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 vs 가슴

<인어가 잠든 집>

예전부터 알던 책인데 이번에 읽고 책장을 덮을 때야 제목이 <인어가 잠든 집>이란 걸 알았다. 이제껏 '언어'가 잠든 집으로 알고 있었다는... 해서 신쇼 선생이 미즈호에게 책을 읽어 주는 대목부터 (잘못 안) 제목처럼 뇌와 기억, 지각과 의식, 삶과 존재의 회로가 본격적으로 그려지는구나 싶어 초집중,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는......


점점 가오루코가 섬뜩하게 느껴지다가도 갈가리 찢어지는 마음이 어슴푸레나마 (노견을 돌본 경험으로) 헤아려져 애처로움이 커졌다. 날이 갈수록 '죽음'에 대한 의학적 정의와 사회적 함의가 정교해지고, 스스로도 죽음은 삶의 마지막 권리라고 생각하고 연명 치료도 반대하지만 내 ‘머리’와 ‘가슴’이 받아들이는 죽음은 분명 다를 수 있으리라.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라면 더더욱.



"지금 그 집에 있는 아이는 예전의 미즈호가 아니야. 빈껍데기란 말이야. 너, 영혼이 뭔지 알지? 그 아이는 그게 다 빠져나가고 없어. 와카바가 잘 아는 미즈호는 이제 천국에 있으니까 그 아이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늘을 보고 얘기하면 돼."



+ 게이고의 프롤로그-에필로그는 사족이다 싶은 게 다반사지만 이번만큼은 너그럽게 넘어가기로. 



<변두리 로켓: 가우디 프로젝트>


쓰쿠다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출신이 나사인지 나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이 묘하게 흘러가는군.” 



쓰쿠다가 이런 말을 한 데다 실제 원문도 '나발'일 것 같아서 풉, 하고 웃어버린 대목.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일하는, 소설에나 존재할 것 같은 사람들. 그래서 소중한 변두리 이야기.   



++ 머리는 받아들여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삶이고 꿈이고 거추장스러울 뿐이지만 그럼에도 살아지는 건 본능일까? 













2. 올드데블스 vs 살인곰 서점

올드데블스에서 '8권의 완벽한 추리소설'을 소개합니다.

  • A.A. 밀른 <붉은 저택의 비밀>
  • 앤서니 버클리 콕스 <살의>
  • 애거서 크리스티 <ABC 살인사건>
  • 제임스 M. 케인 <이중 배상>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열차 안의 낯선 자들>
  • 존 D. 맥도날드 <익사자>
  • 아이라 레빈 <죽음의 덫>
  • 도나 타트 <비밀의 계절>

작가에게 ‘자기 세계’가 있는 건 당연하고 또 독자와 한 세계를 공유한다는 건 장르 소설의 매력이지만, 친숙함과 식상함은 한 끗 차이도 안 되고 여기서 취향이 갈리는 것이겠지. 스완슨 월드는 내게 식상했다.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이토록 게으른 서사라니.


추리소설 전문 서점, 고전 미스터리, 이를 모방하는 살인 사건(그리고 고양이). 연이어 읽은 와카타케 나나미의 <이별의 수법>과 비교가 안 될 수 없다. 고서점은 나나미 소설의 단골 소재로 <이별의 수법>은 '살인곰 서점의 사건 파일'이라는 부제가 붙는 하무라 시리즈다. 작중 등장하는 작품을 말미에 살인곰 서점 도야마 야스유키 점장이 101식으로 소개하는 게 시리즈 포맷이다.


살인곰 서점의 점원이기도 한 하무라는 악덕(후) 고용주 도야마 점장 밑에서 고서적 수급에, 이벤트 준비에, 본업인 탐정 일까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다. 오만한 간판 고양이의 밥도 챙겨줘야 한다. 하무라 왈, [도야마의] 좌우명은 “서 있을 수만 있다면 부모라도 써먹어라”다. 정신을 차렸을 무렵에는 부모도 아닌데 혹사당하고 있었다(조용한 무더위 中).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 역시 고전 미스터리가 주요 소재다. 보스턴에서 추리소설 전문 서점 올드데블스를 경영하는 맬컴 커쇼는 몇 년 전 완벽한 살인이 나오는 미스터리 8권을 서점 블로그에 올렸는데 이 소설을 모방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맬컴은 FBI 요원 그웬 멀비와 함께 소설 내용을 좇아 범인을 추적한다.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은 고전 미스터리의 추억과 더불어 요즘 잘 나가는 작가들도 언급되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지만 명작 나열하기(좋게 말하면 오마주) 이상을 넘지 못한다. "다층적", "속도감"이라는 소개 문구가 와닿지 않는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이별의 수법>에서 미스터리 책은 이야기의 씨줄과 날줄 사이에 걸린 작은 비즈처럼 반짝인다. <여덟 건의 완벽한 살인>은 실에 구슬이 제대로 들어가지 못했다. 전직 추리소설 편집자 도야마 점장이 소개하는 리스트의 친절함까지 고려하면 살인곰 서점의 손을 번쩍 들어주련다. 스완슨 월드와는 당분간 이별을.



3. 유능하지만 불운한 탐정 하무라 아키라

일본 소설을 그다지 읽지 않는 나는 하루키 책도 읽은 게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 될까? 많아도 다섯 손가락은 안 넘을 텐데 추리 소설 위주로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본 작품을 많이 접하게 되고 급기야 마니아가 된 듯한 착각이 들려고 한다. 살짝 울렁거리는, 멀미하는 느낌도 드는데 이거 추리 소설 과식 증상? (단순히 달리는 체력 때문일지도...) 아이고, 한 템포 쉬어 가야지. 그래도 '하자키 시리즈'를 마무리하려면 <고양이섬 민박집의 대소동>은 읽어야겠지. 


몇 년 전 호기심에 읽은 <녹슨 도르래>. '코지'하지만 미스터리라고 할 순 없는 이야기. 그렇게 읽고 끝이었다. 그러다 올해 '하자키 시리즈'를 접하고 '하무라 시리즈'도 읽게 되어 <이별의 수법>까지 뜻하지 않게 출간 역순으로 읽게 됐다. <이별의 수법>은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시즌 2'의 첫 번째 작품이다.














📗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시즌 2'

이별의 수법  —> 조용한 무더위(단편) —>  녹슨 도르래 —> 불온한 잠(단편)














📘

하자키 일상 시리즈

하자키 목련 빌라의 살인 —> 진달래 고서점의 사체 —> 고양이섬 민박집의 대소동



하세가와 탐정 사무소 소속으로 일하던 하무라는 실력도 있어 동년배 회사원보다 통장 사정이 넉넉했다. 셰어하우스에 살며 수입보다 지출이 적은 것도 한몫했다. 덕분에 탐정 사무소가 폐업했어도 느긋하게 소일할 수 있었지만 국민연금법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사정에 노후가 걱정이다. 어느덧 40대가 됐기 때문이다. 임시로 일하는 살인곰 서점은 곧 관두고 탐정 복귀를 모색 중이다.


하지만 하무라가 누구인가. '세상에서 가정 불운한 탐정'아니던가. 고서적 수집을 위해 먼지를 뒤집어쓰고 유품 정리를 하던 집에서 우지끈! 굉음과 함께 하무라는 경천동지의 사건과 맞닥뜨린다. <이별의 수법> 시작이다.


근래 읽은 '속삭이는 자 시리즈'의 밀라 형사는 미스터리/스릴러에 어울리는, <언더월드> 같은 오라를 풍긴다면 하무라 탐정은 밥벌이 생활인의 일상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하무라에게 묘하게 감겨는 이유는 이 때문인지도. 나이에 반비례하는 체력과 기력에도 불구하고 일흔일곱 살에도 탐정이기를 소망하는 '진짜' 탐정 하무라 아키라. 


코지 미스터리 여왕 와카타케 나나미의 작품을 즐겁게 읽었지만, 좋아하는 장르가 생겼다고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장르적 호기심으로 다른 작가의 책을 (당분간은) 찾아 읽지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하무라는 언제고 다시 만나고 싶다. 



탐정 일에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와고 가쓰히로 건으로 나도 모르게 이바라키까지 날아가려 했을 그때 깨달았다. 나는 역시 탐정 일을 좋아한다고. 체력은 떨어지고, 냉정하지 못한 글러먹은 탐정이지만 그래도 일하고 싶다. 



"어라, 문제가 있나요? 하지만 하무라 씨는 탐정이잖아요."

태연하게 말하는 도야마를 보다가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깨닫고 웃음이 터지니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나는 제대로 신고를 한 탐정사의 종업원이자, 진짜 탐정이었다. 위법탐정 따위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노안과 사십견을 달고 오늘도 열일하는 하무라 아키라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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