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미스터리 2025.겨울호 - 88호
박광규 외 지음 / 나비클럽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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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추리소설

《계간 미스터리》

2025 겨울호, 통권 88호

나비클럽


사람이 사람을 해치는 것만큼 끔찍한 것은 많지 않다. 감정이 격해져 서로 욕설을 주고받거나, 과하게는 서로 멱살을 잡을 수도 있다. 물론, 타인에게 가하는 물리력(정당방위는 제외)은 이유 불문하고 지양해야 한다. 하지만 타자의 생명을 끊어낸다는 것은 복수라는 이유가 있어도 지지하기 어렵다. 체계와 법을 무시한 행위는 비수가 되어 결국 내 심장에 박히기 마련이다. 또한, 인간사에서 살인을 정당화할 만큼 정의라는 개념이 완벽하게 정립되지 않았다. 타인의 숨을 멈추게 할만한 일의 정도는 80억 인구만큼 다양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는 너무도 터무니없을지도 모르고, 어떤 이유는 합당하지만 과하게 잔인할지도 모른다. 정당한 방위는 있음이 분명하나, 정당한 살인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급박한 상황에서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주거에 불법으로 침입한 괴한을 살상하는 것은 당연히 의도가 없었기에 정당한 방위라고 볼 수 있다.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안전해야만 하는 공간에 동의 없이 쳐들어온 것이니까. 복수는 분명 잘못된 행동이다. 범법 행위로 해당 인물을 처단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러한 행위는 나에게도, 남아있는 가족에게도, 나아가서 사회에도 큰 물의를 일으킨다.

나는 추리소설을 읽을 때 역설적으로 추리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누가 범인인지, 어떤 트릭을 사용했는지는 곁가지일 뿐 크게 중요하지 않다. 너무 말이 되지 않는 게 아니라면, 조금은 어설퍼도 그 나름의 시도에 박수를 보낸다. 내가 평생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존경심이 샘솟는 것이다. 하지만, 동기는 다르다. 살인이라는 행동을 촉발한 원인이 적절하지 못하면 아무리 대단한 속임수와 추리가 동반된다고 해도 흥미를 잃게 된다. 명탐정 코난이라는 만화는 어느새 살인 동기보다 속임수와 추리에 중점을 맞추었다. 사람의 숨을 강제로 거두게 한 동기로는 도저히 공감이 생기지 않았다. 추리소설에서 필연적인 타인의 생명을 끊는 일이 단순 아이템이 되어버린 것에 경악했다. 사회적 메시지도, 개인의 철학도, 문학적 통찰도 없이 특이하게 죽이고, 참신하게 풀어내기만 하는 것을 미스터리라고 부르고 싶진 않다.

한국 추리소설의 발전

계간 미스터리를 읽은 지 벌써 1년이 흘렀다. 그 흔한 셜록 홈스도 탐독한 적 없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 두어 편을 읽은 게 전부라 미스터리 장르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긴 호흡과 답답함 그리고 동기와 수법이 이해되지 않아 이 장르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단편 미스터리는 내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평소 고전 단편 소설의 맛에 집착하는 만큼 이것 또한 새롭게 맛있게 잘 차려진 단편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배경도 한몫했을지도 모른다. 익숙한 배경과 상황, 말투 그리고 동기와 수법까지 전부 한국적이다. 있을 법한 감정선이 소설에 더 동화되게 만든다. 마치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 같은 느낌이다. 앞으로도 많은 초단편과 단편 추리소설이 줄지어 나오길 기원하고, 한국의 추리소설을 기대한다.

나비클럽의 실행하기 어려운 실험적인 도전을 열열하게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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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걷는 사람들
김희영.류정희 지음 / 담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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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든

떠나는 삶

《천천히 걷는 사람들》

김희영 원작 / 류정희 그림

담다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여태 모아둔 돈으로 시골에 작은 집 하나 장만해서, 편의점이든, 작은 카페든, 밭일이든 뭐든 하며 입에 풀칠만 하면서 글 쓰며 사는 삶을 꿈꾼다. 그러나 서울에 남은 가족, 연인, 친구, 지인을 핑계로 실행에 옮기진 못한다. 평생 혼자 살 수는 없겠다는 불안감이, 나를 좀먹는다.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그 일에 치이며 좀 더 쉬운 일을 찾아 헤맸다. 막상 찾아온 좋은 기회에도 정신은 점점 나약해지고, 불만을 찾아낸다. 하기 싫은 이유가 쉼 없이 튀어나오고, 쓸데없는 고민과 혐오가 줄지어 흘러나온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왔고 또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 정답을 바라지 않는다. 인간사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고, 비교적 수월하게 남들보다 못하게 산다고 해서 마냥 행복하고, 늘 불행한 것은 아니니까. 그저 나만의 뜻을 찾는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으로 갈 것인가. 적어도 지금과 같은 인생은 아니다.

속초, 강릉, 삼천포, 해남, 제주도 등 알아본 곳은 참 많다. 구매할 집까지 물색했다.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원하는 인생을 쟁취할 수 있다. 30대 초반의 남자가 모든 걸 버리고 시골로 향하는 삶은 타인의 흥미를 자극하기 나쁘지 않은 설정이다. 그것으로 유튜브도 시작하고, 글도 작성한다. 새로운 경험으로 색다른 소설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대체 무엇이 두려운 걸까. 한가지 때문이 아니다. 복합적인 두려움이 실행을 멈추게 만든다. 금전적인 부담과 시행착오 그리고 내 사람들의 관계와 본질적인 고독이라는 복합적인 두려움. 아마도 터지기 일보 직전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떠나지 않을까. 남들과 똑같은 삶, 평생 비교하는 인생, 그 무수한 자조적 생각들을 뒤로한 채 천천히, 천천히 걷고 싶다.

···

하루에도

떠나고 싶다는 욕망과 떠날 수 없다는 결핍이 창작의 연료가 된다. 평생 떠나지 못하는 상태로 정신적인 괴로움이 증폭되었을 때 간헐적인 여행으로 식견을 넓히며 해소를 반복하는 것이다. 빽빽한 공간에서 고즈넉한 장소를 그리워하고, 그 녹색의 또 갈색의 풍경을 떠올리며 하루하루를 더 소중히 연소한다. 가끔은 벗어나지 못함을 실체 없는 대상에 하소연하고, 원망하기도 한다. 다시금 직시한 현실은 생각보다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묵묵히 걷는다. 언젠가는 이라는 기약 없는 희망은 그 어떤 사탕보다 달다. 날카롭게 구멍 뚫린 사탕에 혀가 베여 비릿한 피 맛이 올라와도 씹어 삼킬지언정 뱉어내진 못한다. 어쨌거나 달콤하니까.

하루에도 몇 번이나 실패를 예감하고, 포기를 갈망하지만, 퇴근 후 습관적인 운동, 독서, 작문이 쩍쩍 갈라지는 갈증을 해소한다. 이것은 참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명확하게 해설할 수 없는 여러 감정이다. 이조차도 버티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길 부정하고 싶어서, 텁텁한 일상에 나름의 단맛이 느껴지고, 그 텁텁함조차도 행복에 가까운 감정이라는 것을 인정해서, 좋아하는 행위를 지속하기 위해 모두가 애쓰고, 힘들인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 흘러가는 대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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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시작되는 곳 -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윤슬 지음 / 담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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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꿈을

놓아줍니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

윤슬

담다


「요즘 글쓰기가 매우 힘들고, 작년의 글과 지금의 글을 비교했을 때 발전이 없다.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쓰고 또 쓰다 보면 전환점이 오지 않을까, 일단은 푹 자고 개운하게 일어나서 생각해야겠다.」

2017년 8월 2일에 작성한 〈갈피〉라는 글이다. 당시 나는 어떤 막연함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당시 글의 수준도, 맞춤법도,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도 부족하지만, 지금 떠오르는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작문을 사랑하고, 쓰고 또 쓴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3년 3개월 후인 2021년 5월 24일 작성한 〈글쓰기〉에서는 이렇게 서술한다.

「행복한 추억들을 회상하며 그 행복에 젖어 들어야 남은 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지금 행복하다. 글 쓰는데 대단한 이유는 없다. 여러 이유를 만들 수는 있어도, 결국 작문에 이유는 없다. 내가 작가도 아니고, 전달해야 할 의미가 있어야만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저 쓰고 싶으면, 그냥 쓴다.」

어쩐지 이어지는 듯한 글이다. 그로부터 4년이 흘렀고, 이제는 글이라는 분야 자체를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문단의 기조와 나의 성별이 현대에 맞지 않는가, 하는 어리숙한 생각과 함께 이따금 자조 섞인 반추를 하기도 한다. 글 자체의 미숙함을 인정하면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할지 두렵다. 2016년부터 끄적거렸던 20대 초반의 청년이 곧 있으면 30대 중반이 된다.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평생 쓰는 것 자체에 재미를 느끼고, 만족한다면 꿈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것을 믿고 있지만, 예전만큼 굳게 신봉할 수는 없다. 방향성이라는 난제는 도저히 풀어낼 수 없고, 타자가 말하는 기계적, 상업적 글쓰기는 나와 맞지 않는다. 나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어떤 작가는 돈이 되지 않으면 곁가지로 남겨두라고 조언한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취미로 두라는 것이다.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글쓰기가 맞지만, 곁가지로만 두기엔 열망이 너무도 뜨겁다. 그 열기에 화상을 입고, 현실에서도 허우적거린다. 가장 사랑했던 서재가 앞서간 이들의 조롱 섞인 무덤이 됐다. 그 조롱을 애써 못 들은 척한다.

또 3~4년이 흘러 이 글을 보면 나는 어떤 상황이고, 기분일까. 대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먹구름 같은 두려움과 동시에 잔 불씨를 통해 기대감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늦지만, 꾸준히. 작지만, 묵묵히. 꺼져도 다시금 타오를 그날을 고대한다.

···

일시 정지

신춘문예 또는 출판사에서 정식으로 내 글이 출간되어야 글쓰기로 먹고살겠다는 계획을 시작할 수 있다. 2026년 1분기가 끝나기 전까지 이도 저도 되지 않는다면, 작문은 잠시 인생의 곁가지로 밀어두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핑계로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시를 방어막으로 두고 공부를 게을리했다. 작문에서는 조금의 발전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으나, 정작 나는 한 발짝도 떼어내지 못했다. 꿈으로 인해 나태해지고, 꿈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타협했으니까. 앞으로 오랫동안 걸어야만 할 길을 방치하고, 사람들을 밀어내며 얻은 건 무엇인가. 불안을 얻어 글로 녹여냈고, 불편함을 인내하며 미사여구를 장식했다. 그뿐, 그딴 글들은 독자들에게 가닿지 않는다.

꿈을 포기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이제는 그 꿈을 핑계로 인생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다짐에 가깝다. 내 인생이 적절한 궤도에 올랐을 때, 그때 다시 도전할 것이다. 글을 완전히 놓는 것도 아니다. 브런치와 블로그 그리고 인스타에 서평과 비평은 꾸준히 올릴 것이다. 그저 소설과 잠시 헤어지려고 한다. 내 인생을 살면서 좀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좋은 사람들과 재밌는 상황을 겪다 보면 다시금 자연스럽게 소설을 쓰게 될 것이다. 당장은 백 보 후퇴하겠다. 다시금 일 보 전진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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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감성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
제인 오스틴 지음, 김선형 옮김 / 엘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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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단의

오류

《이성과 감성》

제인 오스틴

엘리출판사


이성적인 사랑

이성적인 사람이 더 열열하게 사랑한다. 그들은 상황을,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절제하고, 기다린다. 오히려 일순간의 감정적인 사람이 사랑이 아닌 다른 요건을 먼저 선택한다. 물질에 혹하고, 잘못된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렇게 물질에만 관심을 쏟은 자들의 말로는 현대의 이혼율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무리 많은 물질도, 인간은 만족하지 못한다. 그 물질을 상쇄하는 게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흠을 메꿔준다. 아주 작은 사랑도 부족한 재물, 흠 있는 성격의 틈을 파고들어 부정을 막아낸다. 적당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하는 것도 사랑이고, 의리와 정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것도 사랑이다. 사랑은 뜨겁기만 하고, 상대를 탐닉하기만 하는 게 아니다. 사랑은 잠을 잘 자게 만들고, 삶을 윤택하게 한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게 되고, 이타적으로 변모한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돈과 사랑 하나에만 열중하지 않는다. 적절한 사랑과 적당한 돈의 가치를 파악한다.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감성적인 사랑

사랑에 진심을 다하는 감성적인 사람을 물욕이 강한 사람이 봤을 땐 어쩌면 위선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감성적인 사람은 과하게 재지 않는다. 그들을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로 볼 수는 있지만, 위선자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이성적인 당신들이 재물에 집착하는 만큼 그들은 사람이라는 본질에 집착하는 것이니까. 한 분야에 집착하지 않으면 더 깊이 나아갈 수 없다. 이성과 실리만 따지는 사람이 애정의 깊이가 깊을 순 없다. 그저 남들 다 하니까, 타인보다 더 나은, 더 좋은, 더 비싼, 그런 삶에 시간을 쏟았기에 감성적인 사람과 같은 사랑의 깊이일 수 없다. 그들은 기다란 줄자로 이리저리 재기 전에 먼저 마음으로 가늠 하니까.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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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책방 - 나도 이제 고전 좀 읽어 볼까?
임지은 지음 / 심플라이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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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전을

고집하는가?

《고전책방》

임지은

심플라이프


고전에 관심을 쏟게 된 이유는 한국 근대문학 덕분이다. 현대문학과는 다른 어떤 응축된 어두움에 매료되었고, 고전은 그 어둠이 더 철학적이고, 찐득했다. 이처럼 계기는 사소했고, 지극히 순수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어떤 우월감에 젖어갔다. 가벼운 에세이나, 철학이 없는 현대문학을 읽는 게 아닌,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어도 늘 새로운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그런 고전을 읽는 것에 집착했다. 잘 아는 작가의 이름이 나오면 거들먹거리기도 했고, 그 작가에 대한 잘못된 상식을 접하면 재빠르게 지적하기도 했다. 물론, 내가 말한 것들이 전부 정답도 아니었을뿐더러, 근대 작가의 성별을 오인하고, 잘못 전파한 경우도 생겼다. 그날 이후, 스스로가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소설 작가를 꿈꾼다는 인간이 이처럼 편협하다니, 어쩐지 수치심이 몰려왔다.

수치심 이후 개과천선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이 나오면 귀가 쫑긋해지고, 상대의 말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되뇐다. 잘못된 정보가 들리면 고치고 싶고, 좋아하는 작가를 비난하면 조금은 언짢아지기도 한다. 과거의 근거 없는 교만은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어떤 우월의식에 사로잡힌 것은 아닐지 경계하고, 또 경계한다.

*타인의 독서에 대해선 어떠한 견해도 없습니다.

···

고전을 읽는 사람

대체로 당시에 쓰인 문학이 어렵기도 하지만, 번역에 번역을 거치고 현재 사용하지 않는 단어와 문장을 나열하기에 더욱 난해한 것도 있다. 과거에는 불문학을 영어로 번역하고, 번역한 영어를 일어로, 그리고 한국어로 번역하기도 했으니,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조세프 콘래드ᴶᵒˢᵉᵖʰ ᶜᵒⁿʳᵃᵈ의 《어둠의 심장ᴴᵉᵃʳᵗ ᵒᶠ ᴰᵃʳᵏⁿᵉˢˢ》과 커트 보니것ᴷᵘʳᵗ ⱽᵒⁿⁿᵉᵍᵘᵗ ᴶʳ.의 《제5 도살장ˢˡᵃᵘᵍʰᵗᵉʳʰᵒᵘˢᵉ⁻ᶠᶦᵛᵉ》처럼 원서 자체가 난해한 것도 존재한다. 끊임없는 전쟁과 어떤 이즘의 폭력성이 예술가들의 자연스러운 표현을 억제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이처럼 함축된 작가의 사상을 파헤쳐서 참뜻을 이해하는 과정에 재미를 느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겐 시간 낭비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사실 모든 고전이 읽는 것 자체의 난도가 높은 것은 아니다. 잭 런던ᴶᵃᶜᵏ ᴸᵒⁿᵈᵒⁿ, ᴶᵒʰⁿ ᴳʳᶦᶠᶠᶦᵗʰ ᶜʰᵃⁿᵉʸ의 《야성의 부름ᵀʰᵉ ᶜᵃˡˡ ᵒᶠ ᵗʰᵉ ᵂᶦˡᵈ》은 당시 특유의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와 은유는 거의 없이 직접적인 표현이 주로 사용된다. 그럼에도 어떤 메시지는 분명하게 존재하고, 그 뜻은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한다.

고전을 읽는 방법을 설명하는 책이나 영상은 넘쳐난다. 좀더 깊게, 보다 수월하게 읽고 싶다면 한 번씩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실제로 유튜브로 전체적인 줄거리를 파악한 후 전문가의 서평을 읽어본 후에 첫 장을 열면 덜 어렵게 읽히기도 한다. 또한 1, 2차 세계대전 관련 역사를 적당히 파악해 두는 것도 고전 작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당시의 시대상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상상하는 것에 큰 차이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확실히 현대문학을 읽을 때보다 품이 많이 든다. 그렇기에 선뜻 책을 집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열심히 읽은 고전이 바로 우리 삶에 긍정적으로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기도 어렵다. 짧게 말하면, 쇼츠 같은 초 단위를 소비하는 세대에게 고전 독서는 너무 미미한 가치라는 것이다.

그 미미한 가치가 쌓여 태산이 되었을 때, 한 인간의 삶이 고전 덕분에 생각보다 잘 나아갔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기에, 고전을 읽게 된다. 쇼츠는 바깥으로 소비하는 콘텐츠다. 내부로는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미 없는 소리와 음향 그리고 혐오의 메들리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인간의 영혼과 정신을 망가뜨릴 뿐이다. 얇은 종이와 수십 만자의 글이 한 장, 한 장 쌓여 책이 되듯 우리가 읽는 고전도 마찬가지로 한 권, 한 권이 쌓여 더 나은 인생이 된다. 돌아봤을 때 후회가 적은, 미련을 놓을 수 있는 그런 삶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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