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0
뮤리얼 스파크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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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리얼 스파크는 대서양 양편을 아울러 충만한 재능과 힘 그리고 대담함으로 소설이라는 장르를 발전시키고 혁신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다. 스파크의 작품을 읽을 때면 우리는 언제나 갑작스레 쏟아지는 마법 같은 문장과 위트, 정교하고 팽팽한 서스펜스를 만나게 된다.  - 존 업다이크


"내가 너희의 어린 어깨 위에 원숙한 머리를 올려주는 거야. 그러면 내 제자들은 모두 크림 중의 크림이 되는 거지." (12)


"내가 더 진보적인 학교에 지원해야 한다는 거야. 내 수업 방식은 블레인보다 그런 학교에 적합하다면서. 하지만 내가 그런 허접한 학교에 지원할 일은 절대 없어. 난 이 교육 공장에 남을 거라고. 여기서 밀가루 반죽을 부풀릴 효모 역할을 해야지. 아직 말랑말랑한 나이의 소녀를 내게 주면, 그애는 영원히 내 것이 될 거야."

태양 아래 로마인 같은 옆모습을 보이며 서 있는 가무잡잡한 브로디 선생은 실로 강인해 보였다. 브로디 무리는 그녀의 승리를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허접한 학교에 지원할 리 없듯, 브로디 선생이 그런 학교에 지원할 일은 없을 터였다. 그녀는 결코 사직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제거하고 싶다면 학교 당국은 그녀를 암살해야 하리라. (13)


샌디는 문득 자신들 역시 행군 중인 브로디 선생의 파시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봐서는 모르지만, 사실 브로디 선생의 필요에 맞춰 무솔리니 무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줄지어 걷고 있는 파시스트들. 그거야 그렇다 치고, 걸가이드를 향한 브로디 선생의 경멸에는 질투와 모순과 오류가 있었다. 어쩌면 걸가이드가 너무 강력한 파시스트 라이벌이라서, 그리고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어서인지도 몰랐다. (43)


샌디는 브로디 선생에게 미술 선생님의 초상화들이 기이하게도 모두 브로디 선생을 닮았다고 말해주었다. 브로디 선생은 그 말을 들으면 너무도 좋아했기 때문에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이야기해주었다.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하는군, 브로디 선생은 자신을 칼뱅의 하느님으로, 처음과 끝을 아는 전지전능한 존재로 여기고 있어, 샌디는 생각했다. (158) 



스코틀랜드 작가 뮤리엘 스파크의 대표작. 

연극과 티비쇼는 물론, 1969년 매기 스미스가 '미스 진 브로디'로 분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영화의 원작이다.

image sorce: Wikipedia



읽은 시점이 너무도 절묘해서 증강현실 체험하는 줄. 

기이한 자기 수용으로 점철된 전성기, 낭만. 그리고 반면교사. 


이렇게 우회적인 방식으로 샌디는 브로디 선생이 그런 인물이 된 이유, 더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다른 독신 여성들처럼 술독에 빠지는 대신 이국적이고 자기파괴적인 도취에 빠짐으로써 그토록 특이하게 스스로를 고양시키게 된 이유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144)

 

나의 진 브로디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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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철학 - 깊은 공부, 진짜 공부를 위한 첫걸음
지바 마사야 지음, 박제이 옮김 / 책세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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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츳코미‘와 ‘보케‘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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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끝나지 않은 혁명 엑스쿨투라 5
알랭 바디우 &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지음, 현성환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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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루디네스코식 접근에 수긍하면서도 바디우 얘기가 좀 더 흥미로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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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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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문맹 - 자전적 이야기>

1987년 첫 프랑스어 소설이자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1부 '비밀 노트'를 쓰기까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기록.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은이), 백수린 (옮긴이) | 한겨레출판 | 2018-05-09 | 원제 L'Analphabète (2004년)


얄팍하네. 

손에 쥔 책은 정말 자그마했다. 얇은 책이란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본문은 113페이지가 고작이다. 보통 다이어리보다도 작은 판형에 이마저도 사방 여백이 족히 2, 3cm는 되니 정성 들인 책 디자인이 아니라면 단행본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 싶다.


사뮤엘 베케트나 오스카 와일드, 아룬다티 로이, 줌파 라히리 등 모국어 외에 외국어로 글을 쓴 작가는 얼마든지 있다. 번역자의 손을 타지 않고, 본인이 쓰고 싶은 만큼 쓰기 위해서. 역시 작가는 글 욕심이 대단하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말만을 골라서 쓸 것이다. 말은 가난해진다. 그래서 그를 둘러싼 세상은 단순해진다.” 김연수 작가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맹>에 부친 글이다. <문맹>은 자신을 이해하고 이해시키기 위해, 평생 지치지 않고 사전을 확인하며, 할 수 있는 말로 글을 써 온 한 작가의 이야기다.  



[모순이 만드는 존재의 집]

줌파 라히리는 로마에서 사전을 뒤져가며 이탈리아어로 글을 썼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도 스위스에서 사전과 사랑에 빠져가며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 모국어를 버리고 결핍 속에서 자기 이해와 존재 의미를 치열하게 파고든 두 작가. 라히리는 이를 가리켜 “부서지기 쉬운 피난처에서 노숙자나 다름없이 살기 위해 훌륭한 저택을 포기한”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겠다. 라히리는 이탈리아어와 사랑에 빠져 자발적으로 이방인이 되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1935년 헝가리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1956년 헝가리 혁명의 여파 속에 남편과 함께 갓 난 딸을 데리고 망명길에 오른다. 오스트리아를 거쳐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의 뇌샤텔에 정착한 후 평생 스위스에서 프랑스어로 글을 쓰며 살았다. 


“이 언어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운명에 의해, 우연에 의해, 상황에 의해 나에게 주어진 언어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 문맹의 도전” (113).


헝가리가 소련의 지배를 받던 시절, 소녀 크리스토프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아무도 러시아어를 알지 못하고 누구도 가르칠 마음도 없다. 배우고 싶은 학생도 없다. 강제된 언어에 지식 태업으로 저항했던 헝가리 소녀는 21살, 정치적 난민이 되어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그는 강제된 언어와 전쟁을 선포한다. 정복하겠노라고. 한 문맹의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전적으로 우연히 프랑스어를 쓰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나는 완벽한 미지의 언어와 맞서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이 언어를 정복하려는 나의 전투, 내 평생 동안 지속될 길고 격렬한 전투가 시작된다” (52).


이 미지의 언어를 정복해 가면서 그의 세계는 확장한다. 모국어인 헝가리어를 죽여가면서. 들어차는 것보다 더 많이, 더 넓게. 글쓰기의 절박함으로 모국어를 죽이는 '적어(敵語)'의 언어망에 끊임없이 부딪히면서 존재의 집을 짓는다. 그 세계는 단순하지만 명료하다.


크리스토프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열성 독자로 <네>를 읽고 그 어떤 책보다 많이 웃었다고 한다. 베른하르트는 오스트리아 작가다. 또 다른 적의 언어로 글을 쓴 그를 가리켜 크리스토프는 작가의 영원한 모범이라고 힘주어 얘기한다. 베른하르트가 조국 오스트리아와 가지는 특수한 관계 때문이다. 그는 매 작품에서 오스트리아 국가와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이는 문학적 망명과 다름없었다. 1989년 베른하르트가 죽었다. 그 상실감을 크리스토프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이것은 <네>라는 제목의 책을 쓴 천재적인 작가가 사회에 보내는 마지막 ‘아니오’였다. (...) 이 책의 내용이 끔찍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네’는 정말 ‘네’이지만, 죽음에 대한 ‘네’이고, 그러니까 삶에 대한 ‘아니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작가이고 싶은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모범으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62-63).


‘나는 생각했다.’로 한 단락을 내달리는 베른하르트의 <몰락하는 자>를 떠올려본다. 듬성듬성한 크리스토프의 글을 읽으면서.



[누구나 작가가 된다]

“엄마 소설을 누가 출판해줄 거 같아?”라고 묻는 딸에게 크리스토프는 당연하다고 답한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그는 자신의 소설이 좋은 소설이고 아무 문제 없이 출판되리라 믿는다. 그래서 갈라마르, 그라세 같은 대형 출판사에서 거절 편지를 받았을 때 실망하기보다 놀라는 마음이 더 컸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이런 의문이 드는 건 당연하다. ‘이 자신감은 도대체 뭐지?’


꼭 200년 전, 분별 있고 덕망 있는 프랑스 학자가 네덜란드어를 모르는 ‘문맹’이 되는 바람에 지적 모험을 떠나게 된다. 조제프 자코토 얘기다. 정치적 망명객 자코토는 프랑스어를 모르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프랑스 문학을 가르쳤다. 문맹이 문맹을 가르치다니! 모국어로 소통할 수 없는 불편함 속에 떠난 지적 모험은 기대 이상이었다. 자코토는 여전히 네덜란드어를 몰랐지만, 그의 학생들은 프랑스어로 된 시를 자유롭게 읽고 쓰게 되었다. 그것도 작가 수준으로.  


히브리어는 석판공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우리는 인쇄공의 모자란 아들이 자코토에게 히브리어를 배워 ‘훌륭한’ 석판공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무지한’ 선생 자코토는 배움은 하나의 지식을 다른 지식과 연결하는 것이고, 이것은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하려고 하느냐의 문제라고 했다. 지능의 위계가 아니라 자기 욕망과 상황의 강제, 의지의 차이라는 것이다. 열망과 의지로 배움이 점점이 연결되면 누구나 자기 세계가 만들어진다. 크리스토프의 자신감도 여기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크리스토프는 자코토가 말한 경우에 다 들어맞는다. 더듬더듬 말만 할 줄 아는 그는 강제된 상황속에서 프랑스어를 정복하겠다는 의지로 치열하게 읽고 쓰기를 행한다.


“아이들이 내게 어떤 단어의 뜻이나 철자를 물어보면 나는 두 번 다시 ‘모른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한번 확인해볼게.’

그리고 사전을 확인해볼 것이다. 지치지 않고 확인해볼 것이다” (112).   


그렇게 그는 작가가, 밀란 쿤데라에 비견되는 작가가 된다.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 (103). 



[현재형]

하나의 단어에는 하나의 사물이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그렇다. 크리스토프도 그랬다. 어느덧 읽고 말하고, 밤사이 눈물로 품어 낸 문장으로 시를 쓰던 소녀. 어른이 되어 졸지에 문맹이 된다. 다시 말을 배운다.


크리스토프 작품의 독특함은 문체, 그중에도 간결함과 시점에 있다. <문맹>도 마찬가지다. 헝가리에서 보낸 유년 시절부터 스위스에서 난민으로, 문맹으로 살아가는 이야기가 챕터 별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서사는 현재형으로 간결하게 쓰였다. 자전적 이야기임에도 특유의 외부자적 시선은 여전하다. 텍스트에도 ‘여백의 미’가 있다면 나는 크리스토프의 글이 정석이라고 말하겠다. 이 짧디 짧은 책을 읽다 왠지 모를 먹먹함에 휘말린다. 그가 말하는 사회적, 문화적 ‘사막’이란 게 이런 건가싶다. <문맹>은 독자에게 다가가기보다 그 여백으로 독자를 불러들인다. 조용히. 그 안에서 독자는 그의 시적 언어망에 현재형으로 끊임없이 나뒹군다.


앞선 자코토의 지적 모험을 얘기하면서 랑시에르는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시키려는 욕망(...) 그것이 없다면 어떤 인간도 결코 언어 활동의 물질성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할 것이다. 이해한다는 말을 그것의 참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물들의 베일을 걷어내는 터무니없는 힘이 아니라, 한 화자를 다른 화자와 직면하게 하는 번역의 역량으로 말이다”1)라고 했다.


언어의 결핍은 재빠르게 감각의 근원에 다가가는지도 모르겠다. 그 근원에 닿는 순간 감정은 깊어지고 강해져 언어 활동의 물질성은 참뜻을 갖게 된다. <문맹>의 역자도 독서란 “언어를 매개로 하지만 역설적으로 언어 이상의 것을 감각하게 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모국어가 프랑스어가 아닌 작가가 쓴, 이 얄팍한 책이,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역자의 손을 거처 나에게 왔다.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지은 집으로 들어서며 생각한다.


나의 결핍이 그의 가난한 글과 함께 깊어지기를,

나의 배움이 사회에 ‘네’를 고할 때까지 멈추지 않기를,

나의 세계가 언제나 현재이기를,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그러하기를.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맹>을 읽고.




1.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양창렬 옮김, 궁리 2008,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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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적 광증의 사례 읻다 시인선 1
앙리 미쇼 지음, 주현진 옮김 / 읻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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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통, 왼쪽 머리가 아픈 것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두통이란 ‘머리 왼쪽이 아픈 것’인 줄 알았다. 시도 때도 없이 욱신거리는 왼쪽 머리. 당시 편두통 신약이라고 나온 딱따구리 미가펜도 먹어봤지만 별 소용이 없고 그나마 타이레놀 먹고 목침으로 지근지근 머리를 눌러주면서 참는 수밖엔. 멀미를 머리로 한다고나 할까. 너무 아프면 벽에 머리를 콩콩콩 부딪혀 보기도 했는데 아예 벽에 들이박아 날려버리는 게 속 시원하겠다 싶을 만큼 지옥이었다. 까무러치듯 하여 친구의 부축을 받고 조퇴한 적도 있더랬다. 그러다 요령이 생겨 머리가 아파온다, 하면 취하는 몇 가지 루틴도 생겼고, 그 루틴이 큐브마냥 딱딱 맞아들어가면 잠이 물 밀듯 쏟아지곤 했다.

그러다 고2 때인가, 이게 ‘편두통'이란 걸 알았다. 두통은 왼쪽 머리가 아픈 게 아니었다! 편.두.통. 어감이 무시무시하다.

신기한 건 어릴 때는 징글징글하게 들러붙던 편두통이 어느 날부터 드문드문 찾아오더란 것이다. 내가 나이 먹어가듯 놈도 힘에 부치나 보다. 시작이다 싶으면 카페인까지 추가한 루틴을 실행해서 ’이레이저 헤드’마냥 머리를 날려버리고 싶은 극한의 통증은 드물어지긴 했으나… 루틴이 삐걱하면(타이밍 때문이거나 약 안 먹고 버티는 경우인데) 역시나 어마무시한 놈의 위력이란. 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결국 약도 먹게 된다. 편두통은 죽지 않는다. 멀어질 뿐이다.

한창 시달리던 10대 때는 편두통에 관한 얘기가 그리 활발하지 않았는데  접하기도 쉽지 않았고  지금은 다양한 연구나 대중서도 부쩍 많아졌더라. 이러다 보니 편두통에 관심과 무관심이 공존하는데 통상적으로 이야기하는 원인, 임상 및 사람들의 경험담이 궁금한 반면 나대로의 루틴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일단 겪게 되면 뭐가 어찌 됐든 고통스럽기 때문에  미치도록  편두통이란 병명 자체에 무덤덤하게 된 것이랄까.



문학을 과학으로 착각한 인간
갑자기 편두통의 ‘추억’에 젖은 건, 올리버 색스의 <편두통>으로 인해 읽은 앙리 미쇼(Henri Michaux)의 <주기적 광증의 사례> 때문이다. 올리버 색스 타계 1주기 한정판으로 나온 <편두통>을 구매 목록에 넣다가 <주기적 광증의 사례>도 같이 담게 되었다. 어찌 된 일인지 나란히 목록에 있기도 했고, 제목의 강렬함에 당연하게 신경계 쪽 광증(발작) 사례에 관한 책인 줄 알았지. 책을 담게 되면 정보를 보기 마련인데 이 책은 그러지도 않았다. 한정판과 표지 느낌도 오묘하게 비슷하고, 무엇보다 제목이 찰떡같이 연결되지 않는가. 주기적 광증의 사례  편두통.

그렇게 손에 쥔 책은 앙증맞은 크기의 포스트모더니즘 시집!이었다.

<주기적 광증의 사례 Cas de folie circulaire>
읻다 시인선 1



저자인 앙리 미쇼는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화가로 자기 안의 여러 목소리를 듣기 위해 내면으로의 침잠과 동시에 세계 곳곳을 유랑하는 노마드였다. 1930년대 아시아 여행길에 올라 서울도 거쳐 갔다고 한다. 환각 속, 그러니까 말 그대로 LSD와 메스칼린 복용 상태에서  그리고 전문의 입회 아래  창작 행위를 한 것으로도 유명한 전위예술가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도 들어본 적 없는, ‘글쟁이’ 정도가 알아볼 수 있는 낯선 작가"라고 역자는 소개한다. 벨기에 출생이지만 “개 같은 삶”을 살지언정 언제나 벨기에서 벗어나길 갈망했고 결국 1924년 파리로 건너간다. “구멍 뚫린 채 태어났다”라고 선언한 작가는 “부재하는 기둥 위에 건설한 삶”을 살았다.



앙리 미쇼, 안과 밖의 작가
이런 식의 만남에 헛웃음이 난다.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한복판에 있던 작가를 어디선가 한번 보지는 않았을까, 아니 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책이며 노트를 뒤적거렸다. 꾸깃한 노트에서 미쇼란 성만 살짝 끄적인 걸 찾았다.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세상엔 별만큼 많은 예술가가 나고 진다는 것을.

<주기적 광증의 사례>는 작가의 첫 작품이다. C.D. 로트레아몽과 쥘 쉬페르비엘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미쇼는 생전에 초기 작품을 극도로 꺼리면서 초판본을 파기하려 했다고. 미쇼 연구가 장-피에르 마르탱은 초기 작품 이후로 미쇼가 “절대적으로 새로운 설정”을 더는 창조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만큼 첫 작품 <주기적 광증의 사례>는 미쇼의 창작 세계를 가늠하는 척도라고 할 수 있다. 만년에는 그리기에 몰두했는데 그의 파편화된 글쓰기처럼 그림 역시 기의의 음악적 나열에 가까웠다. 1955년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한 후 1965년 국가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미쇼는 이를 사절하였다. 1978년에는 파리 국립현대미술관과 뉴욕 구겐하임에서 작품전이 대대적으로 열렸다.

외적, 내적 탐험의 순환 사이에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부표하지만 견고한 집을 지은 예술가. 자신을 인식하기 위한 글쓰기에서 언어로 존재하는 자신을 벗어나기 위해 그리기에 천착한 앙리 미쇼. 어쩌면 그의 삶 자체가 ‘주기적 광증’일 수 있으리라.


+ 기우 아닌 기우라면 미쇼의 다른 작품이 소개되려나 하는 점이다. 작가 자신이 인정한 최초의 작품이자 대중적으로 호평을 받은 <에콰도르> 등 다른 작품에도 호기심이 생기는데 읽고 싶어도 책이 없으면 뭔 소용이람.
((아를트의 <화염방사기>와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 소유>도 번역본 좀 출간해 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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