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 인공지능을 만든 생각들의 역사와 철학 Editorial Science : 모두를 위한 과학 2
잭 코플랜드 지음, 박영대 옮김, 김재인 감수 / 에디토리얼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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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장은 던져졌다 


손안의 비서 — 시리와 빅스비, 알렉사  와 이야기하고, 허공에 대고 혼자 중얼거리는 이들이 더는 기괴하게만 보이지 않는 요즘이다. 21세기의 세 번째 10년이 시작됐고 사회 전반에서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시대에 돌입하고자 박차를 가한다. 한 대기업에서는 로봇업무자동화 시스템 8대가 249명의 몫을 해낸다. 이는 237명이 연간 총 3만9000시간을 투입해야 하는 업무다. '알 파트장'이라고 불리는 이 인공지능은 사내 네트워크에 정식으로 '동료'로 등록되어 다른 직원과 협업이 가능하다.


알파고가 바둑 명예 9단에 등극하면서 인공지능에서 장밋빛 미래를 보는 이들과 더불어 그 이면을 우려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체스와 달리 바둑에서 기계가 인간을 넘어설 수 없다던 호언장담은 전설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기계의 진화는 어디까지일까? 기계가 스스로 생각하고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의식이란 무엇일까? 이 책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에 손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저자인 잭 코플랜드는 심리철학, 언어철학, 논리학을 주제로 강의하고 글을 쓰는 학자이자 튜링 연구 전문가다. 그가 이 책을 쓴 건 1993년이다. 4반세기 전 인공지능의 현실은 어땠을까? 그리고 다가올 다음 세기를 맞이하며 어떤 전망을 그렸을까? 저자는 컴퓨터가 마침내 체스판에서 인간 정신을 이기는 때가 되면, 하나의 강력한 상징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했다(69). 인공지능 딥 블루가 체스 세계 챔피언을 꺾은 지 20년이 흘러 '알 사범' 알파고는 68승 1패라는 화려한 전적을 남기며 2017년 은퇴했다. 듣도 보도 못한 알파고의 포석은 이제 많은 바둑 기사가 즐겨 쓰는 수법이 되었고 인간 기사들은 알파고의 후배들과 대국 훈련을 한다.


이 책의 원제는 <인공지능: 철학적 입문>이다. 과학과 인문학의 첨병과도 같은 '인공지능'과 '철학'이 제목에 나란히 있는 것을 보라(입문이라는 말은 일단 제처두자). 코플랜드는 직관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이 적용되지 않는 사례들을 들어, 일반적인 사유 방식이 모든 사례에 적용할 수 있을만큼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만, 분명 저자는 평이한 문장으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썼다고 했는데?(데카르트 곱이 대체 뭐지...) 머리속이 혼란하다.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스핑크스를 마주하는 것처럼 긴장과 흥분으로 저자의 논지를 열심히 쫓아가다 보면 십중팔구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만나게 된다. 그렇다, 독자는 사고실험을 해야 한다. 


모든 사고실험에 개념상의 오류는 없다. 그렇다고 근거도 없다. 저자의 말대로 '만약'이라는 거대한 함정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을 뿐. 이 구덩이를 잘 헤쳐갈 수 있을까? 책장을 넘기며 독자는 생각의 지평을 사정없이 늘리고, 쥐어짜고, 거꾸러뜨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도전장은 던져졌다.



생각하는 존재 컴퓨터? 컴퓨터! 


18세기 줄리앙 드 라 메트리가 "인간은 시계다”라고 했을 때 당신은 분노했다. 나를 시계 따위와 비교하다니! 근 2세기가 흘러 '당신은 컴퓨터 같네요'라는 말은 셈이 신속 정확하다는 뜻이며, 당신도 라 메트리 시대와 같은 분노로 치를 떨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 알파고군요!' 2020년의 어느 날 이런 소리에 당신은 '아이고, 아니죠'라며 손사래를 칠 테지만 한편으로 뿌듯해할지 모른다. 나의 지능과 지식은 인간을 넘어선다! 심지어 어떤 이들 — 과학자나 미래학자를 포함하여 — 은 기계가 되기를 원한다.


기계가 생각하는 것이 개념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는 논지는 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는 다시 인간은 생각하는 컴퓨터인가?라고 되물을 수 있다. 4장 '기호체계 가설'에서 특히 잘 드러나는데, 기호 유형이 복합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이론에서 인간의 뇌는 글자 그대로 컴퓨터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컴퓨터를 제외한 인공물은 생각할 수 없다는 강한 기호체계 가설은 SF 영화만큼이나 흥미롭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컴퓨터다(180). 입력 장치와 지식 저장소에 따라 내부 처리와 출력 방식은 꽤 차이가 나겠지만. 


존 폰 노이만은 중앙처리장치에서 순차적 방식으로 과제를 수행하는 컴퓨터를 고안하면서 컴퓨터의 아버지가 되었다. 하지만 부모 세대는 저물고 자식 세대는 변하기 마련 아닌가. 이제 비(non)노이만형 컴퓨터는 병렬 및 분산 처리 방식으로 인간 신경망을 모사하면서 발전하고 있다. 코플랜드는 “100년 안에 컴퓨터라는 단어의 의미가 너무 많이 바뀌어서 뇌를 컴퓨터라 하더라도 반박에 부딪힐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리라” 확신한다(425). 하지만 우리가 언어 공동체로서 컴퓨터라는 '의미'를 끊임없이 다듬어야 하는 의무도 강조한다. 20세기 양자역학의 출현으로 인간 이해 능력과 판단 형식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는 "과학의 진보는 단순히 우리가 새로운 사실을 알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해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느냐 하는 것을 항상 거듭 새롭게 배워나가면서 성취하는 것"이라고 했다. 테세우스의 배(125)를 통해 공동체에서 언어의 합의가 인공지능에 관해 어떤 관념과 개념을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의식의 영역까지 확장한다.


한편 일부 미디어가 인공지능을 다루는 데는 볼멘소리를 낸다. 정보는커녕 오해만 불러일으키는 떠버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능형' 운운하는 미디어의 과대광고 — 이젠 어느 정도 사실이 되어버린 문구 — 에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이는 4차 사업혁명의 물결에 올라탄 우리 역시 명심해야 하는 바다. 이어지는 맥락에서 한스 모라벡의 주장 역시 과장과 속임수의 경계를 오간다고 꼬집는데 코플랜드는 과학자는 책임감을 느끼고 주요 기술혁신이 사회를 어디로 이끄는지 전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211). 어찌 됐든 모라벡의 예측은 현재 빠르게 현실이 되어 가는 듯하다. 2040년(특이점에 근접해 있다!) 모라벡의 예측이 과연 어느 과녁에 꽂힐지 두고 볼 일이다.



똑똑하지만 상식은 없는 친구 


모라벡의 비전에 "공상적인 과장"이라며 날을 세웠어도 코플랜드는 '생각하는 존재'에 대한 개념을 현상학적 구분과 생물학적 구분에서 찾는 것은 잘못이라고 짚는다. "대규모의 적응성"을 바탕으로 행동 지향성을 갖는, 즉 행위 하는 존재는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현재 서로에게,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우리와 가까운 동물에게만 적용하는 용어와 카테고리를 인공물로 확장할지에 대한 결정이다(282).


"최고의 고양이 모형은 고양이다." 사이버네틱스 분야를 창시한 노버트 위너가 한 말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적절한 인간 모형이 될 수 있을까? 앨런 튜링은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려는 시도가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다. 저자도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미션은 확실해졌다. 인간을 잘 알고 싶다면 인간을 닮은 인공물, 인간형 인공지능을 만들어라.


인간의 의식 작용과 거의 일치하는 인공물에는 '생각하는 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까다로운 것이 바로 지식 문제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아는 것이 곧 힘 아니던가. 더글러스 레넛이 주도한 CYC 프로젝트는 백과사전 Encyclopaedia에서 이름은 따왔다. 흥미롭게도 이 프로젝트는 존재론, 인식론, 논리라는 철학 영역에서 가장 큰 열매를 맺었는데 레넛은 CYC를 대규모 "존재론적 공학"이라고 한 바 있다(224). CYC는 심리치료사 일라이자와는 확실히 달랐다. 하지만  레넛이 CYC는 전자 백과사전이 아니라고 강조했음에도 미시세계에서 표식 붙이기를 하는 전문가 시스템의 한계도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의 지식 모델은 색인된 목록이 아니다. 이 똑똑한 친구가 "더 넓고 덜 질서정연한" 세계에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레넛은 지식에는 반드시 그만큼, 아니 그 이상의 상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 상식은 인간이 보기엔 어처구니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CYC를 손수 코딩하는 사람은 마치 그 옛날 라 메트리가 인간을 시계에 비유했던 것처럼 모욕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기호체계 가설에 기반한 CYC는 1994년 일종의 자가학습이 가능한 '교차점'을 지나, 2001년이 되면 인간 수준의 지식을 갖춘 시스템으로 완성되는 데 목표를 두었다. 2001년 목표는 실패했다. 평균적인 성인의 지식을 따라잡으려면 CYC는 적어도 2190년까지 학습해야 한다. 작고 작은 우리의 두뇌가 새삼 신비롭기만 하다.


상식과 더불어 '잊어버릴 줄' 안다는 것 역시 이 신비의 영역일 것이다. 똑똑한 컴퓨터는 인간과 다르게 망각하지 않는다. 강제로 코드를 뽑거나 고장 내지 않는 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컴퓨터와 달리 인간은 기억의 조각들이 떠돌다 느닷없이, 한꺼번에 맞춰지기도 한다. 이 작은 뇌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때때로 착각하고, 실수하고, 잊어버리기도 한다. 특히 '망각하기'는 더 넓고 덜 질서정연한 세계에서 빛을 발하는, 컴퓨터와는 다른 인간 특유의 적응성이다.



기억과 망각 사이


"나의 기억력은 마치 쓰레기 하치장과도 같지요." 

호르헤 보르헤스, <기억의 천재 푸네스> 중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이레네오 푸네스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순간까지도 모조리 기억하는 그는 마치 기호체계 가설의 현신인 양, 글자 그대로 두개골 속에 슈퍼컴퓨터가 들어 있다. 소설의 화자는 푸네스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며 '기억한다’라는 단어는 '신성한 동사'라고 한다. 그리고 이 말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사람 — 이미 죽었지만 —  오직 푸네스 뿐이라고 말한다. 


"칠판에 그려놓은 원, 직각삼각형, 마름모와 같은 것들이 우리가 완벽하게, 그리고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그런 형상들이다. 이레네오에게는 말의 곤두선 갈기들, 언덕 위의 가축떼들, 다른 모양으로 바뀌는 불길, 그리고 그것의 셀 수 없이 많은 재들, 긴 임종의 밤 동안 수없이 바뀌는 망자의 얼굴들을 가지고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그가 하늘에서 한꺼번에 얼마나 많은 수의 별을 보았는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하지만 “시계 같은 푸네스”의 사고 능력에는 회의를  품는다. 푸네스의 기억에는 개념화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푸네스는 정면에서 보는 개와 2/3 지점에서 보는 개가 왜 똑같은 이름을 가져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화자는 이를 두고 푸네스가 플라톤적인 사고, 추론을 할 수 없었다고 회상한다.


"사고를 한다는 것은 차이점을 잊는 것이며, 또한 일반화를 시키고 개념화를 시키는 것이다. 푸네스의 풍요로운 세계에는 단지 거의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세부적인 것들밖에 없었다." 


우리는 정면에서 보든, 측면에서 보든, 다양한 견종을 다른 날에 걸쳐 여러 번 보든 모두 '개'라고 인식한다. 소설의 화자는 독자에게 요청한다. 한 번 들었던 것은 정확하게 반복할 수 없고, 그래서 간접화법으로는 자신이 푸네스를 만나서 느낀 경외감을 제대로 전하긴 힘들겠지만, 부디 상상력을 발휘해달라고. 우리에겐 푸네스 같은 능력이 없다. 그래서 화자의 말을 통해 푸네스의 의식 세계를 상상해 볼 뿐이다. 어쩌면 이 말은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하는 보르헤스의 당부가 아닐까? 


보르헤스는 책을 제외한 모든 매체가 인간 육체의 확장이라고 했다. 현미경은 시력을, 전화기는 목소리를 확장한 것이다. 하지만 책은 상상력의 확장이라고 했다. 시력을 잃은 그가 시각이 지배적인 매체인 책을 인간 지성과 상상력의 확장이라고 꼽은 것은 어떤 의미일까? 보르헤스는 자신이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기억 속에 산다고 했다. 우리는 과거 속에 존재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누구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인간은 모든 것을 기억하거나,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존재가 아니며 그 중간, 기억과 망각 사이에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상상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제 인공지능 연구는 모 아니면 도인 아버지 세대를 지나 병렬분산처리(PDP) 방식으로 거듭 성과를 내고 있다. 20세기에는 민달팽이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지만, 산발적인 병렬 활동은 역치를 통해 ON과 OFF 사이를 무수히 오가며 놀라운 학습 능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PDP 역시 우리의 작은 뇌를 희미하게 비출 뿐이다. (개념적으로)생각하는 기계는 과연 상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우리 감각의 지향점


인공지능 연구의 첫 황금기인 1960년대. 미디어학자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는 인간 육체의 확장뿐 아니라 정신의 확장이라고 했다. 차기 미디어가 무엇이 되건, 의식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맥루언은 ‘지구촌'의 개념을 이야기하면서 전자 기술은 인간 중추신경계의 연장이며 지구의 집단적인 신경 회로가 24시간 돌아가면서 준지각력이 있는 무형의 거대 메타 커뮤니티라고 정의했다. 또한 "너무 많은 정보를 접하게 되면 사람들은 곧바로 패턴을 찾아내서 이를 구조화하려 한다. 예술가의 일은 패턴을 찾는 것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구조화를 '네트워크 하기'로 이해하면 이는 빅데이터의 정보 처리 방식과 다름없다. 맥루언의 비전은 초고속 인터넷의 등장으로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초연결 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의 생활 패턴은 사람이 아닌 빅데이터로 재구성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맥루언의 신묘한 통찰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이 같은 비전을 그렸냐는 것이다.


맥루언의 주장은 과학적 방법과는 거리가 먼 것이기에 충격을 넘어 광대, 사기꾼이라는 비웃음까지 샀다. 그는 시골 출신(캐나다는 당시엔 그야말로 깡촌이었다.) 영문학자고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중세 종교 개혁의 문건,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 모더니즘의 수사학 등을 연구해서 다음 세기 미디어의 전망을 예측했다. 같은 맥락에서 코플랜드의 고찰을 눈여겨봐야 할 이유다. 독자는 책장을 넘기며 고대(그리고 외계의) 수수께끼와 여러 사고 실험으로 머리를 싸매게 된다. 저자는 책의 원제처럼 인공지능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분석한다. 이 책의 독법은 인공지능 기술이 아닌 ‘인간’을 좀 더 잘,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사고 과정이다.


조지프 와이젠바움은 심리상담 프로그램 일라이자를 만들고 뜻하지 않은 효과에 의문을 품는다. 왜 인간을 모델로 하는 인공지능을 만들어야만 할까? 아이처럼 유년기가 있고 언어를 배우면서 자신의 기관으로 세계를 감각해서 궁극적으로 인간 사유의 전 영역을 고려하는 로봇을 왜 만들어야 하는지 말이다(52). 우리는 기술 진보를 향해 달려가는 것뿐 아니라 왜 그래야 하는지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인간이 생물학적 표본으로 인간 존재를 더 잘 이해하고, 삶을 가치 있게 하고, 시대에 따른 개념 구조를 공동체의 합의로 끊임없이 다듬어가는 것이 인공지능 연구의 바탕이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초연결, 빅데이터, VR/AR 등 미래 기술이 사방에서 화두인 요즘이다. 너도나도 5G 시대를 선도한다고 외쳐댄다. 사회가 기술 진보를 쫓아 숨 가쁘게 달려가는 한편 지능형, 스마트 운운하는 떠버리 미디어에 현혹되지 말라는 코플랜드의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최소한 알맹이와 쭉정이를 구분하기 위해 우리의 눈과 귀가 머물 곳은 어디일까? 맥루언은 <미디어는 마사지다>에서 말한다. “우리는 백미러를 통해 현재를 본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뒷걸음질한다." 포스트휴먼 시대에 인공물과 공생을 넘어, 상생의 시대를 맞고자 하는 인류가 되새겨 볼 만한 말이다. 



#원탁의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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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서 인상적인 묘사 중 하나.

팡글로스는 온통 부스럼이 나고 퀭한 눈에 코끝은 문드러지고 이는 새까만 거지꼴이 되어 캉디드와 재회한다. 그 고상하던 철학자가 처참한 몰골로 지독하게 기침을 해대며 그때마다 번번이 이를 뱉어 내다니! 한데 저 몰골이 되고도 여전히 예정조화설을 신봉하며 장광설을 늘어놓으니 측은하기보다 우스꽝스러워 실소가 절로 난다. 아, 볼테르는 어쩜 이렇게 글을 재밌게 썼을까! 팡글로스는 당시 유럽에 퍼져있던 마구잡이식 낙관주의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교수형에 열십자 절개 등 온갖 시련을 겪고도 대철학자 팡글로스는 '예정 조화'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멋진 개념이기 때문에 부인하지 않겠다고 강변한다. "모든 것은 언제나 최선을 향해 나아간다."        


처음엔 열린책들로 읽었는데 다른 판본도 몇 가지 읽어보니 저 대목, 사랑의 원인과 결과 및 충족 이유로 불쌍한 지경이 된 팡글로스를 묘사한 번역이 살짝 다르다. 특히 팡글로스가 기침으로 괴로워하면서 그때마다 이를 뱉어낸다/침을 뱉어낸다 두 가지 번역으로 나뉘는데 부북스와 열린책들은 이를 뱉는다고 쓴 반면 문학동네, 한울 등 다른 몇몇 판본은 침을 뱉는다고 표현했다.



불어

Le lendemain, en se promenant, il rencontra un gueux tout couvert de pustules, les yeux morts, le bout du nez rongé, la bouche de travers, les dents noires, et parlant de la gorge, tourmenté d'une toux violente, et crachant une dent à chaque effort.


영어(구텐베르크)

The next day, as he took a walk, he met a beggar all covered with scabs, his eyes diseased, the end of his nose eaten away, his mouth distorted, his teeth black, choking in his throat, tormented with a violent cough, and spitting out a tooth at each effort.


영어(펭귄 드롭 캡스)

The next day, as he was taking a walk he met a beggar covered with sores; his eyes were lifeless, the tip of his nose had been eaten away, his mouth was twisted, his teeth were black, his voice was hoarse, he was racked by a violent cough, and he spat out a tooth with every spasm.


한글(열린책들)

다음날 그는 산책길에 한 거지를 만났다. 그의 몸은 종기투성이였고 눈은 푹 꺼진 데다 코끝은 문드러지고 입은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게다가 이빨은 온통 새카맣고 말을 할 때면 코를 킁킁거리고 때로 지독하게 기침을 하였는데 그때마다 이빨을 한 개씩 뱉어내었다. 


한글(문학동네)

다음날 캉디드는 산책을 하다가 거지 하나를 만났다. 그 거지는 종기가 잔뜩 나고 눈빛은 퀭하고 코끝은 빨갛고 입은 비뚤어지고 이빨은 누렇고 목구멍에서 그렁그렁 소리가 나고 심한 기침으로 괴로워하더니 그때마다 침을 뱉어냈다.



불어 crachant는 잘 모르겠지만, 영문 spit은 자동사로 쓰인 것 같지 않은데 왜 한글 번역은 두 가지로 갈리는 걸까? 외형 묘사는 의역이라고 본다면 이해가 되지만(그래도 시꺼먼 이와 문드러진 코끝이 더 극적이긴 하다) 이를 뱉는 것과 침을 뱉는 건 차이가 있는데. 연민과 두려움을 자아내는 지경이라면 더더욱. 하기야 불영 번역도 역자마다 다를 테니 두 불영 번역을 갖고 비교하는 건 무리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볼테르라면 이를 뱉는다고 표현했을 거 같다. 


극적인 표현이 다소 아쉽긴 해도 ‘에덴동산’과 ‘정원’의 상관관계를 살린 번역과 <미크로메가스>가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 끌려 문학동네 버전을 종이책으로 구매했다. 간결하고 강렬해서 술술 읽히는 <캉디드>. 난 이런 밑도 끝도 없는, 하지만 촌철살인을 날리는 블랙 유머가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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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칼 폴라니를 알고 있었던 건 아니다. 사회적경제 관련하여 보다가 KPIA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나에게만) 생경한 경제학자와 관련한 협동조합이 한국에 있다니 신기하기도. 그나마 아는 경제학자라곤 케인스와 프리드먼(그리고 마르크스) 정도인데 사실 이름이나 알 뿐 사상에 대해서, 아니 이 영역 자체에 무지렁이인 나는 ‘경제'라는 것도 나와는 먼 이야기 같다고나 할까. 그래도 이제라도 관심을 가져볼까 싶던 차, 당초 잡혔던 일이 어그러지는 통에 지난 달 칼 폴라니 북 토크에 갈 수 있었다. 합스부르크 딜레마, 악마의 맷돌, 기독교 사회주의, 자유주의적 유토피아를 키워드로 다루었는데  얕게나마 머리에 있는 내용을 총동원, 되새김을 위해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폴라니는 시장을 혐오한 것이 아니라 경제 원리로써 시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을 혐오했다. 시장이란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이윤이 아닌 쓸모를 위한 생산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자신의 결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자유의 장이어야 한다는 것이 폴라니의 주장이다. 자기조정적 시장은 허구적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장경제 외에도 3개 이상의 경제 패턴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결합도 가능하다고 여겼다. 산업자본주의 사회 이전, 고대 그리스나 아프리카 다호메이 왕국의 체제가 경제적 합리성에 더 부합한다고 보았고 여기에서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경제 질서를 찾고자 했다. 

 

노동, 토지, 화폐가 상품화되고 자본이 권력이 되어버린 19세기 이후의 자기조정적 시장에서는 필연적으로 이중운동(Double Movement)이 나타나게 된다. 사회 전체가 시장의 자기조정에 맞춰 재구성되는 한편, 사회가 자기 방어적인 대항 운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국가에 관해서도 이러한 견해를 엿볼 수 있는데, <거대한 전환>에 따르면 국가는 시장을 사회에서 분리, 자기조정적 시장질서로의 재편을 허용하면서도 제도를 통해 사회의 자기보호 운동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폴라니는 단 한 사람이라도 개인의 비참함을 그 자신이 떠안고 가야 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으며 사회가 경제를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제2 인터내셔널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접한 폴라니는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했지만, 초기 마르크스 사상에 흠뻑 빠졌고 이에 기반한 기독교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지역주의적 대안을 추구하였다. 너와 나의 좋은 삶이라는 관점으로 개인을 경제적인 인간관(Homo Economicus)으로 보지 않았다. 개인과 공동체는 대립적인 관계가 아닌 상보적인 관계이며 모든 인간은 구원받아 마땅한 영혼을 가진 존재라고 보았다. 따라서 한 개인을 움직이는 것은 그 영혼을 움직이는 것이며 이는 사회제도나 정치체제가 아닌 도덕적 원리의 고양으로 이뤄진다고 믿었다. 



폴라니의 삶은 찌질함의 연속이었다고 홍기빈 박사는 반 농담으로 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꿋꿋이 지켜나간 한 인간으로서 그의 '왼편의 삶'은 가치가 있다고 하니 기회가 될 때 읽어봐야겠다. 쉽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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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12
찰스 부코스키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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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속 잔상 세 가지 : 노인(을 돕는다는 것) / (꼬나보는)바퀴벌레 / 개(같은 날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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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 마르크스와 다윈의 저녁 식사
일로나 예르거 지음, 오지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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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마음에 들든 그렇지 않든, 선생님은 이 세계가 물질적 근거에 기반하고 있다고 설명하셨고 마르크스씨는 그걸 자기식으로 풀이했을 뿐입니다.

저는 선생님이 이 마르크스라는 자와 함께 그 사람의 공산주의를 새로이 정돈하실 수 있지 않을까 하거든요. (175)


찰스 다윈(1874년)과 카를 마르크스(1875년) 

source : wikipedia.org



<두 사람>은 세계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두 인물, 다윈과 마르크스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논픽션은 아니다. 가상의 인물 베케트 박사를 통해 두 사람의 삶의 교차점을 조망하는 소설이다. 작가는 두 인물의 시기적인 연관성에 근거해서 베케트 박사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운다. 다윈과 마르크스는 비슷한 시기에 지병으로 고생했고 근거리에 살면서 서로의 저작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의사인 베케트 박사는 두 사람의 주치의로 등장하는데, 소설은  관찰자적 시점으로 사실과 허구를 적절하게 엮어 두 사상가의 성정과 종교적, 사상적 토대를 풀어낸다. 베케트 박사의 생각이 곧 작가 자신이 던지는 질문과 답이라고 봐도 좋겠다. 사실과 허구를 짜 맞추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구멍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영리함도 있다. 두 불온한 사상가, 다윈과 마르크스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대목은 이 소설의 정점이다.



이제 잠시 후면 함께 저녁 식탁에 앉을 손님은 무신론자 둘, 그중 독일인이 하나에 거기에 더해 다른 쪽 장인인 것이 아니라, 무신론자 셋 중에 독일인이 둘이었고 최소 한 명은 공산주의자인 상황이었다. (223)



두 사람은 대화를 많이 나누지 못한다. 진화와 혁명을 대표하는 두 사상가의 만남에서 날카로운 지적 공방이나 긴장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데 온갖 병치레로 체력이 안 따라주기도 하고, 다윈의 표현을 빌자면 한 사람은 영어가 서툴고 다른 이는 독일어를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반대의 성정과 종교에 관한 이견으로 묘한 신경전이 오가고, 순진무구한 안주인이 리드하는 저녁 식사는 웃픈 상황 끝에 어색하게 마무리된다.


입으로 가는지 코로 가는지 모를 식사를 마치고 다윈의 정원에서 산책하는 두 사람. 역시 어색하게 걷기만 할 뿐 별다른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다윈의 정원에서 마르크스는 문득 동상처럼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바로 이 장면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다. 상상해 보라. 한편의 그림이자 시적인 장면으로 가슴 뛰게 하는 연출 아닌가. 원제 역시 Und Marx stand still in Darwins Garten으로 울림이 큰 제목인데 부제로라도 책에 반영이 안 된 건 아쉽다.


전후 전개는 이 가상의 대목을 위해 쓰였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의사인 베케트 박사의 직업 강점을 십분 살려 소설은 두 사상가 사이에 균형을 잡으며 허구적 장치를 소소하게 쌓아간다. 그러다 가장 극적인 대목에서 설전이 아닌 상황 제시로 풍부한 메타포를 만드는 데 이 먼지처럼 쌓인 허구적 장치들이 한몫한다. 이후 먼지처럼 감흥이 흩어져서 문제지만...소소한 긴장감, 소소한 재미로 읽어 볼 만한 소설.



+ 다윈과 마르크스에 관한 사실 정리


1. 두 사람은 겨우 20마일 떨어진 곳에 살았다.

2. 1873년 마르크스는 다윈을 매우 높이 평가하는 헌사를 <자본론>에 써서 그에게 직접 보냈다.

3. 다윈은 감사 인사를 적어 마르크스에게 보냈다.

4. 마르크스는 <종의 기원>을 열심히 읽었지만 다윈은 <자본론>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 다윈은 공산주의 운동에는 관심이 없다시피 했다.

5. 그럼에도 <자본론>은 오늘날까지 다윈의 서재에 그대로 꽂혀 있다. 여전히 전반부 104쪽 까지만 책장이 갈라져 있다.

6. 다윈은 보수적이고 부유한 신사로 자본을 철도 회사에 투자해 재산을 불릴 줄 알았다.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 등 그 어떤 종류의 사회주의적 활동에 부정적이었다.

7. 마르크스는 거친 성정과 저주의 말을 해대는 불같은 성미의 사람이었다. 앵겔스와의 서신을 보면 “개새끼”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8. 다윈과 마르크스는 어릴 때 목숨을 잃은 자식이 여럿 있었다. 특히 가장 아끼는 아이를 잃은 슬픔을 겪었다.

9. 두 사람은 속울렁거림, 기관지염, 편두통, 불면증, 피부병에 시달렸다. 둘 모두 아편을 처방받았다.

10. 두 사람은 생각이 많을 때면 특정한 경로로 걷곤 했다.

11. 무엇보다 둘 다 멋드러진 수염을 가지고 있다. 


+ ‘탈탈 털리다’라는 표현이 원래 관용적으로 쓰이는 표현인지 궁금해졌다. 


+ 작년에 읽고서 이제야 정리를...게으름을 반성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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