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문제는 ‘관계’로서의 동아시아

[학술- 다시, 동아시아!]

서구에 대비되는 실체로, 민족국가 단위로 규정하다 보면 역사 왜곡이나 통일에 대비할 수 없다

▣ 성근제/ 연세대학교 강사 · 중문학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동아시아’는 누가 뭐래도 꽤 잘나가는 물건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 21세기 ‘뜨는 중국’이 화려한 배경을 받쳐주는 데 힘입어 이른바 ‘동아시아 담론’은 그 논자와 갈래들을 일일이 거론하고 분류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고 폭넓게 전개됐다. 목하 동아시아는 넘쳐흐르고 있다.


△ 일제의 만주국에 점령당했던 중국 철강도시 안산. 동아시아를 국가단위로 규정할 때 대만이나 만주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사진/ GAMMA)

오도된 오리엔탈리즘의 운명

그러나 동아시아는 여전히 목마르다. 그리고 이 목마름은 다양다기한 분화와 확산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동아시아론들’이 공유하고 있는 몇 가지 공통된 특징과 편향성에서 기인한다.

최근의 동아시아론은 1989년 전후의 극적인 국내외적 변동으로 인한 이데올로기적 지형 변화의 틈새를 파고들며 새로운 ‘대안적’ 담론으로 부상했다. 물론 이러한 대안적 동아시아론이 1990년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조금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동아시아론은 20세기 역사의 중요한 고비고비마다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고 또 사라져갔다. 20세기 초반 중국의 동서문화 논전이 그러했고, 1920, 40년대 일본 대동아공영의 논리가 그러했다. 그것은 서구적 모델 혹은 그 세력이 ‘문제’의 원인으로― 혹은 그것의 ‘위기와 한계’가, 혹은 그것의 ‘위협과 적대성’이― 지목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곤 했다. 90년대 이후의 동아시아론 역시 다를 바 없다. 그것은 89년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 가져다준 충격으로 인해, 문제의 근원에 대한 관심과 탐색이 정치경제적 체제와 제도로부터 서구적 근대성의 근본적 한계라는 문제로 이동·심화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이름을 앞세운 새로운 차원의 공세가 본격화되는 조건 속에서 새로운 등장을 위한 조건을 발견했다. 말하자면 동아시아론은 언제나 ‘서구’라는 대립항의 존재와 그것의 위기를 전제로 하여 구성되는 대안담론이자 안티테제였던 셈이다.


△ 중국 동북부 지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은 단순히 한국과 중국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과 미국, 동북아 전체의 '관계' 문제이기도 하다. (사진/ 오효정 제공)

조악을 감수하고 대별하여 이야기해보자면, 이러한 대안적 동아시아론에는 크게 두 가지 부류가 존재한다. 하나는 동아시아 문명(문화)론이며,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 연대론이다. 전자는 자본주의적 근대의 근저에 깔려 있는 서구 문명의 특징들을 위기의 근원으로 지적하며, 동아시아 문명의 부활과 패러다임의 전환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후자는 아시아 사회의 근본 문제를 ‘서세동점’으로 요약할 수 있는 힘의 불균형과 불평등으로 지목하며, (동)아시아의 단결과 연대를 통해 힘의 불균형에 대응할 것을 주문한다. 이처럼 양자 사이에는 문제 설정에서 실천에 이르기까지 적잖은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 ‘서구’라는 타자의 존재를 자기 입론을 위한 기본 전제로 요구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일치하는데,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문제란 바로 거의 모든 동아시아론이 ‘동아시아’라는 개념을 존재론적 실체로 상상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언제나 서구라는 타자와의 대비 속에서 구성되기 때문에, 이른바 ‘서구’가 아시아인들의 눈과 언어에 의해 발견되고 규정되는 수준과 정도에 비례하여 똑같이 실체화되고 규정되며, 따라서 탈역사화될 위험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동아시아를 탈역사화된 존재론적 실체로 상상하는 동아시아론은 동과 서를 이원대립적인 선악 구도 속에서 기술하며, 중요한 사유의 길목마다 양자택일적 선택을 강요하고자 하는 유혹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그것은 서구에 대한 심각한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오도된 오리엔탈리즘의 운명과 닮아 있다.

역사 왜곡은 중-미 관계에서 시작

대안적 동아시아론에 부가될 수 있는 또 하나의 혐의는 그것이 여전히 민족국가 단위의 사고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익숙한 이야기이지만, 동아시아를 이야기할라치면 늘 뒤를 밟아 등장하는 것이 ‘한·중·일’이라는 국가의 명칭이며, 베트남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몽골은 왜 빠져 있느냐는 질문이다. 말하자면 동아시아의 범위를 ‘국가’ 단위로 규정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주의와 지역주의와 국가주의가 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이러한 관점이야말로 동아시아를 ‘규정’지어 사고하려는 부질없는 노력의 부산물이자, 살아 움직이는 오늘의 동아시아를 올바르게 사유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주요한 걸림돌 가운데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국가 단위의 사고가 지속되는 한 조선족(자치주)와 만주의 문제 그리고 극동러시아와 내외 몽골의 문제, 북한과 대만의 문제 등 동아시아의 핵심적 사안들에 생산적인 논의의 초점이 맞추어질 가능성은 대단히 낮기 때문이다.

8월로 접어들면서 중국의 역사 왜곡 문제가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중국이 역사 문제를 본격적으로 들고 나오는 것이야말로 한반도의 통일 과정이 비로소 제 궤도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면서 짐짓 기대 섞인 반응을 보인다. 이것이 옳은 이야기일지 아닐지 필자로서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오히려 필자는 중국이 얼토당토않은 고구려 역사 문제를 저렇게 본격적으로 들고 나오는 것이야말로 한반도의 향후 통일 과정이 얼마나 고되고 파란만장할지를 암시하는 징조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고구려 역사 왜곡 문제에 대한 우리의 대응 방식이다. 정부도 학계도 언론도, 심지어 앞서가는(?) 네티즌들까지도 이 문제를 전적으로 한국과 중국 사이의 문제로‘만’ 파악하고 있으며, 사태의 본질을 중국의 변방국에 대한 패권주의적 의식의 발로로만 해석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의 형식적 당사자가 한국과 중국인 것은 사실이며, 중국의 패권주의가 드러난 것이라는 지적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적어도 중국의 수가 한반도 통일 이후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지적이 옳다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할 때) 중국이 두고 있는 수는 우리를 향한 것일 뿐만 아니라 미국을 향한 것이며, 때문에 그것은 주변의 작은 나라들에 대한 ‘패권주의’임과 동시에 통일 이후 미국의 동북아 영향력 확대에 대비하기 위한 선수(先手)이기도 하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중국 태도에 대한 옹호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우려할 만한 사태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미국이라는 양대 강국이 다시금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건곤일척의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연구자들은 왜 북한을 모르나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우리의 동아시아론이 새롭게 구성되고 더 발전적으로 확산되기를 기대한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동아시아라는 존재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다양한 역관계의 얽힘으로 구성된 동아시아라는 ‘관계장’(關係場)에 대한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이해와 관심이다. 20세기의 우리 역사는 식민과 분단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그 두 사건의 주요한 효과 가운데 하나는 바로 남한의 동아시아로부터의 탈각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분단과 아시아로부터의 탈각이 그러했던 것처럼, 통일과 아시아로의 복귀 역시 전적으로 우리의 의사와 일정에 따라 이루어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 통일은 도둑같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가 ‘동아시아’라는 ‘관계’의 역학적 중심에 자리잡고 있고, 그 관계들을 구성하는 다양한 힘과 역사들을 우리 뜻대로 조절할 수 있는 힘을 현실적으로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느 시점에 그 사건들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의 통일 이후에 대한 대비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필자가 현대 중국문학을 공부해오면서 가장 아쉽고 당혹스러웠던 것을 하나 꼽으라면 역시 중국문학 연구자들의 북한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지극히 박약한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제일 먼저 꼽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오로지 중국문학 연구자들의 게으름이나 시야의 협소함 때문이라면 오히려 문제는 단순하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당혹스러운 사실 가운데 하나는 우리 사회의 북한 문학 연구자들 속에서도 중국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축적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 문학을 전공하는 국문학도들 역시 상황은 별로 다르지 않다. 중국을 이해할 때에도 북한을 이해할 때에도 그리고 우리를 이해하고자 할 때에도, 중국과 북한 그리고 우리의 역사와 경험에 대한 상호 이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동아시아론은 넘쳐나지만, 동아시아에 관한 관심은 여전히 지극히 낮다. 이처럼 현실과 유리된 동아시아론을 살아 있는 동아시아에 대한 역사적 관심으로 확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관계로서의 동아시아’라는 화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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