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없음 - 기독교인의 인생을 빛나게 할 삶의 태도 10
김남준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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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기독교 목사님이 성경에 나오는 요셉의 일생에 대하여 쓴 글이다.  미국에서는 매년 1년 동안 새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붙여주는 이름 중 가장 인기가 있었던 이름들의 상위랭킹을 발표하는데, 그 때 빠지지 않는 이름 3개가 David, Joseph, Daniel이다. 

 

 

이 이름들은 모두 성경에 나오는 이름으로, 다윗왕, 요셉, 그리고 다니엘을 뜻한다.  성경에서 그려지는 이 세 사람의 삶은 그 시대도 처해있던 상황도 달랐었다.  요셉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기 전 이집트에서 살다가 노예에서 총리까지 올라갔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다윗왕은 이스라엘이 드디어 왕국을 이루려는 시기, 들판의 목동에서 시작해서 죽음의 온갖 위험을 넘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영원한 자긍심을 줄 중동의 거대왕국의 기초를 닦은 초대임금이다.  그리고 다니엘은 그렇게 형성된 왕국에서 왕족 또는 상위귀족의 자제로 태어나 그 나라가 바빌로니아에 의해 철저히 무너지고 파괴되는 시점에 바빌로니아궁으로 끌려가 언제라도 쉽게 죽일 수 있는 전쟁포로에서 (성경연구가들에 의하면 아마도 거세되어 내시가 된 이후) 당시 대제국이었던 바빌로니아제국에서 재상까지 올라간 인물이다.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이 세 명의 공통점은, 보잘것없는 신분에서 (아무리 부유한 가정이나 귀족가문이었다고 해도 결국은 노예로 전락했기에) 끝에는 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위치에 오르거나, 또는 영원한 왕국의 계보에 그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동경의 눈으로 볼 만한 이들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 엄청난 고난과 시련,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그 행동과 마음을 갈고 닦았기에 결국 들어쓰셨다는 부분에서 큰 도전인 동시에 위로가 되는 인물들이다.  사실 성경에는 상상할 수도 없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 결국 돌이키지 못 하고 그대로 스러져간(하지만 물론 믿음 속에서) 인물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들은 분명 지구 상에 발을 붙이고 육체를 입고 살아가야하는 인간 입장에서는 어쨌든 그 끝만큼은 부러울 수밖에 없는 삶이긴 하다.  그러다보니 기독교관련 서적에서 한 사람의 일생에 대해 끊임없이 파고 연구해서 나오는 저작물들 중 이 세 사람의 일생이 그 대상이 되는 것이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는 참 '4가지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 책이 요셉의 삶에 초점을 맞춘 책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하지만 다 읽고나니, 그 제목의 속뜻은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개념이 없어 보일 정도로 그 어렵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기나긴 터널 속에서 끝까지 우직하게 자신의 믿음으로 자신의 행실과 마음을 지켜낸 요셉의 자세를 분석한 내용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요셉의 삶에 대한 연구와 성찰에 관한 내용은 다른 여러 저서들이 많으니 여기서 굳이 더 얘기할 필요는 없겠지만, 읽으며 내게 크게 다가온 부분이 있어서 잊지 않고자 적어본다.

 

요셉의 파란만장한 삶을 따라서 걸어가다보면, 그의 삶에 대한 태도와 자기성찰이 어떻게 변화되고 성장해가나 알 수가 있는데 그렇게해서 발휘된 덕목들을 나누어 설명한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다툼, 관계의 파괴"였다.  서로 생각이 다르니 당연히 의견도 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 의견이 다른 것에 초점을 맞춰서 거기에서 서로 얘기를 나누며 다시 합의를 도출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때로는 그로 인한 감정싸움으로 서로에 대한 비방과 비난으로 돌이킬 수 없는 관계파탄으로 가는 경우는 크게는 국가 간에서부터 작게는 가정 내 부부간의 대화, 그리고 더 작게는 어린아이들의 다툼까지 하루에도 지구 상 어디서나 수없이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그 끝은 최악의 경우는 전쟁일 것이고 이혼일 것이고 또는 절교일 수 있다.  그로 인한 피해의 정도는 경우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모든 그러한 결과의 공통점은 바로 관계의 파괴이다.  하지만 요셉은 그런 식으로 관계를 파괴하기보다는 조용히 인내하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섣부른 해명으로 오히려 상대를 자극하기보다는 - 어떨 때는 나를 위한 해명 또는 변명이 본의 아니게 상대의 틀림을 지적하는 비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도 이제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알게 되었다 - "사람은 몰라도 주님은 내 죄없음을 아십니다" 하고 믿음으로 견뎌내는 모습으로 그 스스로를 단련시켜갔기에, 요셉의 관계는 파괴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무시하고 잊었던 이들이 나중에는 그를 천거해주었고, 또 정황 상 그가 파라오의 궁에서 재상이 되었을 때 함께 일하며 그를 성심껏 보좌해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란 내용이다.  그리고 여기서 인용된 글이 바로 저 제목에 있는 글귀였다.

 

終身讓路不枉百步 終身讓畔不失一段
종신양로불왕백보  종신양반불실일단 
 
"평생 길을 양보해도 백보에 지나지 않고, 평생 밭고랑을 양보해도 한 이랑에 지나지 않는다." <唐書> (小學에서 인용)

 

이 글귀를 보는 순간 망치로 한 대 얻어맞는 느낌에 잠시 멍했었다.  나는 운전하면서 간혹 차선을 안 지키고 오다가 끝에 가서 살짝 끼어들려고 하는 차들을 보면 많이 폭발하는 타입이다.  그래서 '어디 부딪히려면 부딪혀 봐, 너같은 얌체한테 내가 비켜주나.'라는 마음으로 독하게 앞 차의 꽁무니에 내 차의 코를 갖다대면서 옆에서 들어오려는 차를 오히려 밀어부치며 진행한다.  일반차량도 마찬가지지만 택시가 그렇게 할 때는 더 화가 나는 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세상의 모든 일에는 전문가가 있고, 그 전문가는 자신의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타의 모범이 되야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운전에 있어서 전문가들은 바로 택시나 버스를 운행하는 사람들이고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의 업무에 자부심을 갖고 차선과 신호를 준수함으로써 그 자부심을 주변인들에게 보여주고 그로 인해 운전질서의 교본으로 또 보이지 않는 경고장으로 주변의 운전자들을 가르치고 훈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분들이 바로 그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런 역할을 산뜻하게(?) 내버리고 "나 하나만 편하다면.."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으로 운전질서를 교란시키는 행위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용납하기가 어려운 편이다.  또 길을 걸을 때는 현재 내 발이 딛고 있는 그 작은 공간 하나 하나가 내게 귀속된 것인 동시에 내 옆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귀속된 땅을 순간순간 이동해가며 서로가 서로에게 넘겨주고 넘겨받는 입장이니, 결국 공유하는 입장에서 서로의 거리를 적절히 유지하며 주변인들을 배려함으로써 사회 안에서 작은 곳에서부터 옳바름의 씨를 뿌리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행여 길을 걷다가 어딘가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갈 때, 내가 잠시 뒤에서 오는 사람이 있나 어깨너머로 확인하고 사람이 있을 경우 그 문을 몇 초간 잡아줄 때,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러한 것과 달리 짧은 눈인사나 목례 또는 예의 상으로 그 유리문에 살짝 손을 대는 시늉을 함으로써 그 사회적 통념 상의 기본예의를 내게서 넘겨받아 다시 뒤로 전달하는 중간역할에 소홀한 보행자를 만날 때는, 바로 그 유리문을 그 사람의 코 앞에서 놔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로 인해 뒷사람이 부딪힐 것같은 위협감을 느끼며 급하게 문을 잡고나서 내 뒷통수를 향해 눈을 흘기거나 욕을 하거나, 내 입장에서는 더 신경쓸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인간 모양의 생물체가 하는 행동이기에 난 그대로 편히 내 갈 길을 간다.)

 

그런데 책에서 접한 위의 글귀는, 실은 길에서 만난 그들이 얌체이고 인두껍을 쓴 동물이 아니고 바로 내 자신이 인간으로써 사회 속에 살아갈 때 갖춰야 할 덕목을 못 갖춘 사람꼴의 생물체였단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어쩌다 한 번 뻥 뚫린 좌회전차선을 신나게 타고 달려와 길게 꼬리를 물고 서있었던 직진차선의 앞머리에서 슬쩍 끼어들려고 하는 차량에게 양보를 해주고 그 차가 비상등 정도로라도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고 그냥 가버릴 때, 또는 문을 잡고 일부러 서서 기다려줬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오히려 내 앞을 지나쳐서 그대로 먼저 통과해서 가버리는 것을 보고 얼마나 불쾌하고 그로 인해 더 그런 차량들이나 그런 사람들에게 절대 양보하지 않게 되었나를 돌이켜보면, 결국 내 입장에서는 "이 만큼씩!!이나 양보했는데"라는 마음과 그에 대한 보상을 은연 중에 바라고있었기 때문인 듯 하다.  그런데 저 글귀를 보면, 그렇게 아무 댓가 없이 평생을 길을 양보해봐야 사실은 백보가 채 안 된단다.  어디 길 뿐이겠는가, 누군가가 물건 하나 빌려달라고 했을 때 또는 시간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내 물건 내 시간 귀한 것만 생각하고 이리 재고 저리 재서 yes or no를 내놓은 나의 편협함은 타인의 예의없음을 탓할 자격이 있으며, 배려 운운하며 단순한 행동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남의 집 아이들을 빗대어 그 부모들을 흉볼 수준이나 되었겠는가 싶으니 정말 낯이 뜨거워졌다. 

 

 

그 날 저 책은 저 글귀가 있었던 부분에서 일단 덮여졌다.  저 글귀를 외우고 음미하느라 그 뒤로 페이지를 바로 넘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낮에 읽었던 부분을 계속 되뇌이다가 밤에 잠자리에 들어 옆에서 곤히 잠든 아들의 뒷통수를 어루만지며 떠오른 생각은, '어쩌면 이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서 그 사회를 점점 더 각박하고 예의없고 배려없는 곳이 되도록 주변에 영향을 끼치고 살아온 사람은 남이 아닌 바로 내가 아니었을까. 이 아이에게 물려주고픈 사회는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싶어 많이 미안했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저 글귀를 외우며 운전할 때나 길을 걸을 때나 조금씩 더 양보하기 시작했다, 내가 손해보는 것이란 착각에서 깨어나고나니 화낼 것도 억울할 것도 없었던 그 단순한 행위를 왜 진작 깨닫고 실천하지 못 했었는지..  아니,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나부터 이 세상에 알게모르게 좋은 씨를 뿌리게 된다는 사실을 왜 생각 못 했는지 모르겠다.  이래서 선인들의 글과 지혜는 자꾸 접해야하는 것인가 보다.  그래도 행여 이 앎이 무뎌지거나 잊혀질까 두려워 역시 리뷰로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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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07
레오 리오니 글 그림, 최순희 옮김 / 시공주니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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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와 베짱이. 원래는 열심히 일하는 개미는 그 결과로 풍요롭고, 놀고 먹은 베짱이는 굶어죽을 뻔한 내용.  아마 유치원 때부터 아이들에게 숱하게 읽혀지고 가르쳐지고 연극으로 학습된 이 내용은 우리 세대 모두에게 매우 익숙한 "교훈"으로 알게 모르게 기억 속에 아로새겨져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그만 놀고 일하라는, 그래야 후일 一身의 편안함이 보장된다는 근거로 곧잘 인용되기도 하는 "개미와 베짱이"로 대변되는 교훈.  농경사회 또는 1차산업 문화에서는 결코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당연한 진리, "수고하지 않은 자는 빵 먹을 자격도 없다"라는 교훈.  그래서 일 안 하고 놀러다닌 피노키오는 그 벌로 쉬지않고 일해야하는 당나귀로 변했었고, 맨날 아랫목에 누워 뒹굴대던 게으른 서방은 소탈을 쓰고 황소로 변해서 죽을 때까지 밭일을 해야하는 벌을 받았었다.  그런데 東西를 막론하고 존재했던 그 당연한 진리가, 시대의 변화를 타고 같이 변했다.

 

처음 이 책을 아이에게 읽어줄 때 내가 느꼈던 어딘지 모를 불편함.  그래서 한 번만 읽어주고 치워버렸던 프레데릭.  그런데 최근에 이 책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일이 생겼다.  "이게 뭐야?"하고 휙 치워버렸던 내가 오히려 근시안적인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구세대는 아니었나, 돌아보게 되었다.  창의력, 자기주도학습, 코딩 등등.. 요즘 아이들을 붙들고 온갖 미사어구와 새롭게 만들어진 造語로 아이들을 그에 맞춰 새롭게 개발된 온갖 학습자료와 학원으로 내몰며 결국 원하는 것은 하나, "남들이 생각 못 한 걸 먼저 생각해봐"라는 것.  그런데 전문가들은 아이들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뇌가 충분히 쉬며 놀이를 통해 스스로 즐거움을 찾아야 그런 창의성도 찾을 수 있다는 것.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하기에 내 아들은 본인이 하고 싶다는 온갖 놀이시간으로 여가를 보내고 있다.  - 물론 하기 싫다는 것을 내가 꼭 해야한다고 배우게 하는 것도 있는데, 그건 생명에 관계된 것이니 양보할 생각은 없다.  물론 아이를 설득하기 위해 뻔뻔한 거짓말로 당위성을 부여하는 수고로움이 뒤따르기는 했지만.. "엄마가 수영을 못 하니, 너가 수영을 잘 해서 엄마를 구해줘야 해"라는.. 하지만 결국 물에 빠져서 위험에 처해질 수 있는 공간이란 것이 바다 뿐이란 것을 생각하면 누가 누굴 구해줄 수 있겠냐만서도, 솔직히 수영을 배움으로써 그 절체절명의 순간 최소한 한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내 믿음은 변함이 없다. 아들에게 말해준 것처럼 그 생명의 주인이 실은 내가 아닌 아들 본인이란 것을 지금부터 미리 알려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놀아도 돼, 괜찮아"라는 내용이 동화로 변해서 내 눈 앞에 나타났을 때는, 작가의 의도를 살필 겨를도 없이 불편하게만 느껴진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그 이유는 어쩌면, 내 딴에는 아이의 시간을 존중해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이 입장에서 볼 때는 나도 다른 부모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일단 하고 봐" 식의 1차산업시대의 사고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쥐들이 열심히 일 하고 쉬지 않고 조직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노동을 할 때 프레데릭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 하겠다며 산으로 들로 놀러다니며 사색을 하고 놀이를 추구한다.  겨울에 모든 것이 눈 아래 쌓여버리고 모든 쥐들이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무료할 때, 프레데릭이 나타나 친구들에게 시를 읊어주고 노래를 불러주고 그 어두운 곳에 봄의 온기와 화창한 날씨의 따사로운 태양빛과 다채로운 색채를 초대해준다.  오 프레데릭.. 너는 정말 시인이구나, 고마워 하는 친구들의 감탄. 그리고 그 나눔을 통해 함께 자칫 무료할 수도 있었던 시간들을 즐거움으로 채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준 유일한 존재, 프레데릭의 가치 창출.  인간사회에서라면 에코, 보통, 스필버그, 잡스, 저크버그 같은 이들이 되는 걸까.  순간 나부터 혼란스러워진다.

 

그래도 따지고보면.. 그 쥐들이 모두 프레데릭같았다면 그들은 따뜻한 공간에 모여 그렇게 시와 이야기와 노래를 즐길 기회조차 갖지 못 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일을 해서 1차적 의식주 문제를 해결했기에 그 위에 그런 철학적, 유희적 놀이문화가 가능하게 된 것 아니겠는가.  인구의 구성을 본다면 기본 의식주문제를 해결하는 산업의 비율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꿔 말하면.. 결국 누군가는 의식주에 관한 일을 해야할 것이고 - 그것이 농사일이든 아니면 라면이나 과자회사 등에서 새로운 상품 개발이든, 또는 시멘트를 만드는 일이든 또는 그런 재료들을 모두 모아 새로 지을 건축물의 디자인을 고민하는 일이든 - 결국 부모로서의 내 역할이란 것은, 내 아이의 적성에 맞게 어디론가 사회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조언해주고 기다려주고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손을 내밀어 잡아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어떤 한가지 형태나 행동이 다른 것에 비해 그 가치가 덜한 것이 아니고, 결국 서로 서로 다른 것이니 그 다름을 인정함으로써 사회의 다양성을 추구해나가야한다는 의도로 씌여진 동화책인 것일까. 

 

사실 내가 불편함을 느꼈던 이유는, 프레데릭의 "다름" 때문이 아니라 프레데릭이 그 "다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다른 쥐들의 노동에 따른 결과를 같이 향유할 수 있었던 프레데릭의 "행운" 내지는 다른 쥐들의 "아량"에 대한 가치가 동화 속에서는 미처 다뤄지지 않았기 때문인 듯 하다.  프레데릭이 그렇게 다른 쥐들의 아량을 누릴 수 있는 행운이 꼭 당연한 것은 아닌데, "무임승차"에 대한 불편함이 더 크게 다가와서 작가의 진짜 의도를 간과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따지고보면... 다른 쥐들은 "아량"을 베푼 것이 아니라 프레데릭의 "다름"을 인정해준 것 뿐인데 말이다.  아마 내가 불편했던 이유는 그 "다름"을 인정해줄 줄 아는 다른 쥐들의 넓은 시야에 대해 프레데릭도 역시 그들의 "다름"을 인정해주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 해서이지 않았을까.  누가 누구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라,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각자 잘 하는 일을 함으로써 사회가 다양성이 인정되면서도 함께 발전해나갈 수 있다는 당연한 이치.  그 부분에 대한 강조가 빠졌기 때문에 많이 불편하게 느껴졌었나 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결국 짧은 동화인데..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며 읽었기에, 오히려 아이에게 "괜찮아, 달라도 돼"라는 말을 전해주고 싶었을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내가 일방적으로 그 책을 폄훼해버린 것은 아닌가 살짝 반성이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프레데릭을 읽으며 순간 내가 어렸을 때 배웠던 가치관과의 차이로 인해 느꼈던 혼란스러움, 불편함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어 조금은 해소가 된다.  여하튼 동화책으로 읽고나서 몇 년 뒤에 내가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을 보면, 세상의 모든 책들은 허투로 대할 것이 아닌 듯 싶다.  여러가지로 여운을 남기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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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우리 - 고승의 환생, 린포체 앙뚜 이야기
문창용 지음 / 홍익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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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에서는 스승의 역할을 했던 高僧이 사망한 경우 다시 어디엔가 還生을 해서 前生에 다하지 못 한 공부를 이어가며 제자들을 가르치며 求道를 해나감을 믿는다고 한다.  그렇게 還生을 한 高僧으로 인정받으면 린포체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부여받고, 前生에 살았던 사원에서 제자들이 와서 모셔가서 아무리 어린 나이라도 스승으로 모시며 다시 공부를 계속 해나간단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달라이 라마는 그런 린포체들 중에서 가장 높은 스승으로, 그는 이미 모든 것을 다 깨우쳤지만 인류를 사랑해서 衆生을 濟度할 목적으로 계속 還生한다고, 그래서 달라이 라마는 活佛이라고 한단다.

보고 싶어하면서도 극장까지 갈 시간은 안 되어서 마음에만 담고 있었던 다큐멘터리가 드디어 vod로도 볼 수 있게 나온 것은 행운이었다.  이 영화에서는 딱 두 사람이 주요인물이다.  꼬마 린포체와 그를 모시는 70대의 제자 老僧.  히말라야의 산마을에서 태어난 꼬마가 어린 나이에 린포체로 인정받으면서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던 70대의 스승이 이제는 그 꼬마 린포체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며 그들의 관계는 외견상 분명히 변했다.  하지만 그 안에 깊이 흐르는 두 사람간의 우정과 애정, 관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만 간다. 내용의 큰 줄거리는 티베트가 중국의 침략으로 국경이 모두 막혀서 기존 사원에서 꼬마 린포체를 모시러 아무도 오지 못 하자 老僧은 큰 결심을 하게 되는데, 꼬마 린포체가 점점 전생에 대한 기억이 흐려져가는 와중에 더 늦기 전에 이제 조금 더 자란 된 꼬마스승 린포체를 모시고 직접 티베트로 바래다 주는 것.  그 먼 길을 떠나는 여정을 담은 내용이다.- 그 여정만도 2달이 넘게 걸렸는데, 감독이 그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촬영한 시간은 9년이라고 하니, 그 기나긴 시간동안 오롯이 카메라 앵글 속에 담아내기 위한 노고는 또 얼마나 들었을까.. 

 

이 다큐는 결코 종교의 얘기가 아니라, 나이 든 제자와 어린 스승 사이의 깊은 紐帶感과 사랑을 담아낸 것에 그 초점을 마추고 있다.  허리까지 빠지는 눈밭을 넘어 험난한 산맥을 걸어넘어가면서도 老僧은 결코 꼬마 린포체에 대한 미소와 애정어린 손길을 거두지 않는다.  얼은 발이 행여 상할까 눈밭 위에 앉아 꼬마 린포체의 젖은 양말을 벗기고, 자신의 두 손으로 감싸서 녹이며 그 냄새나는 발에 입을 갖다대고 입김을 불면서도 노승의 얼굴에는 결코 찡그림 한 번 없다.  살을 에일 것 같은 추위 속에 꼬마 린포체를 위해 장갑을 사주며 자신의 두 손은 얼은 그대로 비비며 길을 떠나는 노승의 뒷모습에서, 獻身이라는 두 글자가 사람의 모습을 한다면 바로 저런 것이겠구나 하고 바라봤다.  아무리 험하고 멀어도 수행을 위해 돌아가야하는 그 곳까지 닿아야하는 운명을 알기에 꼬마 린포체도 불평없이 노승을 따라 걷는다.  前生에 놓고 온 그 곳, 現生에서는 아직 가보지 못 한 그 곳, 떠나오기 전에는 꿈에서나 봤던 그 곳을 향해 걸어가며 이제 그 곳을 찾아 떠난 길 위에서 보는 꿈에서는 뒤에 놓고 떠나온 現生에서의 고향집과 가족의 모습을 보고 있는 어린 꼬마..  환생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삶이 진정 그러한 것이라면 이 얼마나 고달픈 求道의 삶일까.  어린 나이임에도 노령의 영혼을 짊어진 그 꼬마의 뒷모습을 보며 그 삶의 깊이가 짐작이 안 되어 보는 내내 먹먹했다.

 

마지막에 간신히 도착한 티베트에 꼬마 린포체를 홀로 놔두고 돌아서면서, 老僧이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다.  영화감독의 말로는 9년에 걸친 촬영 동안 처음으로 본 老僧의 눈물이라고 했다.  풀밭에서 노승은 눈싸움을 제안한다.  눈이 어디 있냐는 꼬마 린포체의 말에, 있는 걸로 하면 되죠 하며 마치 눈이 있는 것인 양 즐겁게 눈싸움을 하다가 넘어진 노승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일어나지를 못 한다.  어디 다쳤냐고 걱정하며 다가온 꼬마 린포체에게 그는 말한다.  이제 나는 돌아가야해요..  곧 터진 꼬마 린포체의 울음. 그리고 그 옆에서 같이 터진 노승의 울음.  그 울음 속에 담긴 슬픔의 깊이가 대체 어느 정도일까.  오직 그 아이의, 도대체 몇 번에 걸쳐서 다시 태어나 걸어가는 求道의 길인지도 모를 그 한 자락에, 자신이 보살핌으로 도울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감사하며 오롯이 사랑으로 관심으로 보듬어 키웠던 그 어린 아이를 이제 홀로서기로 내려놓고 돌아서야 하는 그 老僧의 마음이 너무나 와닿아서, 같이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나라면..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이 더 큰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떠나가야함을 알고 보내줘야할 때, 그런데 그 아이의 나이가 고작 10여세에 불과한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아이일 때.. 나라면 그 아이와 이 생에서의 영원한 이별을 알면서도 그렇게 떠나보내는 것이 가능할까.  그 때의 심정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종교의 얘기가 아닌, 한 영혼이 정말 순수하게 다른 영혼을 아끼며 헌신하는 사랑의 깊이를 볼 수 있었기에 그 슬픔의 크기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게 헤어짐을 슬퍼하며 서로 돌아서서 눈물을 흘릴 때, 老僧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함께 해서 정말 행복했잖아요..  그래서.. 린포체, 정말 고마와요."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전달..  그저 함께 한 순간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했다는 老僧의 마음이 전해져서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老僧이 홀로 눈으로 덮인 히말라야 산맥을 걸어 넘어가는 모습 뒤로, 둘이 나눈 대화가 흐른다.  꼬마 린포체가 자신의 스승이자 보호자, 나이든 제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15년 뒤면, 내가 공부를 다 끝내겠죠? 그럼 스승님을 찾아서 돌아갈께요." 老僧이, "그럼 나는 아마 어린아이가 되어있을 거예요"(아마 나이가 많아서, 설령 살아있다고 해도 정신이 온전하지 못 할 거란 얘기인 것 같았다).  그러자 꼬마 린포체가 "그럼 제가 스승님을 모실께요" 하니까, 老僧이 "저를 모신다고요?" 하고 되묻는다.  그때 린포체가 한 대답이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예, 그럼 정말 행복할 거예요." 이 대답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난다.

누군가에게 받은 아낌없는 사랑, 그리고 그 헌신적인 사랑을 알고 다시 돌려주고 싶어하는 마음, 그 생각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마음. 그런 것들이 전해져서 정말 한동안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피를 나눈 내 자식이라고 해도 내가 정말 저렇게 순수하게 다른 한 사람을 마음 속 깊이에서부터 사랑하며 모든 것을 다 헌신할 수 있을까.  어쩌면 어린 린포체는 진짜 還生한 高僧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상대로 저 어린 린포체가 깨달은 그런 "감사하는 마음"을 나는 느껴본 적이 있나.. 하고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몇 번을 더 살아야 저런 중생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품게 될까. 


꼬마 린포체의 俗世名은 "앙뚜"이다. 앙뚜가 정말 모든 공부를 잘 마치고 자신의 전생이 있었다고 믿는 사원에서 실제로 린포체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꼬마 앙뚜가 정말 린포체이고 그들이 믿는 還生이 있다면, 이번 生의 끝에 老僧과 꼬마 린포체가 再會하지 못 한다고 해도 다음 생에서는 그 둘이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때는 꼬마 린포체가 원하는대로 老僧을 그렇게 따뜻하게 모시고 돌봄으로써 그 애정어린 관계를 다시 갖게되기를 바란다.  그들의 이 생에서의 인연은 그들 모두에게 크나 큰 울림으로 남았을 테니, 이 인연이 꼬마 앙뚜가  더 훌륭한 스승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고, 노승의 영혼에 한 단계 도약을 위한 깨달음으로 전해지면 좋겠다.  그렇게하여 그 둘이 이 생에서 안 되면 다음 생에서라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나 역시 진심으로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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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행성 샘터 외국소설선 6
존 스칼지 지음, 이수현 옮김 / 샘터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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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몇년 전 처음 읽은 책은 "노인의 전쟁".  알고보니 총 3부작의 1부였다.  얼마 전 다시 접한 스칼지의 작품이 "유령여단".  이것이 2부였다.  그리고 이들의 여정에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 바로 이 책, "마지막 행성", 3부작의 마지막이다.  노인의 전쟁에서는 존 페리가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의 나이든 몸과 자녀들을 놔두고 지구를 떠나서 우주개척연맹의 군인으로 합류하여 우주에서 마주하는 모험이야기다.  유령여단에서는 존 페리의 사망한 아내의 유전자 일부를 받아서 창조된 군인, 제인 세이건의 활약과 함께 우주개척연맹의 말살(이라고 하지만 결국 인류멸종으로 귀결될 확률이 높은) 계획을 해결하며 인류의 대다수에게는 그 존재조차 감춰져있었던 콘클라베라는 우주동맹조직에 대해 운을 뗀다.  그리고 3부에서는 다시 만난 존과 제인, 그리고 2부에서 그릇된 계획으로 결국 자신의 죽음을 초래했던 (인류 입장에서는 배신자인) 부탱의 딸인 조이를 입양함으로써 실제 살아온 햇수로의 나이가 90대인 아버지, 이제 갓 10살쯤 되었을 어머니와 정상적인 인간으로 10대인 딸이 가족을 이루며 새로운 개척행성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인류의 우주개척연맹과 기타 종족의 콘클라베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치/전쟁 이야기가 장대하게 펼쳐진다.

 

지구는 기본적으로 우주개척연맹에 군인을 공급하는 곳인 대신 모든 이들에게 고향으로 한 번쯤은 여겨질 수 있는 행성이자 연맹의 정보통제로 낙후된 상태로 관리대상인 행성이다.  지구에서 연맹의 군인으로 자원해서 떠나는 이들은 한가지 조건에 모두 동의해야만 하는데 이는, 고도로 발달된 새로운 초록색 군인육체를 선물받는 대신 다시는 지구에 돌아가면 안 된다.  존은 그렇게 지구를 떠나왔고 제인은 결코 지구에 가본 적이 없었으며 조이는 너무 어렸을 때 떠나와서 지구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지구는 언제나 소망의 땅이었을 것이다.  1부에서 보여줬던 존의 유머감각이 여전하고 2부에서 보여줬던 제인의 차가운 이성과 전투력이 여전한 것을 보면서, 이 둘이 정말 한 작가에게서 탄생한 인물들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그 개성의 다름에 감탄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풀어나가며 그 사이 사이에 촘촘히 끼워넣는 각 인물들의 다양한 성격과 논리는,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모습같아서 괴리감없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더랬다.  그렇게 모든 것이 자리를 되찾고 안정이 되어, 원래는 돌아갈 수 없는 또는 바라봐도 안 되는(항상 은하계 어딘가에서 멀리 떨어져있기에) 그 곳, 지구로 돌아와 존의 사망한 아내의 무덤, 캐시의 무덤 앞에서 부부는 새롭게 태어난 인간의 몸으로써 새 시대를 열어감을 느끼며 대단원을 맺는다.

 

김용의 영웅문 시리즈가 이랬을까.  1부작에서 곽정과 황용의 커플을 보며 함께 즐거워했던 마음은 2부작 신조협려전에서 양과와 소용녀 커플의 입을 빌려 곽정-황용 내외의 장렬한 전사를 전해듣고 한동안 씁쓸했더랬다.  답답할 정도로 꽉 막히고 순진하기만 했지만 오히려 그와 같은 우직함으로 一身의 무공이 초절정고수로 거듭나는 곽정과, 타고난 美貌와 智謀로 그런 그를 옆에서 함께 하며 한 뜻으로 길을 걸어간 황용 부부는 정말 내 어린 날의 우상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과 양과-소용녀 부부의 영원한 잠적으로, 정녕 이렇게 한 세대가 막을 내리는구나 하고 아쉬워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조이의 이야기"라는 이 시리즈의 外傳이 있다.  하지만 그 시간대는 마지막 행성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평행한 시간대이니 결코 그 가족이 지구로 귀환한 뒤의 이야기는 아니다.  존과 제인의 새로운 삶은 어떻게 펼쳐질까.  寸鐵殺人의 유머감각으로 시종일관 모든 것을 웃음으로 승화시켜버리는 탁월한 전략가인 존과, 適時適所의 판단과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정확함으로 행동하는 타고난 군인 제인, 그리고 한 종족의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를 받는 조이로 이뤄진 이 가족의 후일담이 너무도 궁금하다.  그들의 삶에 대해 좀 더 들여다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아쉬울 뿐이다.  참으로 생생하게 다가왔고 나도 모르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던 주인공들이 드넓은 우주 안에서 반짝이는 별들과 우주함선들을 상대로 벌이는 대모험의 대서사시.  존 스칼지가 그저 이들을 다시 불러내줄 멋진 場이 새롭게 펼쳐질 날이 오기를, 존과 제인의 열렬한 팬으로서 소심하게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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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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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者들이 죽음으로 가야할 곳으로 안 가고 이승에 남아서 각자의 사연을 얘기한다. 그 사연에 묻어나오는 것은 결국 현재 중국의 사회현상과 감춰진 문제점들. 중국이란 나라가 그러리라 생각은 했지만, 때로는 자신의 추측을 확인하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더 불쾌할 수도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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