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동아시아, 논쟁의 릴레이를 시작하자

[학술- 다시, 동아시아!]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90년대 중반부터 한국 지식계에 퍼져나간 동아시아론은 10년의 세월을 거치며 진화를 거듭했다. 최근에는 국가가 동아시아 중심국가라는 정책적 과제마저 내걸 정도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대안적 이데올로기가 요청될 뿐 아니라 우리의 근대에 대한 반성과 탈근대를 사유하던 시기, 동아시아론은 근사한 ‘발명’이 아닐 수 없었다.


△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두서없이 쏟아져나온 그간의 동아시아론을 거칠게 요약하면 세 가지 정도의 갈래로 다듬을 수 있다. 첫째는 지금까지 동아시아 담론을 주도적으로 이끈 최원식·백영서 교수 등 계간 <창작과 비평>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론이다. 이들은 한반도 분단 체제를 푸는 작업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확보하고 서구적 근대의 진정한 대안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는 함재봉·유석춘 교수 등이 이끈 ‘유교자본주의론’이다. 70, 80년대 일본과 ‘네 마리의 용’이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자 서구는 기독교 자본주의와 대비되는 유교 자본주의 개념을 만들었다. 이들은 유교적 가치와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결합으로 공동의 번영을 추구하자는 입장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정경유착을 기반으로 한 아시아 경제체제에 대한 비판이 일면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셋째는 동아시아 문화론으로 뭉뚱그릴 수 있는 다양한 담론들이다. 이들은 유·불·선과 한자문화란 공동의 경험을 가진 동아시아를 가정한다. 계간 <상상>의 편집위원 정재서 교수 등은 동아시아적 문화적 정체성의 발견, 전통문화와 현대성의 창조적 결합 등을 모색한다. 그 외에도 한국이 문명의 중심 노릇을 해야 한다는 시인 김지하씨의 동아시아 문명론 등을 들 수 있다.

동아시아론의 역사가 지속되고 중요성이 부각될수록, 논쟁의 빈곤함은 더욱 두드러진다. 동아시아는 국가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성찰을 하고 있는가. 이보다 앞서 과연 ‘동아시아’라는 실체가 있는가. <한겨레21>은 지금 다시 동아시아론을 돌아볼 필요가 있음에 공감하고, 릴레이 기고를 마련했다. ‘다시, 동아시아’는 그 어떤 반론과 논쟁에도 문을 열어놓고 있다(제안은 bretolt@hani.co.kr로).

 

[학술] 그 동아시아론은 끔찍했다

[학술- 다시, 동아시아!]

피비린내 나는 19세기초 ‘일본발 동아시아론’…한국 지식인들은 역사의 경험 잊지 말아야

▣ 정선태/ 연구공간 수유 + 너머 수석대표

“일본 유명한 정치가 후작 이등박문씨가 이달 23일쯤 입성한다 하니 이등박문씨는 당금 세계에 유명한 정치가요 또 우리 대한 독립한 사업에 대공이 있는 사람이라. 이번에는 유람차로 오니 정부와 인민이 각별히 후대하기를 바라노라.” <독립신문> 1898년 8월20일자 잡보란에 실린 ‘후작 이등박문씨의 유람’이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독립신문>은 이 단신에 이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을 방문한 날부터 떠나기까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상세하게 보도한다. <독립신문>의 ‘요청’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대한제국 정부는 궁내부 대신 이재순의 감독하에 대대적으로 궁궐을 수리하는 등 ‘세계의 유명한 정치가요 대한 독립에 큰 공을 세운’ 이토 히로부미를 접대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 1909년 하얼빈역에 내린 '동양평화론의 전도사' 이토 히로부미(왼쪽에서 세 번째). 안중근에게 저격당하기 직전의 모습이다.(사진/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하나밖에 없는 영웅, 이토 히로부미?

정교(鄭喬)의 <대한계년사>를 보면 이토 히로부미를 향한 대한제국 지도층의 존경과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본 요릿집 국취루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 방문을 환영하는 성대한 연회가 열린다. 그 자리에서 각부 대신과 독립협회 지도부(윤치호·정교·이건호)가 그의 공덕을 칭송하는 시를 지어 건네자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과 같이 화답한다. “흉금을 털어놓으니 너와 내가 따로 없네(開懷無彼此)/ 고치기 어려운 버릇은 영웅을 사모하는 것이라(痼疾慕英雄).” 그러자 곁에 있던 정교가 이렇게 답한다. “하늘과 땅 가득히 감개가 무량하네(乾坤多感慨)/ 아시아와 유럽을 통틀어 한 사람의 영웅이 있도다(亞歐一英雄).”

아시아와 유럽을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영웅! 접대용 발언 또는 외교적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군비 확장을 통한 아시아 지배 전략 구상에 골몰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의 영향력이 너무나 막강했다. 일본을 일약 문명국의 반열에 올려놓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의 속국이었던 조선을 ‘독립’시키는 데 막중한 역할을 수행한 그는, 조선의 문명개화와 자주독립을 추구하던 사회적 지도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선망의 대상이자 존경에 값하는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 버마 미드키나에서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

공식적인 방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유람에 나선 일본 정계의 ‘거물’을 이처럼 성대하게 환영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 터이다. ‘동양평화의 전도사’를 자임하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대한제국 정부는 기꺼이 경부철도부설권을 ‘선물’로 주었으며, 열강들의 이권 침탈에 격렬하게 저항했던 독립협회에서도, 그가 중국으로 향하기 위해 인천으로 떠나던 날, 독립문이 그려진 은제 찻잔 한벌을 선사하면서 따뜻하게 전별했다. 그 대신 그는 자신의 안경을 깜빡 잊고 두고 떠났는데, <독립신문>은 8월31일자 ‘부끄러운 일’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등 후작이 외부(外部)에 갔다가 안경을 잃었다 하니 당당한 제국 외부에서 귀한 손님이 안경을 잃은 것은 남에게 들려주지 못한 수치”라며 정부 관계자를 질타해 마지않았다.

그로부터 6년 뒤 러일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04년 3월17일, 이토 히로부미는 특파대사 자격으로 서울에 온다. 이때에도 고종 황제는 그에게 대한제국시대 최고의 훈장인 금척대훈장을 수여하고 연회를 베풀어 융숭하게 대접했다. 러일전쟁을 수행하는 데 조선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내는 것이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의 방문 목적이었다. 그의 요구에 따라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라는 훈령을 내린다. 거래 내막을 상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이토 히로부미는 러일전쟁을 지원한 대가로 대한제국의 완전한 독립과 이를 기반으로 한 동양 평화의 수립을 약속했을 것이다. 이는 다른 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할 경우 “병력을 출동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또 조선으로 하여금 영원토록 재앙과 난리에서 벗어나도록 하며, 장래에 치안을 보존하여 동양 전체의 평화를 유지하려고 한다”는 일본 천황의 칙서(1894) 이후 되풀이돼온 ‘약속’이었다.

일본의 동양평화론에 배반당한 안중근

그러나 동양 평화의 전도사로서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동양이 낳은 영웅’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유지한다는 약속을, 한·중·일 3국이 연합 동맹하여 동양의 대세를 영원히 보전한다는 대의를 헌신짝처럼 팽개쳐버린다. 그리고 1905년 11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 그는 “사람을 압도하기에 충분한 음성과 웃음”으로 한국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다. 동양의 패자(覇者)답게 동아시아의 황인종을 생각해달라는 대한제국쪽의 간절한 요청은 너무나 허망하게 거절당하고 만다. 그는 너무나 당당하게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해야만 “두 나라는 행복해지고 동양의 평화는 영원히 유지될 것”이라며 조약 인준을 종용한다. 을사보호조약 제1조에 명기되어 있는 바와 같이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동아시아의 대세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이전의 친밀한 관계를 굳게 맹세하여 약속”하는 것, 이것이 동양의 영웅 이토 히로부미가 품고 있던 ‘큰 뜻’이었던 것이다.

안중근이 미완성 유고 ‘동양평화론’에서 밝히고 있듯이, 한국과 청국의 인민들이 일본 군대의 짐을 나르고 길을 닦고 정탐을 돕는 등 수고를 아끼지 않고 일본이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한 이유는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동양 평화를 유지하고 대한 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일본의 대의에 전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인종과 백인종이 경쟁하는 마당에 “같은 종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편이 되는 게 인정의 순서요 합당한 이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잇달아 승리하면서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일본이 한국과 청국의 많은 지식인들의 원망을 철저하게 배반하고 ‘같은 종족’을 침략함으로써 ‘제국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프로젝트를 현실로 옮기자, ‘테러리스트’ 안중근은 ‘배신자’ 이토 히로부미의 심장을 향해 총을 겨누었던 것이다.


△ 1937년 12월13일 중국의 난징 증산문을 점령한 일본군. 일본발 동아시아론은 한국과 청국의 지식인들의 바람을 철저히 배신했다.

침략의 논리 ‘아시아는 하나다’

동양 평화의 전도사에서 배신자로 전락하는 이토 히로부미의 모습은 동아시아연대론이 얼마나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제국주의 일본은 ‘배반의 역사’를 반복한다.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한 이후 1945년 8월15일 패전에 이르기까지, 특히 태평양전쟁에서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다시금 ‘동양 평화’를 전면에 내세우고 아시아 민중들을 고통의 시간으로 몰아넣는다. 동양의 평화를 외치면서 중국을 침략하고, 제국 일본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스스로가 젖줄을 대고 있는 서양을 쳐부수자고 선동한다. 이른바 영미귀축(英米鬼逐), 즉 영국과 미국의 귀신을 축출하자는 깃발이 아시아 전역을 뒤덮으면서 (동)아시아의 근대사는 죽음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일본의 ‘세계경영’ 욕망이 빚은 폭력과 희생을 정당화하고 이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던 것이 바로 ‘아시아는 하나다’라는 논리였다. 수많은 학자와 문인들이 앞다투어 동양을 이야기했고, 일본을 중심으로 동양이 강력하게 연대해야만 서양의 침략으로부터 동양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논리를 유포했다.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 예컨대 이광수·서정주·인정식 등도 이 논리를 자발적으로 내면화했으며, 일본인과 동등한 ‘황국신민’이 되어 당당한 일본제국의 ‘국민’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희구했다. 그들은 “서구의 족쇄로부터 아시아 인민을 해방한다”는 명목하에 자행된 소위 ‘해방전쟁’을 위해 조선인들 역시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할 것을 독려했다. 그리고 그 상흔은 아직껏 지워지지 않은 채 기회만 닿으면 망각의 사슬을 풀고 뛰쳐나와 우리의 기억을 교란시키곤 한다.


△ 중국인 포로들을 놓고 총검 훈련을 하는 일본군. '아시아는 하나다' 라는 논리가 그 끔찍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쓰였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서구 근대에 대한 대타 의식에서 출발한 동양평화론 및 대동아공영권의 논리가 제국주의 일본의 세계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시녀(侍女)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를 비롯해 오카쿠라 덴신, 미키 기요시 등 일본의 쟁쟁한 사상가들이 동양을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동양평화론을 역설했으며, 그 위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위시한 제국주의적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구상을 침략전쟁을 통해 현실화하고자 했다. 그들의 사고에 서양에서 출발한 자본주의나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은 깃들 여지조차 없었다. 악(서양)을 구축(驅逐)하고 새로운 중심을 세우려 했던 일본 근대의 이중성 또는 이율배반은 전도된 오리엔탈리즘이 얼마나 손쉽게 폭력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입만 열었다 하면 연대에 기초한 평화 구축을 내세웠던 제국주의 일본의 ‘약속’이 배반으로 귀결되면서 동아시아 근대사상사에서 동아시아론은 깊은 의혹의 눈길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서 ‘동아시아론’이 하나의 담론으로 떠오르고 있다. 동아시아를 말하는 논자들이 다양한 탐색을 행하는 중이어서 그 향방을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제국주의를 자본의 논리와 결탁한 국가주의의 확대판이라 할 수 있다면, 동아시아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확해진다. 한국 지식인들이 ‘발견’ 또는 ‘창안’한 동아시아론이 일시적인 ‘유행’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근대를 추동하는 두 축이자 전면적 폭력의 어머니인 국가주의와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사유의 모험으로 이어져야 한다. 태평양전쟁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일본 학계를 강타한 ‘근대초극론’이 허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도 국가주의와 자본주의를 불가침의 전제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

두번에 걸쳐 거센 파도처럼 밀려와 아시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던 일본발 (동)아시아론이 침략과 압제를 정당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역사적 경험을 우리는 다시 환기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와 국가주의 그리고 자민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철저하게 수행하지 않는 한, 한국발 동아시아론이 군사적 침략뿐만 아니라 경제적·문화적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전화(轉化)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했던가. 두번의 일본발 (동)아시아론은 한국의 동아시아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지시하는 반면교사라 할 수 있다. 역사를 향해 진지하게 되물을 때, 그러니까 일차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전개된, 국가주의에서부터 아나키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도 이질적인 사유의 흐름들을 아우르면서 진정한 연대에 의한 ‘동양 평화’를 모색해나갈 때, 우리는 제2의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겨누지 않아도 되는 세상, (동)아시아의 민중들이 평화롭게 함께 살아가는 진정한 ‘대동아공영’의 세상을 꿈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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