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게 버림받고
엄마까지 병으로 잃은 한지는 보육원으로 가야 하는 현실과 마주치는 순간, 할머니의 등장으로 안도의 숨이 내어진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할머니와 단둘이 떠난 제주도여행은 한지의 환상을 모두 깨부시고 만다.
"나 할머니랑 살기
싫어요."
새파란 바다에 시선을
던진 채 말했다. 파도가 날 심키는 상상을 하며,
"그럼
어쩌려고?"
"보육원에서 살아야죠.
아빠도 그랬는데 나라고 못할까 봐요?"
할머니는 말이 없었다.
파도 소리만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땐 나도 어렸어.
그래서 힘들었고. 나중에는 면목이 없었고."
할머니가 뒤늦게 입을
뗐다. 어렸다, 힘들었다, 면목이 없었다…….
할머니가 그 말들을
어떤 뜻으로 이야기하는 건지 선뜻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긴 세월을 후회했어.
이젠 후회하고 싶지 않아."
할머니는 정말
제멋대로다. 아리송한 말들을 마음 내키는 대로 내뱉는다.
"너랑 살고 싶어서
왔어. 나는 너 보는 순간 마음에 들었는데,
넌 내가 싫은가
보구나?"
《코딱지가 닮았다》
21~22쪽
혼자가 된 한지는,
버림받고 남겨진 처지로 할머니를 만난다. 한지의 아빠를 버리고 떠날 수 밖에 없었던 한 아이의 엄마였던 그녀가 할머니가 되어 한지 앞에 선다.
자식을 버린 그 순간부터 혼자 남겨진 손녀를 스스로 거두기 위해 며느리의 장례식장으로 들어선 그 순간까지 할머니의 가슴 속은 얼마나 뭉개져
있을까? 부모의 보살핌이 끝나는 순간을 맞이해야 했던 한지는 그 동안 얼마나 외롭고 추웠을까? 버린 자와 남은 자 그리고 가족, 그 이름으로
만나게 된 한지와 할머니의 이야기는 한지의 투덜거림에서 작은 반란 그리고 통쾌한 웃음으로 두 사람의 내일을 기대하게 만든다.
십대는 물론이고,
나이를 제한하지 않고 자신의 몸매를 드러내는 것을 자신의 또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남자친구에게 S사이즈 스키니진을 선물받고 급다이어트에
돌입한 나는 나날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입고 가기로 한 수련회날은 점점 다가오고. 절친에게도 뾰족한 말이 거르지 않고
나와버리고.
"이게 정말! 더는 못
참아!"
나는 스키니진을
양손으로 잡고 힘껏 당겼다.
그랬더니 스키니진이
'드드득' 소리를내며 종아리 부분까지 찢어졌다.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스키니진을 향한 원망이 뭐든 찢어 버리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늘어나지도 찢어지지도 않을 것처럼 튼튼해 보이던 스키니진이 맥없이 반으로
찢어져 버리다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이깟 녀석 때문에 내가 그렇게 고생을 했단 말이야? 억울했다. 나는 찢어진 스키니진을 노려보며 다시 손에
힘을 줬다. 그러자 멀쩡했던 부분도 결을 따라 쭉 찢어졌다.
"어라? 한 번 해
보자, 그래!"
《스키니진 길들이기》
42쪽
남자친구가 선물한
스키니진을 입고 예쁘게 짠!하고 보여주기 위해 다이어트를 선언한 나. 청소년기에 가장 예민한 이성친구와 외모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를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한 이야기이다. 배고픔과 자존심, 친구를 잃을 것만 같은 불안감이 터지듯, 스키니진이 터질 때 나와 함께 내
마음도 후련해져온다. 얼마나 속이 시원하던지, 옷에 나를 맞추지 않는, 나를 옷에 맞추는 당당함이 나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가족은 때로 어깨를
누르고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존재가 되는 경우가 있다. 아리는 아빠의 외도로 쓰러진 엄마를 간호하면서 아빠로 인해 받은 상처를 상대의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갚아줄 작전을 짜고 그 날만을 기다린다. 무책임한 아빠와 새로운 여자친구. 두 사람의 사랑이 남은 가족들에게는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
돌아보지 않는 무책임에 아리는 더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이다.
"야! 너 말이면
다냐? 너희 엄마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고?
지랄하네.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멍하니 창밖만 보는 엄마 지켜보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해? 대답하지 않을 걸 알면서 말 거는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지
아냐고!" [중략]
"미안. 난 그런 뜻이
아니라……." [중략]
순간 지금 여기서 내가
뭘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내 미션은 순조롭게
진행된 듯했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이 빠진 접시처럼,
뒤틀린 뚜껑처럼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그래, 한마디로 영
'폼'나지 않았다.
적을 응징하는 영웅처럼
혼내주고 당당히 박차고 나가는모습을 상상했는데
일기장을 빼앗아 찢고,
머리를 잡아 당기고, 뒹굴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모든게 엉망이었다.
"에휴."
절로 한숨이 나왔다.
《라면 먹기 좋은 날》
86쪽
부모에 대한 미움으로
자신을 버리는 일에 기꺼이 동참하게 된 아리 그리고 미움으로 자신안에 갇힌 은혜. 두 소녀의 아픔은 서로 다르게 표현하고 있지만, 라면이라는
아주 간단하고 짜고 매운 자극적인 음식으로, 젓가락질 한번으로 후루룩 입안에 가득 메운 면발을 넘기면서 그들의 미움과 원망이 속을 훑고
지나간다. 오늘이 지나면 그들의 응어리도 그렇게 시간 속을 훑고 지나가기를 바래본다.
남과 섞이지 못하는,
그래서 점점 혼자의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그것을 '선택'이란 단어안에 넣어 스스로 고립을 자처한 것으로 위로받은 많은 아이들과 청소년시기의
나. 혼자일 수 밖에 없는 그들의 모습을 그려낸 ≪피에로는 날 보며 웃지≫를 읽으면서 마음이 한 켠이 아려온다. 그의 외로움이 글로 충분히
전해져오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혼자의 시간이 너무 길어지는 건 아닌가 두려웠다.
나는 누구를 만나도
먼저 입을 열지 않는다.
답답한 상대가 말을
걸어도 짧게 대꾸할 뿐이다.
자연스럽게 상대와 나
사이엔 침묵이 자리 잡는다. 침
묵의
무게는모두룰질식시켜 버릴 만큼 무겁다. 침
묵은 언젠가
다뮤멘터리에서 본 바다 속 까맣고 깊은 구덩이와 닮았다. 모
든 걸 삼켜 버릴 듯
검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구덩이
나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은나에게서 검은 구덩이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늘지고 눅눅한, 기분
나쁘고 무서운 블랙홀을.
그래서 나는 자연스레
혼자가 됐다.
≪피에로는 날 보며
웃지≫ 104쪽
서로의 상처, 서로가
가리고 싶은 상처를 알려도 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순간에 혼자라는 공간에서 한 걸음 나설 수 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초대된 새로운
공간에서 그는 당당하게 걸음을 옮겨본다. 그것이 세상을 향해 처음으로 내딛는 첫걸음이라면, 그의 혼자는 이제 함께가 될 수 있고, 어둠으로만
보인 세상에 한 줄기 빛이 되어 세상을 볼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해 줄 것이다.
『파란 담요』는
청소년기에 한번쯤은 들어봤고,겪어봤을 소재를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어떤 소재가 되었든 가리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담대함이 있는가 하면, 그
어느 것도 얕거나 깊게가 아닌 정한 딱 그 만큼만에서 인물들을 묘사하고 표현했다. 독자의 감정 또한 깊이 빠져들어 허우적거리기 전에
건져올려주고, 살짝 발담그는 순간 시원한 물의 감촉을 느낄 수 있도록 과감하게 파도를 밀어보내준다.
《크리스마스에 N을》
읽으면서 우리 주위에 있는 소수자의 삶을 생각해본다. 얼마 전 커밍아웃한 홍석천의 어머니께서 그러셨다.
"그걸 왜 세상에 다
말해서.
혼자 알고 있었다면
사람들은 결혼을 안 하나보다 생각했을 텐데"
그렇다. 그는 왜 말을
해서 스스로 구덩이를 팠을까?
홍석천은 힘들어서
말했다고 한다. 모든 이를 속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앤은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앤과 대화하며 나는 그녀의 콤플렉스가 내가 짐작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종류의 것임을 알게 됐다.
앤은 자신의 성별이
싫다고 했다.
그럼 여자를 좋아하는
거냐고 물으니 그건 또 아니라고 했다.
강제로
주어진 삶 말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은 뿐이야.
앤의 알쏭달쏭한 말을
들으며, 나는 앤이 얼마나 힘든 때를 보내고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앤의 아빠는 예쁘게 화장하고, 근사하게 차려 입은 앤을
인정하지 않았다. 가장
자기다운 모습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
그것만큼 힘든 일이
어디 있을까?
《크리스마스에 N을》
125쪽
우리는 누구도 그들의
겪었을 마음의 짐을 모른다. 세상에 공표하는 순간의 그만을 두고 왈가왈부한다. 그 누구의 선택이 아닌 것을 두고 우리는 함부로 말할 수 없으며,
공감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그들을 기만하는 것이다. "앤"은 아빠로부터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배척당할 때 얼마나 비참하였을까. 아빠의 가슴을
울리고 마는 상처는 서로의 입장의 간극이 너무나 크기에 우리는 섣불리 발을 들일 수 없는 이야기를 담은 《크리스마스에 N을》 통해 그들이 겪었을
아픔으로 한 발 다가선 느낌이다.
마음을 한없이 울린
《파란 담요》
두 형제를 누가 이렇게
만들었을까. 누구에게 허락을 받고 그들을 나약한 자로 만들어버렸을까. 부모에 대한 미움이 서로를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는 형제, 정작 그들은
자신의 가슴에 있는 사랑받고 싶은 간절함을 보지 못한다. 상처에 상처가 더해서 처음에 무엇에 의해 생겨난 상처인지도 모르게 말이다.
쓰러져 있는 사람이
형이 아니었으면 했다. 하지만 형의 목소리를 듣고 말았다.
갑자기 울컥 울음이
나왔다.
형은 그동안 내가
누군가에게 맞고 있으면 대신 싸워줬다.
"우리 형, 때리지
마!"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버럭 큰 소리가 나왔다.
[중략]
"으아아아아악!"
나는 담요를 꼭 쥐고
덩치들을 향해 달려갔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움켜쥐었지만 잽싸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쓰러져 있는
형을 껴안고, 담요를 뒤집어썼다.
덩치들이 내 등을 마구
밟아댔다.
어찌나 아픈지 등뼈가
다 부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바보 같은
놈"
형이 조용히 말했다.
나는 담요를 쥔 손에 꾹 힘을 주었다.
《파란 담요》
159쪽
파란 담요 속에 들어가
세상이 둘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드는 발길질을 온전히 받아내는 형제의 모습이 가슴아프다. 그들의 세상은 어떤 빛일까. 그들을 세상 속에 섞이지
못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형제는 파란 담요 속에서 헤쳐나올 수 있을까. 형이 동생에게 말한 "바보 같은 놈"에서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세상에게,
부모에게, 친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을까. 자신을 보호하겠다고 달려온 힘없는 동생조차도 끌어안는 자신에게, 미움 때문에 미움만 키워온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을까.
『파란 담요』는 청소년
소설이라고 이름하기엔 아쉬움이 크다. 여전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이고, 우리의 실수가 다음 세대들의 마음 속에 미움과 원망, 나약함과
외로움을 키워놓고 있기 때문이다. 『파란 담요』에 등장하는 여섯 명의 아이들은 나의 아이이고, 아이의 친구이다. 소설 속의 허구라고 단정짓기엔
현실적이고 사실적이기에 우리는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주고, 방관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기회를 안겨준다.
어른이 내뱉은 상처와
버림에서도 꿋꿋하게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이 이야기 『파란 담요』. 허약하고 소심하고 자신의 상처에 당당하지 못한 여섯 명의
아이들이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신을 세워나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읽을 수 있다. 쓰러지고 싶을 때, 나를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올 때, 누군가의 위로가 간절히 필요할 때, '나' 라는 존재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잊지 말라고 한다. 내가 있는 그 자리를
버티고 있는 그 힘이 나를 다시 세워줄거라는 믿음을 놓지 않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