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투라 CULTURA 2026.2 - Vol.140, 배우 안성기
작가 편집부 지음 / 작가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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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게

산다는 것

월간 문화전문지 쿨투라 140호(2026년 2월호)


20대 중후반엔 선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했다. 양보하고, 대신하는 것에 적절한 보상이 따라오지 않았다. 5의 노력을 기울였을 때 돌아오는 것은 5였고, 10의 노력을 기울여도 여전히 5의 보상만 돌아왔다. 어쩌면 궁색한 변명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부터 손해 보는 게 참으로 싫었다. 저 멀리서 관조하며 쓸데없이 첨언 하는 이들이 하이에나 무리처럼 주변을 어슬렁거렸고, 그것을 방관하는 승냥이 떼는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피하거나 교묘하게 동조했다. 나는 고독한 늑대라도 된 것처럼 할 수 있는 일을 대신했고, 모두가 선호하는 것을 양보하며, 마음에 울분을 쌓아갔다. 그들은 양보를 바라지 않았기에 고마움도 없었다. 나선 것은 오롯이 내 마음뿐이었다. 그 나섬의 대가는 당연한 기대였다.



“이거 원래 네가 하던 거잖아.”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당연히 네가 할거지?”

“뭐, 얼마나 힘들다고!”



결국 나도 어떤 날은 승냥이처럼 간을 봤고, 또 다른 날은 하이에나처럼 기력을 다한 타인을 맹렬하게 물어뜯었다. 여전히 고독한 늑대라고 착각하면서. 잘못된 지각을 바로잡았을 때, 회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더는 저열해지고 싶지 않았다. 하이에나도, 승냥이도, 늑대도 결국 짐승이기에, 이제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었다.



해야 했던 일을 외면하고, 하고 싶은 일로 눈을 돌렸다. 물론, 그곳에도 혐오의 핏물이 고여 있었지만, 괜찮았다. 시선이 닿는 곳 구석구석엔 꽤 멋진 것들이 즐비했으니까. 더 여유로울 때도 하지 않았던 기부를 시작했다. 타인을 위해 자리를 양보했고, 길거리 쓰레기를 주워 휴지통으로 옮겼다. 계단에서 힘겹게 내려오는 유모차를 대신 들었고, 안에 있는 천사의 미소를 보았다. 그 사소한 행위 덕분에 편안함이 찾아왔다. 여전히 선하게 사는 것은 손해 보는 것이고, 바보 같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비교하고, 분석한 후 행동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한 번씩 바보 같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들과 나란히 걷기엔 스스로 타락했음을 잘 알고 있기에, 한발 물러서서 발자취를 따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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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기록의 힘
윤슬 지음 / 담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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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의 기록

《감정 기록의 힘》

윤슬

담다


20시에 잠에 들면 새벽 4시쯤 잠에서 깨어난다. 보통은 일찍 일어난 김에 독서하거나 글을 쓰려고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이 남아있는 날은 안락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창밖을 주시한다.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앞선 생각과는 또 다른 상념의 부정이 피어오르며, 나는 더욱 깊게 가라앉는다. 그럴 때면 책상에 널브러져 있는 연필과 공책을 집어 들고 감정을 마구 쏟아낸다.

현 상황과 원인 그리고 해결법을 적는다. 글대로 해소되지 않을지라도, 무아지경으로 끄적인다. 이런 행동을 한다고 순간 기분이 나아지진 않는다. 효과는 또 이런 기분이 찾아왔을 때 발휘된다. 다 적었으면 전에 필기한 공책을 찾아 헤맨다. 이 공책 저 공책 펼쳐보며 어딘가에 쓰여 있을 과거의 토사물을 되짚는 것이다.

구석에 박혀있던 공책을 열어보니 1년 전 비슷한 고민을 발견했다. 「현 상황, 죽어도 등단할 수 없음. 원인, 부족한 실력. 해결법, 묵묵히 쓰는 것.」 현재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써야만 한다. 현대 문단의 기조와 맞지 않은 글이라는 원인이 뇌리를 스쳐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바꿀 능력이 없다. 계속해서 배설하더라도 멈추지 않는 것뿐이다. 기조를 넘어서는 작품을 낳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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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 - 세상의 중심이 된 바다의 역사
찰스 킹 지음, 고광열 옮김 / 사계절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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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와 적대

《흑해》

찰스 킹

사계절


흑해는 환대받지 못하는 바다였고, 다시금 환대하는 바다가 되었으며, 검은 바다에서 현재는 흑해로 불린다. 공간과 사람은 누군가가 어떻게 인식하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무엇인가가 된다. 흑해는 육지를 집어삼키고 탄생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바뀐 것이 거의 없다. 그저 제국의 탄생과 멸망 그리고 인간들의 감정과 해석만 끊임없이 변했을 뿐이다.

이를 통해 개인과 개인, 단체와 단체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흑해는 같은 시기에도 나라마다 다르게 인식했다. 서로 부르는 이름도 달랐고, 생태계 규정도 판이했다. 분명 같은 흑해지만 사람과 나라에 따라서 차이가 있었다. 사람과 사람도 마찬가지다. A라는 사람에 대한 구성원의 인식을 예로 들 수 있다. 착함, 무던함, 우유부단함, 책임감 없음 등 완전히 다르게 평가한다. A가 전부 가지고 있는 특성이지만, 개개인이 어디에 초점이 맞춰졌냐에 따라서 착하고 무던한 사람에서 우유부단하며 책임감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강과 같은 모양새에 바다의 특성을 품고, 상층 수와 하층 수가 섞이지 않은 상태 그대로 공존하는 흑해는 여전히 명확히 규명하기 어렵다. 진화학·생태학·심리학·사회학 등 모든 게 다 밝혀진 듯하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인간사와 흑해는 닮아있다. 어쩌면, 서로를 질리도록 혐오하는 우리는 누구보다 서로를 갈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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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너는 더 강한 사람 - 어차피 지나고 나면 먼지 같은 일이야
김묘정 지음 / 필름(Feelm)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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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이라는

허울

《생각보다 너는 더 강한 사람》

김묘정

필름출판사


나는 타인의 시선에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자유로워서도 안 된다. 타인의 감정과 행동을 배제하는 것이 나만의 인생을 잘 살아가는 거라고 착각했다. 그렇게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떠나서 어느 정도는 사회에 녹아들 필요성을 느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굳이 반박하지 않았고, 타인의 실수도 집어내지 않았다. 그런 행동은 늘 부정을 몰고 왔기 때문이다. 논리의 가장 큰 적은 무논리와 목청이었다. 입바른 소리는 권위가 있어야만 효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권력엔 상대의 목소리를 잠그는 권능이 있었다.

나도 틀렸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매번 망각했다. 하고 싶은 말을 전부 내뱉는 욕망을 제어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라고 과연 입바른 소리를 할 수 없었을까? 모두 참는 것이다.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사회라는 게 생겨났다. 그곳에 섞여야 구성원이 된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구성원이 되었다.

사회에 등을 지고, 보편적인 정신상태와 거리가 먼 인간이 바로 나다. 나와 비슷한 인간이 물질적 성공을 거두고, 명예까지 얻는 걸 매체를 통해 접했다. 그러나 대부분 그 권위를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하거나, 빈 깡통으로 허세를 부리는 것처럼 밑바닥이 금세 드러났다. 부서지는 속 빈 강정, 요란하기만 한 빈 수레, 비대해진 자아를 잡지 못하고 폭주하다가 스스로 나락으로 뛰어든다. 어쩐지 나의 결말을 미리 보게 된 것 같았다. 혹자는 ‘어쨌거나 돈은 많이 벌었잖아.’하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 곁엔 사람이 남지 않았다.

성공에 집착하고,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자신마저 잊게 되진 않을까.

넘치는 것보다 모자람을 추구한다. 넘치는 이유는 만족을 모르는 나의 부정적 본성 때문이다. 적당한 성공, 적절한 금전, 수준이 비슷한 연인 또는 배우자, 감당할 수 있는 업무, 타인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선에서의 자유와 욕심, 그게 무엇이든 넘쳐흐르는 것보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게 장기적으로 평온했다. 아쉬움은 약간의 미련을 남겼지만, 그것은 성장의 동력이 됐다. 넘치는 것 또한 더 큰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성장의 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 어렵고, 진정한 사랑과 우정을 만들지 못했다.

적당함을 아는 것은 가난하고 구질구질한 것과 달랐다. 능력도 없고, 꼬이기만 했을 땐 타자의 노력을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했다. 그렇게 조금의 발전도 없이 방구석 평론가가 되었다. 인색한 부자와 구질구질한 거지 둘 중 무엇이 더 나은가? 이것에 옳고 그름은 없었다. 인색한 부자는 돈이라도 많으니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미 배부른 사람에게 산해진미를 들이민들 부른 배가 꺼지진 않는다. 풍족한 허무와 가난한 허무의 본질은 결국 공허가 아닌가. 물질에 미친 편협한 눈알이 왜곡된 풍경을 비추고, 나는 그 풍광에 현혹될 뿐이다.

자산 10억이 넘는 사람이 스스로 서민이라고 부른다. 100억 대 부자도 따라서 자신을 개미라고 낮췄다. 나는 그들의 말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엔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딴 의미 없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면 삶이, 지금이, 내가 의미 없어졌다. 2026년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역설적으로 부자도, 가난도 허들이 상당히 높다. 나는 대체 어디에 속해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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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문기행 - 국문학자의 걸음으로 기록된 일본
이경재 지음 / 소명출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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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본

조선의 흔적

《일본인문기행》

이경재

소명출판


근대 일본 문학은 음침하고, 눅눅하다. 읽다 보면 알 수 없는 가려움이 느껴지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진다. 대표적으로 《인간 실격》을 집필한 다자이 오사무의 글이 그렇다. 기분 나쁘면서도, 책장 넘기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예술성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두 번 읽기엔 시간이 필요하다. 당시 일본 문학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편협한 사고로 지어진 시 같은 소설이 즐비했다. 인간 본성의 법칙보다 더 내밀하고 깊은 불편함을 발산한다. 이러한 극 미시적인 소설을 거듭 읽으면 내면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개인마다 다른데, 얇은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소음이거나, 광분하여 미친 듯이 소리 지르는 나일 지도 모른다. 왜 이런 소설을 읽어야 하며, 어째서 세계적으로 극찬받는 것일까. 유명한 비평가가 읽고, 크게 감탄해서? 오랫동안 사랑받은 소설이라서? 전부 참이자 거짓이다.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반드시 읽어야 할 책과 절대로 읽으면 안 되는 책은 없다. 누가 봐도 쓰레기 같은 책이라 할지라도 마음에 동요가 인다면, 읽을 것이다. 타자가 꼭 읽으라고 추천하고, 너무도 훌륭한 책이라도, 시선이 머물지 않으면 뇌리에서 완벽하게 지워진다.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신은 소설을 아는가? 문학은 감성적이기만 한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당신은 감성을 아는가? 일본과 중국은 나쁘고, 일본은, 중국은 등등 분류 없이 한곳에 묶어서 이해하고, 설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신들은 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가? 나는 이 질문들의 답을 낼 수 없다. 아마도 평생 확언할 수 없을 것이다. 나쁘고, 착한 것, 선과 악, 명과 암, 생과 사, 나와 타자, 아침과 밤, 밀물과 썰물, 물과 불, 남자와 여자, 한국과 다른 나라들 전부. 우리는 대체 무엇을 알고 있을까.

암울한 예술가들

흡연, 음주, 약물 등 중독과 예술은 떼려야 뗄 수 없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예술가들은 대체로 무언가에 중독되었다. 대표적으로 빈센트 반 고흐, 프랜시스 베이컨, 에드거 앨런 포, 찰스 보들레르, 어니스트 헤밍웨이,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알코올 중독이었다. 영화계에선 정신질환 관련 처방 약물과 향정신성 약물에 중독되어 자살에 이르거나 인생 자체를 망가뜨리기도 한다. 예술가에게 중독은 뮤즈와도 같다. 일반인과 다른 사상과 실행력을 얻기 위해선 자신을 파괴해야 하는데, 가장 쉬우면서 아주 천천히 철저하게 망가뜨릴 수 있는 게 바로 중독이다. 그들은 평생 담배를 태우고, 대마도 곁들인다. 해장으로 알코올을 섭취하며, 온갖 정신과적 약물에 의존한 채 몽롱하게 살아간다. 결국엔 마약에까지 손대고, 예술성마저 붕괴해 인격 자체가 산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예술은 오래도록 살아남길 기원하며 눈을 감는다. 그 말로를 알고 있음에도 나는 종종 스트레스라는 핑계로 또는 예술적 감각의 증폭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백해무익한 습관을 되찾으려 한다.

일본 구석구석에 조선인의 넋이 묻어있고, 숨결이 안개처럼 자욱하다. 여기저기 학살이 만연하고, 저주의 붉은빛이 대지를 뚫고 나온다. 근대 일본 예술은 대체로 암울하다. 다자이 오사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미시마 유키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혹) 등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심지어 미시마는 정치적인 진일보를 위해 할복했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살아간 윤동주와 이상은 다르다. 아무래도 어떤 목적과 이상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지만, 결핵 등 병 때문이지 자살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내가 추구하는 예술은 깊고, 편협하며, 처절하다. 주인공은 항상 암울한 상태를 유지하며 타자의 도움도 거부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그려가는 나는 그다지 처절하지 않다. 남들과 비슷하게 행복하고, 타인과 다르지 않게 불행하다. 조금 덜 안온할 수도 있고, 조금 더 아플 수도 있지만, 큰 차이는 없다. 때문에, 평생 스스로 숨을 거둘 생각은 없다.

《일본인문기행》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계속해서 어떤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일본의 문화 유지력 때문이었다. 타국의 문화는 철저하게 짓밟고, 복구할 수 없도록 훼손한 그들이 자신들의 문화는 최대한 보존한다. 문화가 말살되면 민족성도 따라서 사라진다. 예술은 문화를 지키는 방파제와 같다. 예술이 점점 사라지고, 조롱거리가 되는 대한민국의 미래에 영광이 있을 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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