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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피플 존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평점 :
참 오랜 만에 적어보는 리뷰이다. 코로나 시간의 5년은 많은 것의 변화와 함께 또 많은 것의 잃음을 겪게 했다. 우선 아이가 집에서 온라인으로 수업을 하게 되니, 컴퓨터를 양보하기 위해서 서재를 내주게 되었다. 그래서 아침에 미리 책을 꺼내두지 않으면, 그 날은 하루종일 책 근처에도 못 가는 나날이었다. 또 아이가 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니 나는 소음을 내면 안 되게 되었고, 그래서 t.v.도 못 켜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접하게 되고, 모든 것을 작은 화면에서 훑어보듯이 손가락으로 넘기게 되면서 짧은 시간도 집중을 못 하는 상태로 점차 변해간 것을 내 자신조차도 몰랐다. 어느 순간 종이에 써져있는 활자를 읽으면, 한 문단을 읽고 다음 문단으로 넘어갈 때마다 위의 내용과 연결이 안 되어서 당황했을 때... 내가 진짜 당황한 이유는 내 눈을 통해서 들어온 정보가 뇌에서는 전혀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1년 여의 시간을 거쳐서 아이는 결국 학교로 돌아갔지만, 내게 새로이 아로새겨진 습관은 사라지지 않았고. 아차 싶어서 어떻게든 활자에 대해 다시 집중을 해보고자 일부러 신문까지 구독해봤지만, 읽지도 않은 상태로 집에서 습기제거제로 사용되는 날이 길어지다 보니 결국 구독도 취소해버렸다. 이렇게 뇌에 자극없이 지내보니 '뭐 이것도 나쁘지는 않네, 평온하네' 하는 생각에, 어찌보면 참 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뇌도 근육이라고 안 쓰면 퇴화되는 속도가 가속화하는 것일까, 어느 순간부터는 돌아서면 방금 전의 일이 기억이 안 나고. 외서를 읽으려고 하면 새로운 단어를 습득하기는 커녕 기존에 알고 있던 단어의 뜻조차 기억이 안 나거나, 일상생활에서는 고사성어가 떠오르지 않게 된 내 모습에 또 놀라게 되고.. 오랜 만에 서재의 책장 앞에 서서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들의 책등을 읽으며 어디부터 손을 대야 이 고약한 습관이 조금이나마 사라지게 될까 고민하기에 이르렀네..
책꽂이에 얌전히 앉아서 내가 다시 오기를 기다리기만 했었을 다양한 컬러의 책등들에 각기 다른 활자체로 씌여진 제목들을 읽다보니, 새삼 내가 참 편식을 해왔구나 싶다. 역사서나 명상서적, 에세이, 히말라야 여행서, 일본만화, 물리학자들이 물리학을 넘어서서 우주의 면면을 아름다운 언어로 철학적으로 풀어놓은 책들, 영혼의 여행기록, 그리고 언젠가는 읽어보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사두고 쌓아놓기만 했던 온갖 철학서. 책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책들을 보고 있자니, 이미 읽은 책들은 너무나 좋아하는 것들이라서 그간 여러 번 읽다보니 굳이 다시 손이 안 가는 아이들, 그리고 아직 안 읽은 책들은 딱 각을 잡고 앉아서 읽어야 하는 느낌이라서 선뜻 손이 안 가는 아이들로 나뉘어지더라. 일단은 다시 활자에 익숙해지는 생활로 돌아가자니, 그냥 아무 때나 편하게 읽다가 내려놓고 또 지나가다가 뭐 해? 하고 툭 건들여서 읽다가 내려놓고 할 수 있는 책이 필요한데 싶어서 고민하던 차에.. 산지도 몰라서 한 번 더 사고. 결과적으로 같은 책이 2권이나 되어 나란히 꽂힌 소설, 노 피플 존을 보게 되었다. 정이현 작가, 첫 장편소설이라 발표했던 "달콤한 나의 도시"를 읽고난 뒤부터 무척이나 좋아하게 된 작가로 조금이나 멈춰버린 내 뇌에게 다른 자극을 주고자 샀나본데, 난 그 사실조차 잊고 또 샀구나.. 실소를 하면서도 그 덕에 마음 편히 꺼내보게 되었다.
거실에 놔두고 t.v.를 보다가 열어보고, 졸다가 열어보고, 자러 들어가서 침대 옆에 놔두고 졸릴 때까지 읽어보고. 앞의 읽은 내용을 고스란히 머리 속에 간직하고 있지 않아도 죄책감 없이 이어나갈 수 있는 순간들을 그대로 받아주는 단편들의 모음집이라 마음 편하게 읽어나가는 중이다. 그러다 보니 아직은 완독하지 않은 상태이나, 읽으면서 느낀 점을 조금이나마 기록함으로써 내가 무엇인가 읽고있는 중이고 그걸 통해서 무엇인가 생각을 해봤단 점을 기억하기 위해서 불완전한 리뷰를 적어본다.
달콤한 나의 도시를 접한 것은 거의 20년 전일 테니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느낌으로 남았는지 생생히 기억에 남아있지는 않다. 작가의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으나 처음 접한 소설에서는 아마 30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을 해본다. 사회의 메카니즘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그것을 어느 정도 활용하면서도 또 그렇게 맞물려 돌아가는 사회의 톱니바퀴 끝에 행여나 내 자신이 걸려서 찢길까 어느 부분에서 조심하고 어떻게 자기방어를 하면 될지 아는, 그런 나이대. 무엇인가 적당히 알기에 적당히 자신감이 있으며 무엇인가 아직은 모르기에 또 적당히 무지에서 비롯된 교만이 공존하는 나이대.(적어도 내 30대는 그랬다..) 도시인인 주인공에게서 기성 도시 안에 녹아들아가면서도 또 그 도시에 작게 변화의 파문을 일으켜나가는 현대인의 모습이 보여서 더 쉽게 공감하고, 아마 그렇게 그 소설의 주인공(들? 그것도 단편집이었을까..)과 함께 걸어나간 도심 속의 시간들이 낯설지 않아서였을까, 한편으로는 패기만만해보였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 후로의 세월은 내게도 세상에게도, 그리고 아마 작가에게도.. 공평하게 흘렀나 보다. 우린 적당히 때가 묻었고 적당히 주제를 파악하게 되었으며, 적당히 수그러들었고 또 그래서 때로는 그 변화에 격렬하게 한 번씩 반항같은 느낌으로 아직은 아니라고 대들어보기도 하는.. 그런 시간이었던 것 같다. 아직은 단편 몇 개만 읽었지만.. 노 피플 존에서 접한 주인공들은 그렇게 보였다고 하면 또 내가 너무 내 본위로 읽은 것을까. 사회에 새로 나가서 자리를 잡아가는 가운데, 남들이 보기에는 분명 자리를 잡은 것이 맞는데 스스로는 아직도 혼란스럽고 그 괴리감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조차 모르는 답답함. 난 분명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내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함으로써 이 사회 안에서 한 명의 성인으로 사회인으로 자립하고자 애쓰고 있는데, 정작 그 사회에서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묘한 이물감. 그리고 그 때 한 개인으로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몇 가지나 될까. 나라는 사람의 앞날을 걸고 선택해야 할 때, 내 앞에 놓여진 경우의 수가 많기는 할까. 그대로 주저앉자니 억울하고, 한 번 발악이라도 해보자고 덤비자니 무섭고. 어느 쪽이든 해봤더니 그 결과는 내게 만족스럽지가 않고.. 소설 속에 나오는 이들은 허구의 인물들인 것이 분명한데. 나는 또 다시 그 주인공들의 모습 속에서 세월의 흔적을 느낀다.
뭐든 열심히만 하면 다 될 것 같은, 젊음의 패기로 똘똘 뭉친 20대를 넘어서서, 적당히 실패해보고 적당히 타협해보고 또 적당히 무시당해보면서 무난히 지켜온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서 이제는 웬만한 파도는 적당히 해쳐나갈 수 있겠네 하는 (실상은 어리석은) 깨달음을 기초로 다져진 자신감의 30대. 그런데 그 깨달음이라 생각했던 것이 또 허상임을 알아나가게 되는 40대를 지나오면서,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비록 그 나이대가 30대 정도로 나와도 내게는 40대의 풍미가 느껴진다. 어쩌면 이것은 작가가 의도한 주인공들의 모습이 아닐지 모른다, 단지 내가 내 기억을 반영해서 왜곡한 것일 수도. 하지만 내 기억 속의 달콤한 나의 도시 속 주인공(들?)과 노 피플 존의 주인공"들"은 그 정도의 차이는 느끼게 해주고 있다. 세월의 흐름인지, 아니면 (또 내 착각으로 비롯된) 내 교만인지는 모르겠으나.. 뭐, 설사 그렇다 해도 어떠랴. 어쨌거나 새롭게 접하고 있는 주인공들의 족적을 따라서 다행히 내 뇌는 조금씩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듯 싶다. 새로운 자극(?)에 무엇인가를 느끼고 기억해내고 생각해보고, 그러다가 멈춰서서 그대로 모든 것을 정지해보고. 이 움직임조차 허상인지 아니면 실제로 존재하는 변화인지, 좀 더 알아보려면 역시 끝까지 다 읽어보고나서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