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로지 할아버지의 뒷마무리
아사다 지로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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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총 6개의 단편이 실린 아사다 지로의 단편집이다.  시대배경은 200여년 이어온 도쿠가와 막부가 시대 속으로 사라진 뒤 日王이 다시 권력의 중점으로 돌아온 메이지유신 이후.  갑자기 변모하는 사회 속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요동하는 무사들의 쓸쓸한 뒷모습이 그 주인공이다.

 

 

일본에서 근대로 접어들기 전까지의 무사라는 것은, 자기가 모시는 주군을 위해서는 죽음을 불사하며 비겁함이 제일 수치스러운 일이라 여기는, 나름 기개가 있는 신분이었다.  그것이, 어느 날 자신들이 모시던 주군들이 눈 앞에서 영지를 뺏기고 성을 부수고 평민으로 격하되더니, 어제까지 시대의 그림자 마냥 존재감도 희미했던 왕이 - 사실 그래서 그 일족이 계속 왕조를 지켰지 아니면 중국이나 한국처럼 벌써 여러 번 왕조교체가 있었을 것이다- 갑자기 살아있는 신이랍시고 나타나더니 모든 권력을 다 회수해가고, 여태 자신들이 믿고 있었던 신념과 존재이유를 송두리채 땅에 쳐박아버리는 작업이 계속 진행된다.  믿을 거라곤 칼 한 자루에 배운 것이라곤 공병술과 전술, 그리고 우리네 양반들이 그랬던 것처럼 긍지 하나로 남루함을 견뎌내며 언젠가는 출세하리라 믿고 검술을 연마했던 이들이 갑자기 당장 할 일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그리고 현재에 그나마 무사라면 누렸을 주변의 공경도 다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무가의 딸이었고 무가의 며느리였던 아내는 술집 작부로 나서고 검술 하나로 이름을 날렸던 아버지는 땅을 파고 있든가 아니면 집안 어디선가 침잔해서 사라져 버린다.  아들들은 은근히 무시했던 상인들 밑에 들어가서 상술을 배우고 딸들은 어딘가로 팔려간다.  이렇게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며 상대적으로 빠른 시간 안에 근대화를 진행시켜야 했던 극동아시아 국가들에게는 낯설지만은 않은 모습들이 소설 속에서 담담히 펼쳐진다.

 

 

이 중에서, 제목으로 나오는 "고로지 할아버지의 뒷 마무리"는 6편 중 제일 뒤에 실린 단편이다.  왜 이 이야기가 맨 뒤로 배치되었고 그 제목이 그대로 책 제목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작가의 의도였다면 아마 작가가 가장 애착을 가진 작품이기에 그랬을 것이라 추측된다.  하지만 내게는 다른 작품이 더 다가왔다, "석류고갯길의 복수." 

 

 

뛰어난 검술을 인정받아서 모시고 있던 주군의 최측근 호위무사로 임명된 주인공은, 주군이 가마를 타고 어디론가 출타할 때는 그 가마의 호위무사로 그 주인의 안위에 대한 최종적 책임자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네들의 사고방식대로라면 주인이 살아있으면 같이 살아있어도 되지만 주인이 습격으로 죽는다면 그 자리에서 싸우다가 주인보다 먼저 죽든가, 아니면 주인을 대신해서 죽든가 해야지 그 반대는 허용이 안 되는 위치인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이 주인공은 출타를 나선 길에 주인은 습격을 받고 동료 무사들 포함 주인마저 목이 잘렸는데, 자기는 멍하니 넋을 놓고 상처 하나 안 입고 살아남고 말았다 - 역시 그네들의 표현방식대로라면 "분하게도.." 살아남고 만 것이다, 죽을 자리에서 안 죽고 기회를 놓쳐버렸으니..  실은 바로 할복감인데 역시 무사와 무사의 아내였던 부모가 낙향한 곳에서 못난 아들을 대신해 할복하고 자살해주는 바람에 살아남아서 주군의 복수를 갚으라는 명을 받고 방출되고 만다.  그런데 어쩌나, 누가 자객들인지 알아내지도 못 했는데 그만 메이지 유신이 터지고 이제는 칼부림도 할복도 다 불법이다.   얼씨구나 하고 그냥 살아있자니 괴롭고 힘들다고 혼자 덜컥 죽자니 개죽음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면서 생계는 술집작부로 나선 아내에게 맡기고 자기는 꾸준히 자객들의 뒤를 알아보고 다닌다.  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이제는 주군가문도 무사시대도 끝났으니 그만 하지 그러나 하는 말과 함께 사건 당시 이미 처리가 끝난 자객들 외 - 자살이나 또는 자수로 할복한 이들- 살아남은 자들의 근황을 듣고 그 중 한 명을 찾아간다.

 

 

둘이 조우하는 가운데, 찾아간 이도 그를 맞이하게 되는 이도 상대방이 서로 누구인지 알면서도 아무 말 없이 함께 한적한 산길로 들어선다.  십여 년 전 칼부림할 때는 각기 주군의 원수, 또 주군 가문의 원수였지만 이제는 이도 저도 아닌 인생들..  메이지 유신 후 각 주인 아래 너네 편 내 편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 안에서 존재하는 그냥 같은 나라 백성들인 그들에게 또 한가지 공통점이라면, 새로운 시대/새 역사에 동참하지 못 하고 그만 그 습격사건 이후 그 날 그 자리에서 시간이 멈춘 채 살아온 유령같은 존재들이라는 것.  그러니, 죽어야 할 때 죽지 못 해서 제대로 가장 역할도 못 하면서 유령처럼 살아가는 남자와 마음의 짐을 털지 못 해서 가정조차 이루지 못 하고 그냥 부유초처럼 둥둥 흘러가 듯이 살아가는 남자에게는, 이렇게 과거와 똑바로 대면하게 된 이 순간이 차라리 고마울 정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난 세월의 짐을 그 자리에서 떨칠 수 있었다.  짓누르고 있던 과거의 망령들로부터 벗어나서 이름(신분/명예)에 얽매였던 모습들을 던져버리고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끝부분은 묘하게 이인화 소설가의 정조대왕을 얘기한 "영원한 제국"을 연상시켰다.  먼저 떠나간 주군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 대왕이 승하한지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어제 헤어진 양 생생히 들리는 주인의 따뜻한 목소리..  영원한 제국을 덮으며 내 귀에도 같이 들렸던 정조대왕의 부름처럼 마무리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따스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아사다 지로의 단편들은 국경을 초월해서 사람들의 그리움을 자극하는 매력이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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