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북한과 대만을 이야기하라

[학술- 다시, 동아시아!]

동아시아는 ‘본질’이 아닌 역사로 접근해야… 왜 지금 논객들은 북한에 무관심한가

▣ 김재용/ 원광대 교수 · 국문학

한국 근대사에서 동양 담론이 풍미한 것은 구한말시대도 아니고 현재도 아닌 일제 말이다. 1940년 6월 독일의 파리 함락이 조선 지식인 사회에 전해지자 적지 않은 지적 동요가 일어났다. 많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파리의 몰락은 곧 서구 근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중-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굳어지는 결정적 계기인 1938년 10월의 무한 삼진의 함락을 보면서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신중했던 지식인마저 파리 함락을 전해들으면서는 심한 지적 충격을 받았고, 그 와중에서 붙든 것이 바로 동양 담론이었다.


△ 6월23일 열린 3차 6자회담 참가자들. 북한을 비롯한 남북 문제를 중심에 두고 동아시아를 조망해야 한다. (사진/ 연합)

파리 함락과 동양론의 확산

유럽의 지식인과 달리 조선의 지식인들은 유럽 근대 문명의 종말을 서구의 몰락이라고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동양의 발견과 재인식으로 키워나갔다.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이러한 인식이 물론 조선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당시 일본의 경도대학 철학과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지식인들이 파리 함락을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동양을 발견하는 계기로 삼았던 것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여하튼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동양 담론은 최대의 화두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새로운 세계질서가 구축될 때까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동양 담론을 중심으로 모든 논의를 펼쳐나갔다.

문제는 어떤 동양론인가 하는 것이다. 아편전쟁과 명치유신 이후 정신없이 서구 근대를 추종하면서 달려온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동양 담론은 가지각색이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지식인에게 동양 담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하나는 서구 근대는 종말을 고하였고 이를 대신할 수 있는 문명은 동양이기 때문에 그동안 간과했던 동양의 특질을 고구(考究)하여 이를 오늘에 되살리는 것만이 지식인과 문학자의 임무라고 믿는 축이다. 이들에게는 민주주의보다는 도의(道義)가 훨씬 매력적인 어휘로 등장한다. 동양에 대한 본질주의적 접근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이 태도는 당시 동아시아의 현실, 즉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서구에 맞서 동양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중국을 침략하는 것이 갖는 구체적 역사의 의미에는 무관심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서구 문명의 구원자로서의 동양이고, 이것이 주축이 되는 새로운 세계질서이다. 세계사적 질서의 창출이라는 거대한 이야기에 비하면 식민지로 점철된 동아시아 각국의 구체적 현실은 일시적이고 현상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경성제대에서 일찍이 영문학을 전공하고 이후 영국을 비롯한 유럽 문학계 소식을 동시적으로 소개하는 일을 하면서 자신의 비평적 전망을 탐구했던 최재서가 이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1차대전 이후 유럽 문명의 위기가 한층 심화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이를 날카롭게 들추어냈던 영국과 유럽의 작가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최재서에게 파리 함락은 사고 전환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유럽 문명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벌였던 온갖 지성적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간 마당에 더 이상 유럽에 기댈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제 서양에서 벗어나 동양을 찾아나서게 된다. 엘리엇이 근대 유럽에 실망한 나머지 전근대 유럽의 가톨릭에 귀의하는 것까지도 안쓰럽게 볼 정도로 최재서는 서구의 대안으로 동양에 확신을 가졌고, 자신이 그 한복판에 서 있다는 것에 큰 자긍심을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대동아공영권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이를 지지했으며, 서양에 맞선 동양의 이 전쟁을 세계사의 신질서를 창조하는 성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 이처럼 식민주의에의 협력으로 치달았던 본질주의적 동양 담론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역사주의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존재했다. 아편전쟁 이후 서구 근대의 파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었기 때문에 조선과 동아시아를 제대로 관찰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면서 유럽중심주의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한다. 하지만 이들은 전근대 동아시아 지역의 지적·문화적 자산을 본질화하는 것에 반대하는 한편, 서구 근대가 갖고 있는 진보성에 대해서도 정당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섣부른 근대의 초극보다는 근대의 차분한 청산이 더욱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 3월21일 선거에서 승리한 뒤 지지자들에게 답례하고 있는 대만의 천수이볜 총통. 중국은 대만 문제를 북한 문제와 연관지어 이해한다. (사진/ GAMMA)

본질주의? 역사주의!

이들은 일본이 동양 담론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식민주의적 책략을 감행하는 것에 대해서 강한 비판의식을 가졌다. 본질주의적 동양론이 간과했던 점을 역사주의적 동양론은 간파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대동아공영권을 서구 근대의 변형된 아류로 간주하고 이에 동참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 센다이의 동북제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주로 1차대전 이후 영국과 유럽에서 전개된 근대 문명의 억압을 넘어서려는 문학가들의 노력을 소개하면서 시작활동과 비평활동을 하였던 김기림이 이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1990년대 이후 전개된 동아시아론에서도 이러한 두 가지 접근방식을 상정할 수 있다. 유교자본주의론이 본질주의적 접근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라고 생각하지만 그 이외의 동아시아론에도 이런 점을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주의적 접근인데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동아시아를 이야기하는 논객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하는 북한에 대한 무관심과 배제이다.

현재 동아시아 특히 동북아에서 가장 심각한 현안 중의 하나가 남북 문제이다. 유럽이 공동의 헌법을 마련하는 것과 달리 동북아에서는 아직 국가간의 초보적 관계인 외교관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형편이다. 북-일간의 수교 교섭이 1992년 이후 시작됐지만 1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앞날을 예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본의 우익은 북한을 타자화하면서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 있어 민주적 아시아 건설의 큰 장해물로 성장하고 있다. 미국의 동북아 정책이 핵심 변수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동북아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북아는 항상 위험한 상황 속에 방치되고 있다. 북핵 등 주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한반도는 무서운 전쟁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결코 평화롭지 못한 조건에 놓여 있다. 상황이 이렇게 진행되고 있음에도 동아시아론에서 북한을 비롯한 남북한 문제는 정당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대만 문제 해결 없인 남북 문제도…

이 문제는 비단 일본에 국한되지 않고 중국에까지도 미친다. 대만의 독립파들이 정권을 잡은 2000년 이전에 중국이 우려한 것은 남한 중심의 통일로 인해 미군이 중국 국경선에 배치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식량과 원유 등의 지원을 통해 북한의 붕괴를 막았다. 하지만 대만 문제가 중국의 현안으로 떠오른 이후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남북 문제에 개입하여 6자회담의 주도권을 쥐려고까지 하고 있다. 대만의 독립파들이 정권을 잡기 전까지만 해도 대만과 북한 문제는 별다른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대만의 독립파들이 정권을 잡고 공공연하게 중국으로부터 분리를 외치고 이를 일본과 미국이 뒷배를 보아주는 상황에서 중국은 대만 문제를 북한 문제와 연관시켜 이해하게 되고, 따라서 동남아의 대만과 동북아의 북한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중국으로서는 미국과의 협상에서 항상 대만과 북한 문제를 동렬의 차원에 올려놓고 사고하기 때문이다. 대만 문제의 해결 없이는 남북 문제의 궁극적 해결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대만과 북한을 맞바꿀지도 모른다는 일각의 무서운 우려가 턱없는 잠꼬대로만 들리지 않는 것도 이러한 상황 때문이며, 동아시아 지역에서 한반도보다 더욱 위험한 지역이 양안이라는 이야기가 그냥 들리지 않는 것도 이러한 정황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두 위험한 지역이 세계 질서의 차원에서 이렇게 연동되는 것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동아시의 역사적 현재이다.

이처럼 현재 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를 차지하는 북한을 고려하지 않는 동아시아론이 얼마나 역사적인 접근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필자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 중 하나이다. 물론 동아시아론을 이야기하는 논자들 중에서 분단을 고려하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지만, 이것 역시 북한을 비롯한 남북한 전체에 대한 구체적 성찰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선언적인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동아시아론이 더욱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역사주의적 접근이 긴요하며, 그것의 요체는 북한을 비롯한 남북 문제를 중심에 두고 동아시아를 조망하는 것이다. 청-일 전쟁으로 인한 대만의 식민지화, 일본의 식민주의와 한반도의 분단으로 점철된 근대 동아시아에 대한 차분한 결산만이 일제 말의 동양 담론 중 본질주의적 접근이 갖고 있는 과오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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