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금융 허브? 헛고생 마라”

2003년 12월  [한겨레21]

세계화와 무역 자유화의 허상 폭로해온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한국 경제 진단

장하준(40)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부 교수(개발경제)는 지난 10여년간 제3세계 경제와 세계화에 대한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해온 대표적인 소장파 경제학자다. 그는 세계화와 무역 자유화가 개도국·후진국에 번영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이 환상이라는 것을 지난 200년간의 선진 각국 자본주의 발전연구를 통해 역사적으로 폭로해왔다. 19∼20세기의 선진국 경제발전은 강력한 보호무역주의와 국내 유치산업 보호를 통해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1월 한국인 최초로 제도경제학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지닌 ‘뮈르달 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또 세계무역기구(WTO)·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은 개도국이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기 위해 경제발전의 사다리를 오르려 할 때 이 사다리를 차버리는(Kicking Away the Ladder) 수단이라고 줄곧 비판해왔다. 역사적 실증을 통해 세계화에 대한 ‘이론적 저항’을 해온 셈이다. 39살의 나이로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후보 물망에 올랐던 장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90년부터 이 대학 교수로 재직해왔다. 고려대학교 교환교수로 올해 한국에 와 있는 그를 만났다.

글로벌 스탠다드 강요하면 안된다

-미국은 제3세계와 개도국이 성장하려면 글로벌 스탠더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글로벌 스탠더드나 좋은 기업지배구조는 경제성장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다. 경제가 성숙해 선진국에 진입한 다음에 형성된 것이지,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도입한 게 아니다. 개도국이 자신들의 경제발전 경로를 선택할 때 역사적으로 왜곡된 정보를 줘서는 안 된다. 글로벌 스탠더드가 경제성장의 동력이 될 수 있다면서 이것 안 하면 망한다는 식으로 처방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물론 발달된 제도와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발달 단계에 맞고 사회적 목표에 부합하는 제도인지 따져봐야 한다.

-역사적으로 왜곡된 정보란 무엇을 뜻하는가.

=선진국들이 개도국·후진국에 자유무역과 외국인 투자 개방을 외치고 있지만 사실 그들이 후진국·개도국이었을 때는 보호무역을 하고 외국인 투자를 철저히 규제했다. 자유방임 시장논리를 전파하는 미국을 보자. 유치산업 보호의 원조이자 모국은 사실 미국이다. 미국은 19세기에 세계 최고의 관세율로 유치산업을 보호했는데, 1890~1910년 관세가 가장 높았던 시기에 미국의 경제성장률이 가장 높았다. 1차대전 이전까지 미국은 금융·해운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를 아예 금지했고, 농지·광산채굴·벌목권에 대한 외국인 투자도 강력히 규제했다. 인디애나주에서는 외국 기업에 아예 법적 보호도 못 받게 했다. 미국은 지금도 국내 산업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정부가 개입해 산업정책을 펴고 있다. 전체 연구개발(R&D) 비용 지출을 보면 한국과 일본은 정부 지출이 20∼30%인데 미국은 70% 안팎이다. 국방·항공산업·컴퓨터·생명공학에서 미국 정부가 차세대 성장동력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맥도널 더글러스사가 보잉사에 통합될 때 민간 ‘시장’에서 자유롭게 인수합병이 일어난 게 아니다. 미 국방성이 더글러스사의 납품을 3차례 연속 거부하는 방식으로 정부 개입을 통해 조용히 통합시키는 산업정책을 썼다.

-자유무역은 제국주의 팽창의 논리이고 다른 나라의 산업화를 봉쇄하려는 정책인가.

=세계무역기구는 “너희들(개도국)이 지나치게 국내 산업을 보호하려다 다 망했잖아?”라면서 유치산업 보호는 잘못 쓰면 스스로 다치는 칼이라고 주장한다. 자기들은 그런 칼을 쓴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호무역을 잘못해서 실패한 나라도 있지만, 보호무역을 안 해서 성공한 나라는 없다. 보호무역을 안 하고 더 빨리 성장한 국가도 없다. 미국이 2차대전 뒤 무역과 투자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했지만, 세계 경제의 최강국이 되면서 자유화를 하는 게 자국의 이익에 유리했기 때문이지, 뒤늦게 자유무역 이론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다.

-각종 규제나 노사관계 때문에 외국인 투자가 줄어들고 있다고 하는데.

=환란 이후 외국자본에 부실기업을 마구 팔 때 외국인 직접투자가 크게 늘었다. 지금와서 그때에 비해 직접투자가 떨어졌다고 난리고 또 이는 경제정책의 실패 탓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지금도 그때처럼 기업을 막 팔아야 하는 상황이란 말인가? 외국자본이 한국에 들어올 때는 물건 팔아먹을 시장이 얼마나 큰지, 시장이 성장하고 있는지, 노동력의 질이 어떤지 등을 따지는 것이지 노사관계, 규제, 법인세 같은 건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세금 인센티브로 끌어들인 외국자본은 그 매력이 없어지면 언제든 보따리 싸서 떠나버리게 마련이다. 사실 떠나는 자본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빠져나간다. 한국을 떠날 생각이 없고, 나가기 어려운 외국자본만이 꼭 노사관계가 어떠니 규제가 어떠니 하고 문제 삼는다.

-자본에 색깔과 꼬리표가 있는 건 아닌데.

=자본에 국적이 없다는 말은 강대국 자본들이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하다. 자본에 국적이 없다지만 자본의 핵심 경영진은 철저하게 국적을 따른다. 물론 기업과 은행을 무조건 한국 사람이 가져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자본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느냐가 문제다. 한국 경제 시스템을 재조직해야 하는 시점인데, 은행 중심으로 가는 것인지 펀드 중심으로 가는 것인지 재벌 중심으로 가는 것인지 명확한 청사진이 전혀 없다는 게 문제다.

-동북아 금융허브 구상은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가.

=세계 금융의 중심이 암스테르담, 런던, 뉴욕으로 이동한 것은 그 나라의 제조업 발달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앞으로 100년간 손실을 보전해준다는 약속이 있으면 모를까, 그런 약속 없이 오랫동안 홍콩, 싱가포르에 뿌리박고 영업해온 국제금융 센터들이 한국으로 옮겨올 리 만무하다. 동북아 금융허브는 좋은 말로 헛고생이고, 자칫 남의 장단에 춤추는 꼴이 될 수 있다. 허망한 꿈을 좇을 게 아니라 잘할 수 있는 곳에 우리 경제의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우리나라 재벌체제는 어떻게 개혁하는 게 바람직한가.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대성공, 그리고 삼성자동차 실패는 재벌체제라는 같은 구조에서 나온 것이다. 재벌체제는 자금동원력을 통해 대규모 투자를 과감하게 할 수 있고 계열 기업간 상호 보조를 통해 장기적으로 전망 있는 산업을 키울 수 있다. 그러나 채산성 없는 부실기업을 지탱시키고 계열사 연쇄 부실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위험도 크다. 재벌은 장기적인 성장동력이나 국민경제 틀 안에서 봐야 한다. 물론 재벌총수 가족의 지배권이 보장돼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제도는 장단점이 있다.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없애나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문제는 타율이다. 재벌체제 개혁은 재벌이 한국 경제에서 3할대를 치도록 할 것이냐 4할대를 치도록 할 것이냐는 차원에서 고민해야 한다. 경영권 안정을 위한 방안은 없나

-기업들의 설비투자가 크게 축소된 이유는 뭐라고 보나.

=투자가 갑자기 예전의 3분의 2 수준으로 뚝 떨어졌는데,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설비투자 감소는 노무현 죄도 아니고 북핵 죄도 아니다. 한국 경제 시스템이 바뀌면서 투자가 떨어지고 있다. 기업마다 주주가치 극대화를 추구하면서 단기 수익만 좇다보니 모험적이고 위험한 장기 투자는 꺼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자본시장 자유화로 적대적 M&A가 가능해져 기업마다 경영권 방어를 위해 자사주를 매입하고 유사시 외국자본의 경영권 위협에 대비한 실탄을 내부 유보 자금으로 틀어쥐고 있다. 경영권이 불안하면 투자지평이 협소화·단기화될 수밖에 없다. 한국 경제가 적당히 3%대 성장하고 말 것이라면 모를까, 국민소득 2만달러의 야심이 있고 진짜 선진국으로 가려면 이런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다.

-설비투자 확대의 전제조건으로 기업의 경영권 안정이 필요하다면 그 방안은.

=연기금이 기업 주식을 사들여 경영권을 안정시키고 국민경제 이익에 맞게 의결권을 행사할 수도 있고 공기업을 끼워서 기업들끼리 우호지분을 사주는 방식으로 경영권 안정을 도모할 수도 있다. 일본처럼 가족 소유 없이 주거래은행·계열기업·대형 하청업체 등 이해 당사자들이 상호간에 우호지분 보유를 통해 경영권을 안정시키고 재벌체제 내부를 감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글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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