 다른 실타래를 품고 있는 법. 그 줄을 따라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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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방: 프란시스코 데 고야 Francisco José de Goya]

고야는 미술사는 물론 미학, 철학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작가다. 신고전주의 시대 화가지만 로코코와 낭만주의를 아우르는 그는 최초의 근대 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낭만주의의 선구자이자 근대 미술의 창시자라고 할까. 푸코 역시 근대 미술은 고야로 대표된다고 정의한 바 있다.


고야의 그림을 미술사 어느 한 지점에 콕 점찍을 수 없듯 그의 삶도 종잡을 수 없는 궤적을 그렸다. 궁정 화가로 스페인 독립 전쟁을 거쳐 귀머거리 집에서 '검은 그림 연작'을 그리기까지. 반항아이자 출세주의자로, 변절자이자 계몽주의자로 여러 점을 오갔다. 



- 1808년 5월 3일이 탄생하기까지 -

'시간의 할아버지' 앞으로 늙은 두 여인이 있다. 모두 최고급 옷과 장신구로 치장한 귀부인이다.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거울을 들고 있다. 'Quetal'이라고 쓰여 있는데 '어떻게 지내냐'는 뜻이다. <노파들 혹은 시간>/<시간과 노파들>은 세월의 덧없음, 아름다움의 허망함을 풍자한다. 



<Old Women or Time> or <Time and the Old Women> France, Lille, Palais des Beaux-Arts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스페인 명문 귀족이자 고야의 후원자였던 오수나 공작부인이라는 설이 있다. 흰 옷의 여인은 마리아 루이사 왕비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다이아몬드 화살촉 머리 장식이 왕비가 즐겨 착용하는 액세서리였기 때문이다. 고야의 다른 왕실 작품을 볼 때 — <카를로스 4세 가족의 초상>도 그렇고 — 확실히 마리아 루이사 왕비와 닮았다. 그림의 연대는 다소 분분하지만 1810년대다. 카를로스 4세 일가가 망명길에 오른 이후다.


가족의 초상에서 당당히 중앙을 차지한 왕비는 높은 신분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좋지 않은 쪽으로. 한데 카를로스 4세는 사냥으로 밖으로만 돌고 왕비는 급기야 마누엘 델 고도이라는 젊은 정부와 국정을 농단하기에 이른다. 국민들의 분노는 높아가고 나라는 엉망진창이 되고. 가족 초상화의 두 아이가 왕비와 고도이의 자식이라는 소문도 있었으니 그림을 그리던 고야의 표정이 저럴 만도 하다. 


결국 스페인 독립전쟁(반도 전쟁) 와중인 1808년 카를로스 4세의 아들 페르난도가 쿠데타로 즉위한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페르난도 7세를 폐위하고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의 왕 호세 1세로 세운다. 주권을 빼앗긴 민중은 분노하고 나폴레옹 군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다. 1808년 5월 2일과 5월 3일의 사건이다. 


왕비의 정부 고도이도 망명 동지였다. 그리고 고도이는 1819년 왕과 왕비가 로마에서 죽을 때까지 함께한다. 별난 의리다. 


고야는 호세 1세의 초상화를 그려 1811년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웰링턴 공작이 마드리드에 입성하자 호세 1세의 얼굴을 웰링턴으로 고쳐 그렸다. 나폴레옹이 물러나고 폐르난도 7세가 복위하자 1814년 스페인 독립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을 그린다. 고야 최고의 걸작이자 최초의 근대적인 그림은 이렇게 탄생했다. 


저자는 고야가 입체적인 인물이라고 했다. 그는 스페인 왕가, 종교재판소, 나폴레옹, 영국군 모두를 비판하고 또 협력했다. 어느 쪽이든 처벌은 없었다. 기묘한 일이다. 




[지식의 방: 오노레 도미에 Honoré Daumier] 

고야의 걸작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의 배경이 된 1808년 오노레 도미에가 태어났다. 도미에 역시 그림으로 시대를 풍자했다. 고야의 판화 연작 <전쟁의 참상>이 그러하듯 도미에의 석판화는 격변하는 프랑스 사회를 생생하게 담은 르포르타주였다. 


프랑스 시민혁명은 언론 검열에 맞선 투쟁이기도 했다. 대중이 사회 변혁에 눈 뜨는 데 신문의 역할은 컸다. 그리고 신문과 팸플릿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게 바로 도미에의 삽화였다. 도미에의 1848년 삽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를 보면 잘 차려입은 살찐 부르주아는 쇼윈도에 정신이 팔려있고 여윈 노동자는 열기 띤 눈으로 신문을 읽는다. 그의 그림 논평은 시민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최고의 무기였다. 


보들레르가 도미에의 예술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역설한 이래 도미에의 그림은 단순 삽화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 발자크 등 문인들이 활자로 녹여낸 사회상을 도미에는 그림으로 풍자했고 유기체로서 급변하는 도시, 파리의 모습을 예견하듯 보여줬다. 부르주아의 목가적 유토피아를 조롱하고 이름 없는 서민에겐 따뜻한 시선을 보냈지만 냉철한 감각을 잃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한 시대를 증언하면서 근대 정치 캐리커처의 전형을 세웠다.



-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행복 -

확고한 공화주의자인 도미에는 루이 필리프를 거인 왕 가르강튀아에 비유한 그림으로 1834년 6개월 간 옥살이를 한다. 의자 아래 부르주아 식객들을 숨겨주고 민중에게 음식을 받아먹는 가르강튀아. 도미에가 탐욕스럽게 그린 이 거인 왕은 16세기에 프랑스의 프랑수아 라블레가 쓴 풍자 소설의 주인공이다. 


라블레가 쓴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은 중세 말기 봉건주의와 가톨릭 교회를 풍자하는 르네상스 걸작 중 하나다. 수도사 출신이 쓴 책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패러디와 '과격한' 유머가 가득하다. 



팡타그뤼엘과(1532년)과 가르강튀아(1537년) 




가르강튀아는 거인 왕 그랑구지에와 가르가멜의 아들로 출생부터 기괴하다. 임신 중인 가르가멜은 기름진 내장 요리를 너무 먹어서 대변을 보다 항문이 빠져버린다(맙소사). 해서 가르강튀아는 위쪽으로 거슬러 가 어머니의 귀로 나왔는데 태어나자마자 먹을 것부터 찾는다. 도미에의 저 풍자가 이해가 되고 남는다. 아래는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1873년 삽화. <신곡>, <실낙원>, <돈키호테>로 유명한 귀스타브 도레가 그렸다.



The Childhood of Gargantua,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Illustration for Gargantua, Book I, ch. XXII




Illustration for Gargantua, Book I, vol. 1, ch. XXXVIII

샐러드 야채에 숨어있다 먹힌 순례자들은 지팡이로 가르강튀아의 충치를 찔러댔고 덕분에 가르강튀아는 충치가 나아서 순례자들을 꺼내 준다.





Illustration of Pantagruel for the Fourth Book in the Pantagruel and Gargantua series, Book IV, vol. 2, ch. XXXV

(images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런데 식탐과 탐욕의 화신일 것 같은 가르강튀아는 거대한 몸집만큼 지성을 갖춘 왕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고, 아들 팡타그뤼엘도 그랬다. 모두 학문과 덕성을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웃나라 레르네의 피크로콜 왕이 사소한 분쟁으로 침략하자 가르강튀아는 이를 막아내고 그를 도와준 쇠이예의 수도사를 위해 텔렘 수도원을 지어주었다. 이 수도원의 계율은 단 한 가지 — 원하는 바를 행하라.


가르강튀아는 땡땡 울리는 종소리가 아니라 양식과 분별에 따라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는 걸 알았다. 이 거인 왕은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강화하는 데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늘 잔치를 열어 끊임없이 웃고 떠들며, 마음껏 먹고 마셨다. 정신의 행복만큼이나 육체적인 만족을 중요시하여 지금, 여기서 원하는 바를 행했다. 이는 19세기 혁명기에 부르주아지를 옹호하고 민중을 수탈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졌지만, 러시아 문학비평가 미하일 바흐친은 민중의 축제이자 공동체로 높이 샀다. 시대는 달라도 라블레와 도미에, 바흐친 모두 가르강튀아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행복을 찾고자 했다. 인본주의라는 돋보기를 들고. 그리고 지금 우리 역시.



이 책을 읽는 친애하는 독자들이여,

모든 정념을 떨쳐버리시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성내지 마시기를.

악하거나 추한 것은 없다 해도,

웃음에 관한 것 외에 완벽함은 거의 찾기 힘들 테지만,

당신들 마음을 상하게 하고 괴롭히는 큰 슬픔을 보면,

다른 이야깃거리가 내 마음을 끌 수 없음을

여러분은 이해할 것이오.

눈물보다는 웃음에 관하여 쓰는 편이 나은 법이라오.

웃음이 인간의 본성일지니.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문학과지성사(14) 




피의 일주일로 파리코뮌이 막을 내리고 이듬해 1872년 도미에의 눈은 급격히 나빠진다. 1877년엔 시력을 거의 상실하고 창작 활동에 손을 놓는다. 묘하게 고야와 닮은 듯 닮지 않은 도미에의 궤적은 젊은 날의 고야처럼 화려한 궁정화가의 삶은 없었지만, 말년의 고야처럼 어둠에 천착하지도 않았다. 화단의 인정도 받았고 풍족하진 않지만 지인들과 교류하며 궁핍하지 않은 삶을 꾸렸다. 그의 묘비명은 말한다.


보라, 여기 한 명의 선한 인간이자 위대한 미술가이며, 최고의 시민이었던 도미에가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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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미술관이 재밌고 위로도 받는다는 저자.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다. 미술관을 안 간 지 오래지만, 한적한 미술관에서 그(림)멍(때리기)하던 날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지니 말이다. 사람 바글바글한 미술관만큼 괴로운 곳도 없다. 메트, 구겐하임의 악몽이여(그래도 후회는 없지만). 사람이 많아도 좋은 곳 프릭. 꼬꼬마 시절 부모님과 처음으로 간 국현. 각양각색의 미술관, 공간, 작품이 떠오른다. 나만의 '기묘한 미술관'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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