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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적 광증의 사례 ㅣ 읻다 시인선 1
앙리 미쇼 지음, 주현진 옮김 / 읻다 / 2017년 6월
평점 :
품절
두통, 왼쪽 머리가 아픈 것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두통이란 ‘머리 왼쪽이 아픈 것’인 줄 알았다. 시도 때도 없이 욱신거리는 왼쪽 머리. 당시 편두통 신약이라고 나온 딱따구리 미가펜도 먹어봤지만 별 소용이 없고 그나마 타이레놀 먹고 목침으로 지근지근 머리를 눌러주면서 참는 수밖엔. 멀미를 머리로 한다고나 할까. 너무 아프면 벽에 머리를 콩콩콩 부딪혀 보기도 했는데 아예 벽에 들이박아 날려버리는 게 속 시원하겠다 싶을 만큼 지옥이었다. 까무러치듯 하여 친구의 부축을 받고 조퇴한 적도 있더랬다. 그러다 요령이 생겨 머리가 아파온다, 하면 취하는 몇 가지 루틴도 생겼고, 그 루틴이 큐브마냥 딱딱 맞아들어가면 잠이 물 밀듯 쏟아지곤 했다.
그러다 고2 때인가, 이게 ‘편두통'이란 걸 알았다. 두통은 왼쪽 머리가 아픈 게 아니었다! 편.두.통. 어감이 무시무시하다.
신기한 건 어릴 때는 징글징글하게 들러붙던 편두통이 어느 날부터 드문드문 찾아오더란 것이다. 내가 나이 먹어가듯 놈도 힘에 부치나 보다. 시작이다 싶으면 카페인까지 추가한 루틴을 실행해서 ’이레이저 헤드’마냥 머리를 날려버리고 싶은 극한의 통증은 드물어지긴 했으나… 루틴이 삐걱하면(타이밍 때문이거나 약 안 먹고 버티는 경우인데) 역시나 어마무시한 놈의 위력이란. 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결국 약도 먹게 된다. 편두통은 죽지 않는다. 멀어질 뿐이다.
한창 시달리던 10대 때는 편두통에 관한 얘기가 그리 활발하지 않았는데 — 접하기도 쉽지 않았고 — 지금은 다양한 연구나 대중서도 부쩍 많아졌더라. 이러다 보니 편두통에 관심과 무관심이 공존하는데 통상적으로 이야기하는 원인, 임상 및 사람들의 경험담이 궁금한 반면 나대로의 루틴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일단 겪게 되면 뭐가 어찌 됐든 고통스럽기 때문에 — 미치도록 — 편두통이란 병명 자체에 무덤덤하게 된 것이랄까.
문학을 과학으로 착각한 인간
갑자기 편두통의 ‘추억’에 젖은 건, 올리버 색스의 <편두통>으로 인해 읽은 앙리 미쇼(Henri Michaux)의 <주기적 광증의 사례> 때문이다. 올리버 색스 타계 1주기 한정판으로 나온 <편두통>을 구매 목록에 넣다가 <주기적 광증의 사례>도 같이 담게 되었다. 어찌 된 일인지 나란히 목록에 있기도 했고, 제목의 강렬함에 당연하게 신경계 쪽 광증(발작) 사례에 관한 책인 줄 알았지. 책을 담게 되면 정보를 보기 마련인데 이 책은 그러지도 않았다. 한정판과 표지 느낌도 오묘하게 비슷하고, 무엇보다 제목이 찰떡같이 연결되지 않는가. 주기적 광증의 사례 — 편두통.
그렇게 손에 쥔 책은 앙증맞은 크기의 포스트모더니즘 시집!이었다.

<주기적 광증의 사례 Cas de folie circulaire>
읻다 시인선 1
저자인 앙리 미쇼는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화가로 자기 안의 여러 목소리를 듣기 위해 내면으로의 침잠과 동시에 세계 곳곳을 유랑하는 노마드였다. 1930년대 아시아 여행길에 올라 서울도 거쳐 갔다고 한다. 환각 속, 그러니까 말 그대로 LSD와 메스칼린 복용 상태에서 — 그리고 전문의 입회 아래 — 창작 행위를 한 것으로도 유명한 전위예술가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도 들어본 적 없는, ‘글쟁이’ 정도가 알아볼 수 있는 낯선 작가"라고 역자는 소개한다. 벨기에 출생이지만 “개 같은 삶”을 살지언정 언제나 벨기에서 벗어나길 갈망했고 결국 1924년 파리로 건너간다. “구멍 뚫린 채 태어났다”라고 선언한 작가는 “부재하는 기둥 위에 건설한 삶”을 살았다.
앙리 미쇼, 안과 밖의 작가
이런 식의 만남에 헛웃음이 난다.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한복판에 있던 작가를 어디선가 한번 보지는 않았을까, 아니 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책이며 노트를 뒤적거렸다. 꾸깃한 노트에서 미쇼란 성만 살짝 끄적인 걸 찾았다.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세상엔 별만큼 많은 예술가가 나고 진다는 것을.
<주기적 광증의 사례>는 작가의 첫 작품이다. C.D. 로트레아몽과 쥘 쉬페르비엘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미쇼는 생전에 초기 작품을 극도로 꺼리면서 초판본을 파기하려 했다고. 미쇼 연구가 장-피에르 마르탱은 초기 작품 이후로 미쇼가 “절대적으로 새로운 설정”을 더는 창조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만큼 첫 작품 <주기적 광증의 사례>는 미쇼의 창작 세계를 가늠하는 척도라고 할 수 있다. 만년에는 그리기에 몰두했는데 그의 파편화된 글쓰기처럼 그림 역시 기의의 음악적 나열에 가까웠다. 1955년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한 후 1965년 국가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미쇼는 이를 사절하였다. 1978년에는 파리 국립현대미술관과 뉴욕 구겐하임에서 작품전이 대대적으로 열렸다.
외적, 내적 탐험의 순환 사이에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부표하지만 견고한 집을 지은 예술가. 자신을 인식하기 위한 글쓰기에서 언어로 존재하는 자신을 벗어나기 위해 그리기에 천착한 앙리 미쇼. 어쩌면 그의 삶 자체가 ‘주기적 광증’일 수 있으리라.
+ 기우 아닌 기우라면 미쇼의 다른 작품이 소개되려나 하는 점이다. 작가 자신이 인정한 최초의 작품이자 대중적으로 호평을 받은 <에콰도르> 등 다른 작품에도 호기심이 생기는데 읽고 싶어도 책이 없으면 뭔 소용이람.
((아를트의 <화염방사기>와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 소유>도 번역본 좀 출간해 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