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업적 과잉 강조...王政 극복 문제의식 不在
본격서평:『고종시대의 국가재정 연구』(김대준 지음, 태학사 刊, 2004, 332쪽) 등
2004년 07월 14일   김재호 전남대 

김재호 / 전남대·경제사

 '고종시대의 재조명'은 1997년부터 1999년에 걸쳐 발표된 이태진 서울대 교수의 고종시대에 관한 논고를 모은 논문집이며,  '고종시대의 국가재정 연구'는 故 김대준 연세대 교수의 박사학위논문('이조말엽의 국가재정에 관한 연구(1895∼1910)', 연세대, 1974)을 다시 조판해 간행한 것이다(이하 '재조명', '연구'로 약한다).

이렇게 저자가 다른 두 책을 한 자리에서 평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김대준의 논문을 간행한 이태진 교수는 '간행사'에서 '연구'는 "대한제국의 근대국가 수립의 가장 핵심적인 면"을 다루고 있으며, 대한제국 정부는 갑오개혁에 의해서 개정된 회계제도를 충실히 이행해 근대적 국가예산제도를 "확립"했으며 이러한 성과를 일본의 재정고문과 통감부가 "파괴"했다고 결론짓고 있다는 점에서 "자력 근대화 실재론 주장자"에게 대단히 고무적인 업적이라고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양 저서의 문제의식의 동일함은 30년 세월의 거리를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한다.

'재조명'에서 이태진 교수는 저작의 목적을 우리나라의 근대사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저자는 한국 사회과학자들이 "오늘의 사회과학적 주제들을 우리의 역사를 통해 보려는 시각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고 개탄하고 있는데, 이러한 한국 사회과학계의 현상에 대해서 사회과학자의 일원인 평자 또한 크게 공감하고 있으며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원인이 식민지병합의 충격으로 인한 한국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이며 따라서 그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 소박한 진단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사회과학자 대부분이 한국사, 더 정확히는 역사 일반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어떤 편견 때문이라기보다는 사회과학 이론을 그것이 생성됐던 시공간에 대한 이해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천박함 때문이며, 아직까지도 사회과학이론의 개발자(maker)가 아니라 이론을 학습하는 수용자(taker)의 단계에 만족하고 있는 유치함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 밑바탕에는 사회과학적 주제를 정면에서 대하지 못하는 래디컬한 자세의 부족함이 드러나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적 위치에서 비롯하는 것이다(변방성). 이러한 사회과학으로부터 "오늘의 사회과학적 주제"를 제대로 해명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저자도 동의하겠지만, 어떻게 사회과학 이론의 이해, 개발, 적용이 인간의 사회적 경험의 총체인 역사에 대한 통찰이 없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자국의 역사를 긍정적인 것으로 만든다고 주관과잉의 연구를 한다면 우리나라 사회과학의 문제해결에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에 대해서도 자해행위가 될 것이다.

'재조명'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개항기 자주적 근대국가 수립의 주체는 고종이었다. (2)고종은 "暗弱"하지 않았다. 고종은 "계몽절대군주"였다. (3)고종은 영조와 정조의 근대 지향적인 "民國政治"이념을 계승했다. (4)대한제국의 전제군주정은 민국정치를 계승,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5)고종의 근대화 노력은 대한제국의 근대화정책(光武改革)에 의해서 실현됐다. (6)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은 성공을 우려한 일본의 침략에 의해서 좌절됐다.

이 간단한 요약에 의해서도 '재조명'이 그리는 그림이 조선후기부터 개항기와 식민지기에 걸친 장대한 스케일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색채도 상당히 화려하다. 그러나 세부적인 묘사를 일일이 평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이 그림의 구도에 대해서만 말한다. 이 그림에는 5백년의 지구력을 보여준 조선왕조의 극복이라는,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인 왕정의 극복이라는 문제의식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 평자는 단지 정치체제를 입헌군주제나 공화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의 태극기 분석이 밝히고 있는 "명월이 수많은 하천에 비치는 것"과 같이 "진정하게 소민을 보호하는 군주와 백성의 관계"(276)로 요약되는, 영조·정조의 "탕평군주"와 그 계승자 고종의 비전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평자는 이러한 비전 위에 근대사회를 수립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주지하듯이 당대의 서학의 수입, 동학의 발흥은 다름 아닌 조선 왕조의 이러한 비전 자체를 문제삼고 있었다.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의 병합이 우리의 근대사에 치명적인 병폐를 가져다 줬다면, 왕정을 자기 스스로 극복할 기회를 강탈한 것에 있다고 해야 한다. 저자는 전제군주정인 대한제국과 함께 근대를 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생각건대 君民一體의 민국정치의 이념을 근대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진정 그러하다면 해방 후 우리는 대한제국의 부활을 위한 복벽운동부터 시작해야 했을 것이다.

한 인간은 그 사람이 먹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한 나라를 평가할 때도 국왕의 생각을 살필 것이 아니라 그 재정부터 살펴야 한다. 고종이 비로소 자신의 민국정치의 이념을 구현할 수 있었다는 대한제국의 재정제도와 재정상태는 어떠했는가. 김대준의 '연구'의 의의는 공포되지 않았던 예산자료를 발굴해 정리하고 최초로 재정학의 방법에 의해서 분석했다는 연구사적인 것에 있다. 갑오개혁기에 도입된 근대적 재정제도가 대한제국기에 유지, 발전됐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은 오류이다.

대한제국기의 황제권력의 강화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궁내부와 내장원의 재정팽창으로 갑오개혁기의 재정제도는 뒤틀려갔다. 재정곤란으로 인해 예산이 제대로 집행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예산제도 밖에서 국왕직속의 내장원이 국가재원을 집중해 재정곤란에 빠진 정부에 대해 지세수입을 담보로 대부를 해줄 지경에 이르렀다. 요컨대 황실재정에 의한 정부재정의 지배라는 양상을 노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연구'는 이러한 황실재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정부예산에서 화폐발행수입이 축소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조폐국인 전환국이 국왕직속으로 이전돼 정부예산에서 빠진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환국은 황제의 사금고 역할을 했으며 악화인 백동화 남발은 대한제국기 화폐제도 문란의 주범이었다. 이러한 대한제국의 재정제도는 宮府一體의 이념하에서 운영됐던 국가재정을 정부재정과 왕실재정으로 분리하고, 왕실재정을 정부 통제하에 두고자 했던 갑오개혁의 전도된 결과라고 해야 한다. 이것을 두고 갑오개혁기의 재정제도가 발전돼 근대적 재정제도가 "확립"된 것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재정제도는 어찌됐건 근대적 목적에 잘 쓰면 되지 않겠는가. '재조명'은 대한제국의 근대적 업적의 예로서 도시개조사업, 중국도서의 대대적인 수입, 군사비 예산의 증대 등을 거론하고 있지만, 국가재정을 근본적으로 혁신하기 위한 과세대상(토지, 인구)에 대한 파악, 징세기구의 개편, 근대적 산업의 이식과 육성, 군사력의 강화를 우선적으로 살펴야 할 것이다. 대원군이 국력을 기울여 중건한 경복궁을 두고 새로 경운궁을 짓는 것이나 비명에 죽은 황후의 장례를 위해서 막대한 자금을 지출하는 것이 시급한 사업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재조명'은 1902년에 설립된 황제직속의 益聞社를 항일정보기관으로 평가하고 대한제국이 제대로 된 근대적 국가체제를 갖추고 있는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관민의 모든 동향을 감시하고 "자유 민권을 빙자하여 전제정치를 비방하며 정부 득실을 평론하여 인심을 선동하는 자"를 탐지하는 것을 임무로 하였던 익문사. '大韓帝國制' 아래 君民一體의 '민국정치'의 실상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일지언정 어떻게 항일정보기관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저자는 갑신정변, 갑오개혁, 독립협회로 이어지는 근대화 노력을 모두 일제와 결탁한 권력찬탈기도로서 평가절하하고 있는데, 고종황제는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실로 자신을 알아주는 후원자를 얻었다 할 것이다.

필자는 서울대에서 '甲午改革이후 近代的 財政制度의 形成過程에 관한 硏究'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기업의 발흥과 관료, 1876-1910', '한국 전통사회의 기근과 그 대응:1392-1910' 등의 논문이, '맛질의 농민들 - 한국근세촌락생활사'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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