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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에세이 1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어린 시절, 우연히 집에 꽂혀있던 전혜린씨의 이 책을 읽고나서 그 냉소적이면서도 자로 잰 듯한 정확한 문체에 감탄을 금치 못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삶에 대한 끓어오르는 열정과 그 열정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사회적 여건 속에서 냉소적인 회의주의로 흐르는 것은,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가 쉽게 선택할 길인 것일까. 마침 아버지가 전혜린씨의 대학 후배이기도 하시기에, 이 사람을 아시는가 어린 마음에 여쭤봤다. 유명한 사람이었다고, 당시 한국여성치고는 보기 드물게 자기 사고와 생각이 확고했었는데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부딪힌 여러가지 제약과 보이지 않는 벽 속에서 신음하다가 스스로 삶을 마감한, 아까운 사람이라 말씀하셨다.
그가 아까운 사람이란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책 속에서 드러난 정확/사실적인 문체, 그리고 그 속에 녹아있던 철학과 사고의 깊이는, 실로 그의 죽음이 몇십년 전의 일이 되어버린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을 우리 곁에 남겨주게 된 이유가 아닐까. 난 그가 법학을 그만두고 독문학으로 옮겨간 이유조차도 의심스럽다. 누구보다도 냉철한 법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을 텐데, 아마 그는 누군가를 법이란 것으로 대하기에는 스스로의 사상이 의심스러웠는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 가혹할 정도로 정직하고 그로 인한 현실과의 괴리감을 견디지 못 했던 한 천재는, 그렇게 자살로 내몰려졌던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