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칼 폴라니를 알고 있었던 건 아니다. 사회적경제 관련하여 보다가 KPIA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나에게만) 생경한 경제학자와 관련한 협동조합이 한국에 있다니 신기하기도. 그나마 아는 경제학자라곤 케인스와 프리드먼(그리고 마르크스) 정도인데 사실 이름이나 알 뿐 사상에 대해서, 아니 이 영역 자체에 무지렁이인 나는 ‘경제'라는 것도 나와는 먼 이야기 같다고나 할까. 그래도 이제라도 관심을 가져볼까 싶던 차, 당초 잡혔던 일이 어그러지는 통에 지난 달 칼 폴라니 북 토크에 갈 수 있었다. 합스부르크 딜레마, 악마의 맷돌, 기독교 사회주의, 자유주의적 유토피아를 키워드로 다루었는데  얕게나마 머리에 있는 내용을 총동원, 되새김을 위해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폴라니는 시장을 혐오한 것이 아니라 경제 원리로써 시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을 혐오했다. 시장이란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이윤이 아닌 쓸모를 위한 생산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자신의 결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자유의 장이어야 한다는 것이 폴라니의 주장이다. 자기조정적 시장은 허구적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장경제 외에도 3개 이상의 경제 패턴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결합도 가능하다고 여겼다. 산업자본주의 사회 이전, 고대 그리스나 아프리카 다호메이 왕국의 체제가 경제적 합리성에 더 부합한다고 보았고 여기에서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경제 질서를 찾고자 했다. 

 

노동, 토지, 화폐가 상품화되고 자본이 권력이 되어버린 19세기 이후의 자기조정적 시장에서는 필연적으로 이중운동(Double Movement)이 나타나게 된다. 사회 전체가 시장의 자기조정에 맞춰 재구성되는 한편, 사회가 자기 방어적인 대항 운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국가에 관해서도 이러한 견해를 엿볼 수 있는데, <거대한 전환>에 따르면 국가는 시장을 사회에서 분리, 자기조정적 시장질서로의 재편을 허용하면서도 제도를 통해 사회의 자기보호 운동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폴라니는 단 한 사람이라도 개인의 비참함을 그 자신이 떠안고 가야 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으며 사회가 경제를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제2 인터내셔널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접한 폴라니는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했지만, 초기 마르크스 사상에 흠뻑 빠졌고 이에 기반한 기독교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지역주의적 대안을 추구하였다. 너와 나의 좋은 삶이라는 관점으로 개인을 경제적인 인간관(Homo Economicus)으로 보지 않았다. 개인과 공동체는 대립적인 관계가 아닌 상보적인 관계이며 모든 인간은 구원받아 마땅한 영혼을 가진 존재라고 보았다. 따라서 한 개인을 움직이는 것은 그 영혼을 움직이는 것이며 이는 사회제도나 정치체제가 아닌 도덕적 원리의 고양으로 이뤄진다고 믿었다. 



폴라니의 삶은 찌질함의 연속이었다고 홍기빈 박사는 반 농담으로 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꿋꿋이 지켜나간 한 인간으로서 그의 '왼편의 삶'은 가치가 있다고 하니 기회가 될 때 읽어봐야겠다. 쉽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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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12
찰스 부코스키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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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속 잔상 세 가지 : 노인(을 돕는다는 것) / (꼬나보는)바퀴벌레 / 개(같은 날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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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 마르크스와 다윈의 저녁 식사
일로나 예르거 지음, 오지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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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마음에 들든 그렇지 않든, 선생님은 이 세계가 물질적 근거에 기반하고 있다고 설명하셨고 마르크스씨는 그걸 자기식으로 풀이했을 뿐입니다.

저는 선생님이 이 마르크스라는 자와 함께 그 사람의 공산주의를 새로이 정돈하실 수 있지 않을까 하거든요. (175)


찰스 다윈(1874년)과 카를 마르크스(1875년) 

source : wikipedia.org



<두 사람>은 세계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두 인물, 다윈과 마르크스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논픽션은 아니다. 가상의 인물 베케트 박사를 통해 두 사람의 삶의 교차점을 조망하는 소설이다. 작가는 두 인물의 시기적인 연관성에 근거해서 베케트 박사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운다. 다윈과 마르크스는 비슷한 시기에 지병으로 고생했고 근거리에 살면서 서로의 저작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의사인 베케트 박사는 두 사람의 주치의로 등장하는데, 소설은  관찰자적 시점으로 사실과 허구를 적절하게 엮어 두 사상가의 성정과 종교적, 사상적 토대를 풀어낸다. 베케트 박사의 생각이 곧 작가 자신이 던지는 질문과 답이라고 봐도 좋겠다. 사실과 허구를 짜 맞추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구멍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영리함도 있다. 두 불온한 사상가, 다윈과 마르크스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대목은 이 소설의 정점이다.



이제 잠시 후면 함께 저녁 식탁에 앉을 손님은 무신론자 둘, 그중 독일인이 하나에 거기에 더해 다른 쪽 장인인 것이 아니라, 무신론자 셋 중에 독일인이 둘이었고 최소 한 명은 공산주의자인 상황이었다. (223)



두 사람은 대화를 많이 나누지 못한다. 진화와 혁명을 대표하는 두 사상가의 만남에서 날카로운 지적 공방이나 긴장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데 온갖 병치레로 체력이 안 따라주기도 하고, 다윈의 표현을 빌자면 한 사람은 영어가 서툴고 다른 이는 독일어를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반대의 성정과 종교에 관한 이견으로 묘한 신경전이 오가고, 순진무구한 안주인이 리드하는 저녁 식사는 웃픈 상황 끝에 어색하게 마무리된다.


입으로 가는지 코로 가는지 모를 식사를 마치고 다윈의 정원에서 산책하는 두 사람. 역시 어색하게 걷기만 할 뿐 별다른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다윈의 정원에서 마르크스는 문득 동상처럼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바로 이 장면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다. 상상해 보라. 한편의 그림이자 시적인 장면으로 가슴 뛰게 하는 연출 아닌가. 원제 역시 Und Marx stand still in Darwins Garten으로 울림이 큰 제목인데 부제로라도 책에 반영이 안 된 건 아쉽다.


전후 전개는 이 가상의 대목을 위해 쓰였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의사인 베케트 박사의 직업 강점을 십분 살려 소설은 두 사상가 사이에 균형을 잡으며 허구적 장치를 소소하게 쌓아간다. 그러다 가장 극적인 대목에서 설전이 아닌 상황 제시로 풍부한 메타포를 만드는 데 이 먼지처럼 쌓인 허구적 장치들이 한몫한다. 이후 먼지처럼 감흥이 흩어져서 문제지만...소소한 긴장감, 소소한 재미로 읽어 볼 만한 소설.



+ 다윈과 마르크스에 관한 사실 정리


1. 두 사람은 겨우 20마일 떨어진 곳에 살았다.

2. 1873년 마르크스는 다윈을 매우 높이 평가하는 헌사를 <자본론>에 써서 그에게 직접 보냈다.

3. 다윈은 감사 인사를 적어 마르크스에게 보냈다.

4. 마르크스는 <종의 기원>을 열심히 읽었지만 다윈은 <자본론>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 다윈은 공산주의 운동에는 관심이 없다시피 했다.

5. 그럼에도 <자본론>은 오늘날까지 다윈의 서재에 그대로 꽂혀 있다. 여전히 전반부 104쪽 까지만 책장이 갈라져 있다.

6. 다윈은 보수적이고 부유한 신사로 자본을 철도 회사에 투자해 재산을 불릴 줄 알았다.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 등 그 어떤 종류의 사회주의적 활동에 부정적이었다.

7. 마르크스는 거친 성정과 저주의 말을 해대는 불같은 성미의 사람이었다. 앵겔스와의 서신을 보면 “개새끼”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8. 다윈과 마르크스는 어릴 때 목숨을 잃은 자식이 여럿 있었다. 특히 가장 아끼는 아이를 잃은 슬픔을 겪었다.

9. 두 사람은 속울렁거림, 기관지염, 편두통, 불면증, 피부병에 시달렸다. 둘 모두 아편을 처방받았다.

10. 두 사람은 생각이 많을 때면 특정한 경로로 걷곤 했다.

11. 무엇보다 둘 다 멋드러진 수염을 가지고 있다. 


+ ‘탈탈 털리다’라는 표현이 원래 관용적으로 쓰이는 표현인지 궁금해졌다. 


+ 작년에 읽고서 이제야 정리를...게으름을 반성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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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 세미나 - 인생을 항해하는 데는 나침반이 필요하다
대니얼 멘델슨 지음, 민국홍 옮김 / 바다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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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요? 오늘이 바로 내일이에요. 

- 영화 <사랑의 블랙홀> 中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서 기상캐스터 필 코너스는 매사 냉소적이다. 그러다 성촉절 취재 차 간 펜실베니아의 펑추토니에서 매일 같은 날을 반복하게 된다. 타임루프의 저주에 빠진 것이다. 즐거운 일탈도 잠시, 똑같은 하루하루가 지겨워 자살도 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심술궂던 필은 차츰 주변에 눈을 돌려 노숙자 노인을 도와주는 등 이웃의 대소사를 살피고 자기개발에도 열중한다. 필에게 매일 반복되는 하루는 이제 늘 같은 오늘이 아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기 보다는 좀 더 나은 자신이 되려는, 어느 지점에서든  어느 시점에서든 출발할 수 있는 여정이 된 것이다. 반복되는 시공을 맴도는 여행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필은 이 모든 것을 버텨내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풍요로운 인간이 되어 마침내 저주에서 벗어난다.



원을 돈다는 것

<오디세이 세미나>는 아버지와 아들이 <오디세이> 텍스트를 나침반 삼아 함께 한 여정을 담고 있다. 저자인 대니얼 멘델슨은 대학에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를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한다. 그리고 저자의 아버지 제이 멘델슨이 이 수업을 청강하면서 부자의 여정은 시작한다. <오디세이> ‘세미나’라고 해서 서사시의 구조나 서구 문명화에 대한 비유와 상징이 넘쳐날 거란 생각은 마시라. 이 책은 미국 어느 중산층 가족의 이야기이자 우리네 삶의 얘기다. 50년 전 지루한 선회를 거쳐 집으로 돌아온 여행 이후로 가장 멀리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한 여행이자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아들의 이야기,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역자는 후기에서 “두 번째 서른이 돼서야 <오디세이>가 인생지침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소회를 밝힌다.


50년 전 꼬마 대니얼에게 아버지는 여행에 관련하여 수수께끼를 낸다. "아무데도 가지 않으면서 어떻게 먼 거리를 여행할 수 있을까?” 정답은 “원을 돈다”이다. <오디세이>의 첫 수식어 ‘폴리트로포스’  polytropos는 회전을 많이 했다는 뜻이라고 한다. 오디세우스는 충분히 방랑한 끝에 고향으로 돌아간다. <오디세이 세미나> 역시 그 원형 原形이 그렇듯 수학자였던 아버지와 문헌학자인 아들의 이야기가 각자의 궤적을 그리다 어느 지점 - 혹은 시점 - 에서 함께 선회하는 원형 圓形 구조를 따른다. 저자는 학생들에게 <오디세이>를 세밀하게 읽으면서 큰 그림은 무엇이고 조그만 것들이 큰 그림에 어떻게 맞아 떨어지는지,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고 가르치는 데 이런 문헌학적 독법과 <오디세이>의 궤적을 따르는 유람선 여행을 통해 멘델슨 부자의 교감은 차곡차곡 쌓인다.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닌 것

<오디세이>는 뮤즈가 원하는 임의의 시점, 혹은 지점에서 시작한다. ‘아무도 아닌’ 한 남자가 트로이 전쟁 후 귀국길에 오른 지도 7년이 지났다.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 아내를 만나는 날이 오기는 할까? 이 남자는 트로이 목마로 그리스군을 승리로 이끈 이타카의 군주 오디세우스다. 이처럼 오디세우스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중요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이름과 유사한 발음처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책략의 대가 오디세우스는 폴리페모스와의 싸움에서 이를 영리하게 써먹는다. 네 눈을 찌른 게 누구냐고 묻는 동료들에게 폴리페모스는 ’아무도 아니야’라고 절규한다. 하지만 도망가면서 자만심으로 신상을 노출하는 통에 ‘아무도 받지 않을’ 저주를 사서 받는다. 그리고 고향으로 가는 데 10년이 걸린다. 


폴리페모스의 동료들이 너를 죽이려고 하는 게 ‘누구냐’고 묻는 것 역시 오디세우스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언어유희라고 저자는 짚어준다. 그리스어로 ‘누구냐’(me tis)는 ‘술책’(metis)과 발음이 같다는 것이다. 하나의 상황에서 참과 거짓이 공존하는 게 가능할까? 세미나를 마치고 <오디세이>의 행적을 좇는 유람선 여행에서 저자는 아버지 제이 멘델슨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고 놀란다. 아들이 보아온 심술 맞고 완고한 노인은 유람선에서 호방하고 트인 노신사가 되어 있지 않은가. 아버지가 1930~40년대 자신감과 영악함, 건방진 행동의 시대를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랑스러운 노인네라는 것을 깨닫고 저자는 정체성은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원의 지점에 따라 달리 보이는 파노라마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루에 한 것

여행을 뜻하는 영어단어 중 ‘journey’는 본디 ‘하루에 한 것’이라는 프랑스 고어 ‘jornee’에서, 궁극적으로는 라틴어 ‘diudrum’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먼 옛날 사람들은 목적지에 도달할 때 도로상의 ‘거리’보다 하루의 이동을 표현하는 것이 편했고, 자연스럽게 하루에 이동한 것이 여정 전체를 나타내는 말로 변했다고 한다.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단어 ‘travel’은 감정의 영역으로, 여행의 고됨을 품고 있다는 것이 무척 흥미롭다. 오디세우스의 이름 Odysseus에 들어 있는 ‘odyne’은 고통이라는 뜻으로 ‘odyssey’는 오랜 방랑과 모험을 뜻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방대한 여행을 떠나는 이에게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죽어도 죽을 수 없는 타임루프의 저주에 빠진 필. <사랑의 블랙홀>의 원제 ‘그라운드호그 데이’ groundhog day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좋지 않은 상황’을 나타내는 관용어가 된 지 오래다. 필은 리타에게 이런저런 수작을 부리지만 호감을 사는 데 매번 실패한다. 하루하루 반복해서 만나는데도 불구하고. 하지만 진정으로 리타를 마주하면서 그녀가 좋아하는 시를 읊고 문학을 이야기하고 여러 가지 자기 계발에 몰두하게 된다. 오늘은 무한히 반복되지 않는가. 어느덧 필은 지성과 예술로 충만한 삶을 살고 사랑도 이루게 된다.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필이 타임루프에서 보낸 시간이 족히 10년 이상은 걸렸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들은 이타카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리스 경제 위기로 전국적인 파업이 일어나는 통에 멘델슨 부자는 여행의 정점이자 최종 목적지인 이타카에 갈 수 없게 된다. 대신 저자가 번역하여 출간한 그리스 시인 콘스탄틴 카바피스의 시 <이타카>를 주제로 조그마한 강연을 연다. 카바피스의 <이타카>는 “도착하지 않는 것의 덕목”을 노래한 시로 예상치 못한 여정을 대신하는 데 있어 탁월한 선택이었다.


항상 당신 마음에 이타카를 유념하라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 너의 최종 목적이라네

그러나 어쨌든 여행을 서두르지는 말게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오 : 

이타카가 당신을 부유하게 만들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고

도중에 획득한 것으로 풍요로운 노인이 되어

그 섬에 닻을 내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오



저자의 말대로 이젠 대중문화 속 상투적 문구가 돼버렸지만 여행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인생의 의미는 인생을 거치면서 일어나는 변화와 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에 달렸다고 저자는 재차 강조한다. 마침내 타임루프의 저주에서 벗어난 필은 펑추토니에 닻을 내린다. 1초도 있기 싫다며 치를 떨던 곳에서 말이다. 멘델슨 부자는 이타카에 가지 못했다. 하지만  나침반은 제 역할을 다했다.


이타카가 형편없다는 것을 발견하더라도 

그녀가 당신을 속인 것이 아니오

당신이 언제인가 많은 경험을 쌓고 현명해질 때

그때서야 당신은 이런 이타카들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멘델슨 부자의 여정을 좇다 어느새 그 원형 原形을 다시 꺼내 본다. 이 그리스 고전은 이번엔 어느 방향으로 가는 나침반이 되어줄까?



#원탁의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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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랑을 일으키는 힘이고 무능력은 사랑을 일으키는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이 사상은 마르크스에 의해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에는 사랑으로써만, 신뢰에는 신뢰로써만 교환하게 될 것이다. 예술을 감상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예술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영향력을 갖고 싶다면, 당신은 실제로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발전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당신의 모든 관계가 당신의 의지의 대상에 대응하는, 당신의 현실적이고 개별적인 생명의 분명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사랑을 일깨우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곧  당신의 사랑이 사랑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만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생명의 표현에 의해서 당신 자신을 사랑받는자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능한 사랑이고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랑에서만 주는 것이 받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선생은 학생에게서 배우고, 배우는 관객들로부터 자극을 받고, 정신분석가는 환자에 의해 -그들이 서로 대상으로 다루지 않고 서로 성실하고 생산적으로 관계한다면- 치유된다.


-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2006





사랑은 사랑을 낳는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무능력은 사랑을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생각은 특별히 마르크스가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인간의 세계에 대한 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을 사랑으로써만, 신뢰를 신뢰로써만 바꾸게 될 것이다. 만약 예술을 즐기려 한다면 예술적으로 훈련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자 한다면, 타인에 대해 진실로 자극을 주고 발전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관계는 의지의 대상에 상응하는 진실되고 개인적인 삶의 명확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삶의 표현'을 통해 자신을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능력이요 불행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랑에서만 주는 것이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선생은 제자들에게 배울 수 있고, 배우는 관객에 의해 자극받으며, 정신병 전문의는 그의 환자에 의해 치료받을 수도 있다. 그것은 그들이 서로를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고, 서로가 진실하고 생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경우에 가능하다.      


- 정성호 옮김, 종합출판범우,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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