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들어가며]

<문맹 - 자전적 이야기>

1987년 첫 프랑스어 소설이자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1부 '비밀 노트'를 쓰기까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기록.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은이), 백수린 (옮긴이) | 한겨레출판 | 2018-05-09 | 원제 L'Analphabète (2004년)


얄팍하네. 

손에 쥔 책은 정말 자그마했다. 얇은 책이란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본문은 113페이지가 고작이다. 보통 다이어리보다도 작은 판형에 이마저도 사방 여백이 족히 2, 3cm는 되니 정성 들인 책 디자인이 아니라면 단행본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 싶다.


사뮤엘 베케트나 오스카 와일드, 아룬다티 로이, 줌파 라히리 등 모국어 외에 외국어로 글을 쓴 작가는 얼마든지 있다. 번역자의 손을 타지 않고, 본인이 쓰고 싶은 만큼 쓰기 위해서. 역시 작가는 글 욕심이 대단하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말만을 골라서 쓸 것이다. 말은 가난해진다. 그래서 그를 둘러싼 세상은 단순해진다.” 김연수 작가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맹>에 부친 글이다. <문맹>은 자신을 이해하고 이해시키기 위해, 평생 지치지 않고 사전을 확인하며, 할 수 있는 말로 글을 써 온 한 작가의 이야기다.  



[모순이 만드는 존재의 집]

줌파 라히리는 로마에서 사전을 뒤져가며 이탈리아어로 글을 썼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도 스위스에서 사전과 사랑에 빠져가며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 모국어를 버리고 결핍 속에서 자기 이해와 존재 의미를 치열하게 파고든 두 작가. 라히리는 이를 가리켜 “부서지기 쉬운 피난처에서 노숙자나 다름없이 살기 위해 훌륭한 저택을 포기한”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겠다. 라히리는 이탈리아어와 사랑에 빠져 자발적으로 이방인이 되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1935년 헝가리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1956년 헝가리 혁명의 여파 속에 남편과 함께 갓 난 딸을 데리고 망명길에 오른다. 오스트리아를 거쳐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의 뇌샤텔에 정착한 후 평생 스위스에서 프랑스어로 글을 쓰며 살았다. 


“이 언어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운명에 의해, 우연에 의해, 상황에 의해 나에게 주어진 언어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 문맹의 도전” (113).


헝가리가 소련의 지배를 받던 시절, 소녀 크리스토프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아무도 러시아어를 알지 못하고 누구도 가르칠 마음도 없다. 배우고 싶은 학생도 없다. 강제된 언어에 지식 태업으로 저항했던 헝가리 소녀는 21살, 정치적 난민이 되어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그는 강제된 언어와 전쟁을 선포한다. 정복하겠노라고. 한 문맹의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전적으로 우연히 프랑스어를 쓰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나는 완벽한 미지의 언어와 맞서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이 언어를 정복하려는 나의 전투, 내 평생 동안 지속될 길고 격렬한 전투가 시작된다” (52).


이 미지의 언어를 정복해 가면서 그의 세계는 확장한다. 모국어인 헝가리어를 죽여가면서. 들어차는 것보다 더 많이, 더 넓게. 글쓰기의 절박함으로 모국어를 죽이는 '적어(敵語)'의 언어망에 끊임없이 부딪히면서 존재의 집을 짓는다. 그 세계는 단순하지만 명료하다.


크리스토프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열성 독자로 <네>를 읽고 그 어떤 책보다 많이 웃었다고 한다. 베른하르트는 오스트리아 작가다. 또 다른 적의 언어로 글을 쓴 그를 가리켜 크리스토프는 작가의 영원한 모범이라고 힘주어 얘기한다. 베른하르트가 조국 오스트리아와 가지는 특수한 관계 때문이다. 그는 매 작품에서 오스트리아 국가와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이는 문학적 망명과 다름없었다. 1989년 베른하르트가 죽었다. 그 상실감을 크리스토프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이것은 <네>라는 제목의 책을 쓴 천재적인 작가가 사회에 보내는 마지막 ‘아니오’였다. (...) 이 책의 내용이 끔찍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네’는 정말 ‘네’이지만, 죽음에 대한 ‘네’이고, 그러니까 삶에 대한 ‘아니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작가이고 싶은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모범으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62-63).


‘나는 생각했다.’로 한 단락을 내달리는 베른하르트의 <몰락하는 자>를 떠올려본다. 듬성듬성한 크리스토프의 글을 읽으면서.



[누구나 작가가 된다]

“엄마 소설을 누가 출판해줄 거 같아?”라고 묻는 딸에게 크리스토프는 당연하다고 답한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그는 자신의 소설이 좋은 소설이고 아무 문제 없이 출판되리라 믿는다. 그래서 갈라마르, 그라세 같은 대형 출판사에서 거절 편지를 받았을 때 실망하기보다 놀라는 마음이 더 컸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이런 의문이 드는 건 당연하다. ‘이 자신감은 도대체 뭐지?’


꼭 200년 전, 분별 있고 덕망 있는 프랑스 학자가 네덜란드어를 모르는 ‘문맹’이 되는 바람에 지적 모험을 떠나게 된다. 조제프 자코토 얘기다. 정치적 망명객 자코토는 프랑스어를 모르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프랑스 문학을 가르쳤다. 문맹이 문맹을 가르치다니! 모국어로 소통할 수 없는 불편함 속에 떠난 지적 모험은 기대 이상이었다. 자코토는 여전히 네덜란드어를 몰랐지만, 그의 학생들은 프랑스어로 된 시를 자유롭게 읽고 쓰게 되었다. 그것도 작가 수준으로.  


히브리어는 석판공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우리는 인쇄공의 모자란 아들이 자코토에게 히브리어를 배워 ‘훌륭한’ 석판공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무지한’ 선생 자코토는 배움은 하나의 지식을 다른 지식과 연결하는 것이고, 이것은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하려고 하느냐의 문제라고 했다. 지능의 위계가 아니라 자기 욕망과 상황의 강제, 의지의 차이라는 것이다. 열망과 의지로 배움이 점점이 연결되면 누구나 자기 세계가 만들어진다. 크리스토프의 자신감도 여기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크리스토프는 자코토가 말한 경우에 다 들어맞는다. 더듬더듬 말만 할 줄 아는 그는 강제된 상황속에서 프랑스어를 정복하겠다는 의지로 치열하게 읽고 쓰기를 행한다.


“아이들이 내게 어떤 단어의 뜻이나 철자를 물어보면 나는 두 번 다시 ‘모른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한번 확인해볼게.’

그리고 사전을 확인해볼 것이다. 지치지 않고 확인해볼 것이다” (112).   


그렇게 그는 작가가, 밀란 쿤데라에 비견되는 작가가 된다.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 (103). 



[현재형]

하나의 단어에는 하나의 사물이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그렇다. 크리스토프도 그랬다. 어느덧 읽고 말하고, 밤사이 눈물로 품어 낸 문장으로 시를 쓰던 소녀. 어른이 되어 졸지에 문맹이 된다. 다시 말을 배운다.


크리스토프 작품의 독특함은 문체, 그중에도 간결함과 시점에 있다. <문맹>도 마찬가지다. 헝가리에서 보낸 유년 시절부터 스위스에서 난민으로, 문맹으로 살아가는 이야기가 챕터 별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서사는 현재형으로 간결하게 쓰였다. 자전적 이야기임에도 특유의 외부자적 시선은 여전하다. 텍스트에도 ‘여백의 미’가 있다면 나는 크리스토프의 글이 정석이라고 말하겠다. 이 짧디 짧은 책을 읽다 왠지 모를 먹먹함에 휘말린다. 그가 말하는 사회적, 문화적 ‘사막’이란 게 이런 건가싶다. <문맹>은 독자에게 다가가기보다 그 여백으로 독자를 불러들인다. 조용히. 그 안에서 독자는 그의 시적 언어망에 현재형으로 끊임없이 나뒹군다.


앞선 자코토의 지적 모험을 얘기하면서 랑시에르는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시키려는 욕망(...) 그것이 없다면 어떤 인간도 결코 언어 활동의 물질성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할 것이다. 이해한다는 말을 그것의 참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물들의 베일을 걷어내는 터무니없는 힘이 아니라, 한 화자를 다른 화자와 직면하게 하는 번역의 역량으로 말이다”1)라고 했다.


언어의 결핍은 재빠르게 감각의 근원에 다가가는지도 모르겠다. 그 근원에 닿는 순간 감정은 깊어지고 강해져 언어 활동의 물질성은 참뜻을 갖게 된다. <문맹>의 역자도 독서란 “언어를 매개로 하지만 역설적으로 언어 이상의 것을 감각하게 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모국어가 프랑스어가 아닌 작가가 쓴, 이 얄팍한 책이,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역자의 손을 거처 나에게 왔다.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지은 집으로 들어서며 생각한다.


나의 결핍이 그의 가난한 글과 함께 깊어지기를,

나의 배움이 사회에 ‘네’를 고할 때까지 멈추지 않기를,

나의 세계가 언제나 현재이기를,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그러하기를.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맹>을 읽고.




1.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양창렬 옮김, 궁리 2008, 12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