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걷는 사람들
김희영.류정희 지음 / 담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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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든

떠나는 삶

《천천히 걷는 사람들》

김희영 원작 / 류정희 그림

담다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여태 모아둔 돈으로 시골에 작은 집 하나 장만해서, 편의점이든, 작은 카페든, 밭일이든 뭐든 하며 입에 풀칠만 하면서 글 쓰며 사는 삶을 꿈꾼다. 그러나 서울에 남은 가족, 연인, 친구, 지인을 핑계로 실행에 옮기진 못한다. 평생 혼자 살 수는 없겠다는 불안감이, 나를 좀먹는다.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그 일에 치이며 좀 더 쉬운 일을 찾아 헤맸다. 막상 찾아온 좋은 기회에도 정신은 점점 나약해지고, 불만을 찾아낸다. 하기 싫은 이유가 쉼 없이 튀어나오고, 쓸데없는 고민과 혐오가 줄지어 흘러나온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왔고 또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 정답을 바라지 않는다. 인간사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고, 비교적 수월하게 남들보다 못하게 산다고 해서 마냥 행복하고, 늘 불행한 것은 아니니까. 그저 나만의 뜻을 찾는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으로 갈 것인가. 적어도 지금과 같은 인생은 아니다.

속초, 강릉, 삼천포, 해남, 제주도 등 알아본 곳은 참 많다. 구매할 집까지 물색했다.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원하는 인생을 쟁취할 수 있다. 30대 초반의 남자가 모든 걸 버리고 시골로 향하는 삶은 타인의 흥미를 자극하기 나쁘지 않은 설정이다. 그것으로 유튜브도 시작하고, 글도 작성한다. 새로운 경험으로 색다른 소설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대체 무엇이 두려운 걸까. 한가지 때문이 아니다. 복합적인 두려움이 실행을 멈추게 만든다. 금전적인 부담과 시행착오 그리고 내 사람들의 관계와 본질적인 고독이라는 복합적인 두려움. 아마도 터지기 일보 직전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떠나지 않을까. 남들과 똑같은 삶, 평생 비교하는 인생, 그 무수한 자조적 생각들을 뒤로한 채 천천히, 천천히 걷고 싶다.

···

하루에도

떠나고 싶다는 욕망과 떠날 수 없다는 결핍이 창작의 연료가 된다. 평생 떠나지 못하는 상태로 정신적인 괴로움이 증폭되었을 때 간헐적인 여행으로 식견을 넓히며 해소를 반복하는 것이다. 빽빽한 공간에서 고즈넉한 장소를 그리워하고, 그 녹색의 또 갈색의 풍경을 떠올리며 하루하루를 더 소중히 연소한다. 가끔은 벗어나지 못함을 실체 없는 대상에 하소연하고, 원망하기도 한다. 다시금 직시한 현실은 생각보다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묵묵히 걷는다. 언젠가는 이라는 기약 없는 희망은 그 어떤 사탕보다 달다. 날카롭게 구멍 뚫린 사탕에 혀가 베여 비릿한 피 맛이 올라와도 씹어 삼킬지언정 뱉어내진 못한다. 어쨌거나 달콤하니까.

하루에도 몇 번이나 실패를 예감하고, 포기를 갈망하지만, 퇴근 후 습관적인 운동, 독서, 작문이 쩍쩍 갈라지는 갈증을 해소한다. 이것은 참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명확하게 해설할 수 없는 여러 감정이다. 이조차도 버티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길 부정하고 싶어서, 텁텁한 일상에 나름의 단맛이 느껴지고, 그 텁텁함조차도 행복에 가까운 감정이라는 것을 인정해서, 좋아하는 행위를 지속하기 위해 모두가 애쓰고, 힘들인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 흘러가는 대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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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시작되는 곳 -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윤슬 지음 / 담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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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꿈을

놓아줍니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

윤슬

담다


「요즘 글쓰기가 매우 힘들고, 작년의 글과 지금의 글을 비교했을 때 발전이 없다.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쓰고 또 쓰다 보면 전환점이 오지 않을까, 일단은 푹 자고 개운하게 일어나서 생각해야겠다.」

2017년 8월 2일에 작성한 〈갈피〉라는 글이다. 당시 나는 어떤 막연함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당시 글의 수준도, 맞춤법도,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도 부족하지만, 지금 떠오르는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작문을 사랑하고, 쓰고 또 쓴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3년 3개월 후인 2021년 5월 24일 작성한 〈글쓰기〉에서는 이렇게 서술한다.

「행복한 추억들을 회상하며 그 행복에 젖어 들어야 남은 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지금 행복하다. 글 쓰는데 대단한 이유는 없다. 여러 이유를 만들 수는 있어도, 결국 작문에 이유는 없다. 내가 작가도 아니고, 전달해야 할 의미가 있어야만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저 쓰고 싶으면, 그냥 쓴다.」

어쩐지 이어지는 듯한 글이다. 그로부터 4년이 흘렀고, 이제는 글이라는 분야 자체를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문단의 기조와 나의 성별이 현대에 맞지 않는가, 하는 어리숙한 생각과 함께 이따금 자조 섞인 반추를 하기도 한다. 글 자체의 미숙함을 인정하면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할지 두렵다. 2016년부터 끄적거렸던 20대 초반의 청년이 곧 있으면 30대 중반이 된다.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평생 쓰는 것 자체에 재미를 느끼고, 만족한다면 꿈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것을 믿고 있지만, 예전만큼 굳게 신봉할 수는 없다. 방향성이라는 난제는 도저히 풀어낼 수 없고, 타자가 말하는 기계적, 상업적 글쓰기는 나와 맞지 않는다. 나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어떤 작가는 돈이 되지 않으면 곁가지로 남겨두라고 조언한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취미로 두라는 것이다.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글쓰기가 맞지만, 곁가지로만 두기엔 열망이 너무도 뜨겁다. 그 열기에 화상을 입고, 현실에서도 허우적거린다. 가장 사랑했던 서재가 앞서간 이들의 조롱 섞인 무덤이 됐다. 그 조롱을 애써 못 들은 척한다.

또 3~4년이 흘러 이 글을 보면 나는 어떤 상황이고, 기분일까. 대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먹구름 같은 두려움과 동시에 잔 불씨를 통해 기대감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늦지만, 꾸준히. 작지만, 묵묵히. 꺼져도 다시금 타오를 그날을 고대한다.

···

일시 정지

신춘문예 또는 출판사에서 정식으로 내 글이 출간되어야 글쓰기로 먹고살겠다는 계획을 시작할 수 있다. 2026년 1분기가 끝나기 전까지 이도 저도 되지 않는다면, 작문은 잠시 인생의 곁가지로 밀어두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핑계로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시를 방어막으로 두고 공부를 게을리했다. 작문에서는 조금의 발전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으나, 정작 나는 한 발짝도 떼어내지 못했다. 꿈으로 인해 나태해지고, 꿈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타협했으니까. 앞으로 오랫동안 걸어야만 할 길을 방치하고, 사람들을 밀어내며 얻은 건 무엇인가. 불안을 얻어 글로 녹여냈고, 불편함을 인내하며 미사여구를 장식했다. 그뿐, 그딴 글들은 독자들에게 가닿지 않는다.

꿈을 포기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이제는 그 꿈을 핑계로 인생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다짐에 가깝다. 내 인생이 적절한 궤도에 올랐을 때, 그때 다시 도전할 것이다. 글을 완전히 놓는 것도 아니다. 브런치와 블로그 그리고 인스타에 서평과 비평은 꾸준히 올릴 것이다. 그저 소설과 잠시 헤어지려고 한다. 내 인생을 살면서 좀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좋은 사람들과 재밌는 상황을 겪다 보면 다시금 자연스럽게 소설을 쓰게 될 것이다. 당장은 백 보 후퇴하겠다. 다시금 일 보 전진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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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감성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
제인 오스틴 지음, 김선형 옮김 / 엘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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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단의

오류

《이성과 감성》

제인 오스틴

엘리출판사


이성적인 사랑

이성적인 사람이 더 열열하게 사랑한다. 그들은 상황을,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절제하고, 기다린다. 오히려 일순간의 감정적인 사람이 사랑이 아닌 다른 요건을 먼저 선택한다. 물질에 혹하고, 잘못된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렇게 물질에만 관심을 쏟은 자들의 말로는 현대의 이혼율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무리 많은 물질도, 인간은 만족하지 못한다. 그 물질을 상쇄하는 게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흠을 메꿔준다. 아주 작은 사랑도 부족한 재물, 흠 있는 성격의 틈을 파고들어 부정을 막아낸다. 적당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하는 것도 사랑이고, 의리와 정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것도 사랑이다. 사랑은 뜨겁기만 하고, 상대를 탐닉하기만 하는 게 아니다. 사랑은 잠을 잘 자게 만들고, 삶을 윤택하게 한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게 되고, 이타적으로 변모한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돈과 사랑 하나에만 열중하지 않는다. 적절한 사랑과 적당한 돈의 가치를 파악한다.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감성적인 사랑

사랑에 진심을 다하는 감성적인 사람을 물욕이 강한 사람이 봤을 땐 어쩌면 위선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감성적인 사람은 과하게 재지 않는다. 그들을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로 볼 수는 있지만, 위선자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이성적인 당신들이 재물에 집착하는 만큼 그들은 사람이라는 본질에 집착하는 것이니까. 한 분야에 집착하지 않으면 더 깊이 나아갈 수 없다. 이성과 실리만 따지는 사람이 애정의 깊이가 깊을 순 없다. 그저 남들 다 하니까, 타인보다 더 나은, 더 좋은, 더 비싼, 그런 삶에 시간을 쏟았기에 감성적인 사람과 같은 사랑의 깊이일 수 없다. 그들은 기다란 줄자로 이리저리 재기 전에 먼저 마음으로 가늠 하니까.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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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책방 - 나도 이제 고전 좀 읽어 볼까?
임지은 지음 / 심플라이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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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전을

고집하는가?

《고전책방》

임지은

심플라이프


고전에 관심을 쏟게 된 이유는 한국 근대문학 덕분이다. 현대문학과는 다른 어떤 응축된 어두움에 매료되었고, 고전은 그 어둠이 더 철학적이고, 찐득했다. 이처럼 계기는 사소했고, 지극히 순수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어떤 우월감에 젖어갔다. 가벼운 에세이나, 철학이 없는 현대문학을 읽는 게 아닌,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어도 늘 새로운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그런 고전을 읽는 것에 집착했다. 잘 아는 작가의 이름이 나오면 거들먹거리기도 했고, 그 작가에 대한 잘못된 상식을 접하면 재빠르게 지적하기도 했다. 물론, 내가 말한 것들이 전부 정답도 아니었을뿐더러, 근대 작가의 성별을 오인하고, 잘못 전파한 경우도 생겼다. 그날 이후, 스스로가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소설 작가를 꿈꾼다는 인간이 이처럼 편협하다니, 어쩐지 수치심이 몰려왔다.

수치심 이후 개과천선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이 나오면 귀가 쫑긋해지고, 상대의 말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되뇐다. 잘못된 정보가 들리면 고치고 싶고, 좋아하는 작가를 비난하면 조금은 언짢아지기도 한다. 과거의 근거 없는 교만은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어떤 우월의식에 사로잡힌 것은 아닐지 경계하고, 또 경계한다.

*타인의 독서에 대해선 어떠한 견해도 없습니다.

···

고전을 읽는 사람

대체로 당시에 쓰인 문학이 어렵기도 하지만, 번역에 번역을 거치고 현재 사용하지 않는 단어와 문장을 나열하기에 더욱 난해한 것도 있다. 과거에는 불문학을 영어로 번역하고, 번역한 영어를 일어로, 그리고 한국어로 번역하기도 했으니,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조세프 콘래드ᴶᵒˢᵉᵖʰ ᶜᵒⁿʳᵃᵈ의 《어둠의 심장ᴴᵉᵃʳᵗ ᵒᶠ ᴰᵃʳᵏⁿᵉˢˢ》과 커트 보니것ᴷᵘʳᵗ ⱽᵒⁿⁿᵉᵍᵘᵗ ᴶʳ.의 《제5 도살장ˢˡᵃᵘᵍʰᵗᵉʳʰᵒᵘˢᵉ⁻ᶠᶦᵛᵉ》처럼 원서 자체가 난해한 것도 존재한다. 끊임없는 전쟁과 어떤 이즘의 폭력성이 예술가들의 자연스러운 표현을 억제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이처럼 함축된 작가의 사상을 파헤쳐서 참뜻을 이해하는 과정에 재미를 느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겐 시간 낭비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사실 모든 고전이 읽는 것 자체의 난도가 높은 것은 아니다. 잭 런던ᴶᵃᶜᵏ ᴸᵒⁿᵈᵒⁿ, ᴶᵒʰⁿ ᴳʳᶦᶠᶠᶦᵗʰ ᶜʰᵃⁿᵉʸ의 《야성의 부름ᵀʰᵉ ᶜᵃˡˡ ᵒᶠ ᵗʰᵉ ᵂᶦˡᵈ》은 당시 특유의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와 은유는 거의 없이 직접적인 표현이 주로 사용된다. 그럼에도 어떤 메시지는 분명하게 존재하고, 그 뜻은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한다.

고전을 읽는 방법을 설명하는 책이나 영상은 넘쳐난다. 좀더 깊게, 보다 수월하게 읽고 싶다면 한 번씩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실제로 유튜브로 전체적인 줄거리를 파악한 후 전문가의 서평을 읽어본 후에 첫 장을 열면 덜 어렵게 읽히기도 한다. 또한 1, 2차 세계대전 관련 역사를 적당히 파악해 두는 것도 고전 작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당시의 시대상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상상하는 것에 큰 차이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확실히 현대문학을 읽을 때보다 품이 많이 든다. 그렇기에 선뜻 책을 집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열심히 읽은 고전이 바로 우리 삶에 긍정적으로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기도 어렵다. 짧게 말하면, 쇼츠 같은 초 단위를 소비하는 세대에게 고전 독서는 너무 미미한 가치라는 것이다.

그 미미한 가치가 쌓여 태산이 되었을 때, 한 인간의 삶이 고전 덕분에 생각보다 잘 나아갔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기에, 고전을 읽게 된다. 쇼츠는 바깥으로 소비하는 콘텐츠다. 내부로는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미 없는 소리와 음향 그리고 혐오의 메들리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인간의 영혼과 정신을 망가뜨릴 뿐이다. 얇은 종이와 수십 만자의 글이 한 장, 한 장 쌓여 책이 되듯 우리가 읽는 고전도 마찬가지로 한 권, 한 권이 쌓여 더 나은 인생이 된다. 돌아봤을 때 후회가 적은, 미련을 놓을 수 있는 그런 삶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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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디렉션 - 사진작가 이준희 직업 에세이
이준희 지음 / 스미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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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기 없는

소설가

《빛과 디렉션》

이준희

스미다


중학생 때부터 네이버 블로그에 독후감을 쓰고, 자작 시를 올렸다. 누구도 반응해 주지 않았지만, 나만의 기록이 남는 것에 만족했다. 성인이 된 후, 다시금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게 2017년 5월 3일이다. 그렇게 1,000자 이하의 짧은 글들은 2018년 9월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몇 번이나 도전했던 신춘문예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매년 당선되는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다음을 기약했지만,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내가 그들처럼 쓸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심사 위원들이 선호하고, 독자가 중간에 책을 덮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예술성이 묻어 있으면서 동시에 상업적으로도 성공해야 하는 글을 쓰고 싶었지만, 역량 미달이었다. 그렇게 2019년은 읽지도, 쓰지도 않았다.

2020년부터 브런치 스토리라는 글쓰기 플랫폼에 서평과 산문을 기재했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지만, 아직 무리라는 것을 알았다. 일단은 쓰는 것 자체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산문을 작성하며 내 과거를 톺아보는 게 먼저였다. 어떤 판타지나, 경험하지 않았던 것을 쓸 수 없었던 나는, 결국 내 안의 무언가를 끄집어내야 했다. 마구잡이가 아닌 질서정연하게 약간의 허구와 망상을 섞어서 꺼낼 수 있도록 내 이야기를 퇴고하고, 또 퇴고했다.

브런치에 작성한 글만 해도 대략 100만 자쯤 된다. 대략 책 6~7권 정도의 분량이다. 물론, 퇴고하고, 비슷한 내용을 덜어내면 4권도 채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브런치에 입성했을 때 100만 자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 정도 연습이면, 이제 소설을 써도 되겠다고 믿었다.

[2025년 12월 16일]

소설

보통 사람, 14,302자 (원고지 79.9장)

선택적 분노, 16,305자 (원고지 94.8장)

분열의 물결, 18,743자 (원고지 96.2장)

파도, 7,123자 (원고지 41장)

동행, 39,990자 (원고지 211.1장)_퇴고 중_신춘문예보다는 출판사 투고에 중점을 두고 있음.

잔해, 32편

새싹은 어디로, 5편

초단편 1편과 단편 3편 그리고 중편 1편에 시 37편 정도를 2026 신춘문예를 위해 6개월 만에 쏟아냈다. 2025년 12월 16일 기준 한 달에서 두 달 반 정도면 결과가 나오고, 아마도 나는 다시금 좌절할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독려하고, 다시금 모니터 앞에 앉아 반짝이는 커서를 멍하니 바라보며,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겠지.

곧 있으면 작가를 꿈꾼 지 만으로 9년이 된다. 무명 배우 10~20년, 와닿지 않았던 그 세월의 무게가 어렴풋이 느껴진다. 등단하지 못하더라도, 평생 쓰겠다는 다짐은 변함없다. 이준희 작가님 처럼 나 또한 언젠가는 작가가 될 수 있을까···.

···

이준희 사진작가의 사진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부분에선 그저 입체적인 동작에 집착하는 상업적인 사진가와 다름없다가도, 다음 사진에선 순간적인 몰입을 경험한다. 마치 조지프 콘래드ᴶᵒˢᵉᵖʰ ᶜᵒⁿʳᵃᵈ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다. 그는 관점이 달라질수록 변하는 핵심을 닫힌 상자 안에서 완벽을 추구하며 구현해 내는 예술가다. 알다가도 모르는, 그런 시 같은 작품을 남기는 것, 그게 바로 예술이 아닐까.

빛과 디렉션ᴸᶦᵍʰᵗ ᵃⁿᵈ ᴰᶦʳᵉᶜᵗᶦᵒⁿ

나에게 빛은 창작의 원천이다. 커튼을 치고 창문을 활짝 열어 밀려오는 햇빛을 마주하면 창작 욕구가 심박수를 올리며 솟구친다. 처음 느껴보는 것도 아닌 감정에 다시금 설렌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바뀌는 햇살의 위치에 하루에도 몇 번 용기를 얻고, 기분이 좋아진다. 밤이 찾아오기 전 주황색의 하늘은 나의 노고를 이해해 주는 것 같다.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으면 그제야 조명색 등을 켜고, 또 다른 빛에 색다른 용기를 심는다. 이런 빛 덕분에 100만 자를 달성했고, 100만 자를 쓰고 보니 추구하는 방향성이라는 기류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앞으로도 빛 덕분에 200~300만 자 그리고 견고해질 방향성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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