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자는 아직 주둥이가 노란 미숙자이다. 모든 장소를 고향이라고 느낄 수 있는 자는 이미 상당한 힘을 축적한 자이다.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생각하는 자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 
    -12세기 독일 스콜라 철학자 생 빅토르 후고의 <Didascalion>의 말로, 아우엘바하의 <Philologie der weltliteratur>와 Edward Said의 <Orienatalism>에서 재인용되고 있음.

Bourne Identity와 Bourne Supremacy

'Bourn(bourne)'은 '경계', '한계'를 의미하는 古語. 1편은 주인공 본이 처한 상황을 의미하는 제목이었다면, 2편의 제목은 재미있게도  'Bourne is Supremacy' 라는 의미가 된다. Supremacy는 어느 누보다도 많은 힘, 권위 그리고 지위를 누리는 자리라는 의미로 경계 위에 선 '본'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인간"이란 의미도 된다.

그렇지만 영화에는 두 가지 요소가 충돌하고 있는데 원작자의 경계적(무소속의/고향없는) 정체성에 대한 찬양과 감독의 '진실과 화해'를 위한 기억의 책임이란 문제가 공존한다. (감독 폴 그린그라스는 아일랜드판 광주학살을 다룬 <블러디 선데이>의 감독이기도 하다.) 아마도 '보편적 진실'을 추구하는 CIA의 랜디에 대비되는 본의 모습이 부각되려면 감독의 색깔이 좀 죽어줘야 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생 빅토르 후고의 유명한 문장을 영화에 적용해 본다면, 우리는 영화 속에서 세 인물을 골라낼 수 있다. 우선 "주둥이가 노란 미숙자"는 트레드스톤의 전 책임자였던 남자(자칭 애국자)가 되고, "이미 상당한 힘을 축적한 자는 CIA의 랜디 국장이, 본은 "완벽한 인간"이 된다. 자칭 애국자인 남자(배역상 이름을 기억못함^^-이하 애국자)는 미국이 고향/조국인 사람이고 랜디는 진실이 고향/조국인 사람이라면 본은 온 세상이 다 타향/타국인 사람이다.

랜디는 시종일관 보편적 '진실'의 세계 속에 사는 사람이다. 이에 대해 양측에 그런 것 따윈 없다고 주장하는 두 사람(애국자와 본)이 있는 것이고 애국자는 자멸하지만 본은 다시 자기 본디 정체성엔 무심한 채 어디론가 날아간다. 본의 기억상실증은 초반에는 짐이었지만 후반에는 날개같은 것이 된다. 단 기억상실증 속에서 기억해야될 책임이 있는 것을 복구한 후에 그렇게 된다. 여기엔 감독의 주장이 강하게 반영된 것 같다. 여하튼 영화는 주인공의 정체성이 자명하게 밝혀지는 것을 계속 지연시킨다. 영화가 끝나도 관객은 그가 본디 누구였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곤 본의 마지막 대사로 그런 것 따윈 "피곤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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