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도 민주주의를 지켰다

 

 

 

 

 

 

 

 

 

 

 

 

 

 

 

 

 

 

 

 

 

 

 

 

 

 

 

 

[한겨레]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죽음으로 저항한 비전향장기수와 그들을 정당하게 평가한 의문사위를 물어뜯는 마녀사냥을 보며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지난 6월 일본의 평화박물관을 둘러보느라고 일본을 다녀왔다. 일본에서 만난 지인들로부터 일본 우익들이 <실미도>에 감동하고, <태극기 휘날리며>의 개봉을 고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씁쓸해했다. 이들 영화가 한국의 자칭 우익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공산 계열의 항일유격대가 즐겨 부르던 <적기가>를 삽입한 <실미도>는 국가보안법의 고무찬양죄 위반으로 우익단체에 의해 검찰에 고발됐다. 16대 국회에서 친일진상규명법안을 기를 쓰고 깔아뭉갠 한 의원은 국회에서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헌병들이 피난온 고등학생을 학도의용군으로 강제로 잡아간다는 허위 내용으로 국군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훼손하고 있다”면서 이 영화가 “우리 정부와 국군을 비난하도록 세뇌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을 능가하는 한국의 군사주의
일본의 우익들도 처음 이들 영화가 한국에서 흥행에 성공하자 한국의 반공주의가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세심한 ‘걱정’까지 해주었지만, 정작 영화를 보자 생각이 바뀐 모양이다. 한국에서는 평자에 따라 엇갈리기는 했지만, <태극기 휘날리며>는 감각이 무뎌진 우리에게 전쟁의 참혹함을 일깨워주고 “한국 전쟁 영화를 지배해온 레드콤플렉스, 이른바 <배달의 기수>에 마침표를 찍는 영화”라는 식의 평이 많았다. <실미도>도 한국 현대사의 감추어진 비극을 역사 앞에 드러낸 문제작이란 호평을 받으며 관객 1천만 시대를 열었다.

두 영화가 친일 영화가 아님이야 분명한데, 왜 같은 영화를 보고 한국의 우익은 분노한 반면, 일본의 우익은 전쟁을 찬양한 영화로 보면서 환영했을까? 우리는 일본에서 주기적으로 나오는 정치인들의 망언을 보면서 일본이 과거 청산을 하지 않은 것에 분노한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과거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일본 사회가, 한국 사회에 비해 전쟁을 덜 찬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즘 일본에서 군국주의의 부활 조짐이 심상치 않아 한국 같은 주변국의 우려를 사고 있지만, 정작 한국의 군사주의는 일본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물려받았음에도 현재의 일본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천박한 반공영화의 수준을 뛰어넘음으로써 한국인들에게 전쟁의 참혹함을 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면, 일본의 우익은 이 영화가 갖는 다른 측면을 보고 이 영화를 반긴 것이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본 영화는 아니지만, <태극기 휘날리며> 덕에 현대사 강연을 다닐 때 설명이 쉬워진 부분이 있다. 한국의 참혹한 전향 공작의 잔혹사에서 첫손에 꼽아야 할 보도연맹 사건 이야기를 설명하기가 한결 쉬워진 것이다.

여주인공 영신은 빨갱이가 아니었다. 보리쌀 두 되에 전향서에 도장 찍고 보도연맹원이 된 평범한 여성이었다. 전향서를 쓴다는 것, 보도연맹원이 된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충실한 국민이 되겠다는 것을 서약한 것이고, 국가가 이를 보증한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나자 전향서는 대한민국에서 그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안전보장증이 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전향서를 제출한 자들의 명부는 학살 대상자들의 명부가 되고 말았다. 전향서를 쓰고 대한민국에 충성을 맹세한 대한민국 국민 20여만명이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체계적·조직적으로 학살당한 것이다.

이렇게 전향에 대한 몹시 안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나라에서 강제 전향 공작은 시작됐다(강제 전향의 배경에 대해서는 <한겨레21> 385호, ‘빨갱이에게도 인권이 있다’, 2001년 11월21일치에서 설명한 바 있다). 박정희는 5·16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탈취한 뒤, 전국 각 교도소에 흩어져 있던 비전향 좌익수 800여명을 대전교도소로 집결시켰다. 그 뒤 1968년 1·21 청와대 습격 사건이 일어나자, 정부는 이북 특수부대가 대전교도소를 습격하여 좌익수들을 탈출시킬 것을 우려하여 다시 비전향 좌익수들을 전국 각지의 교도소로 분산 수용했다. 1968년 4월 대구로 90명, 전주로 80명, 광주로 90명, 목포로 90명이 이감되고, 대전에 120~150여명이 잔류했다고 하니 1968년 비전향 좌익수의 규모는 500명이 조금 안 되는 정도였다.

강제전향 공작은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됐지만, 박정희의 유신 쿠데타 이후 1973년 8월2일 법무부 예규로 ‘좌익수형수전향공작전담반운영지침’이 시달되면서 그 이전과는 차원을 달리하면서 중앙정보부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새롭게 시작됐다. 전향전담반은 교도소 내에서 상당한 고위직인 교회관(敎誨官)을 책임자로 여러 명의 교회사와 교회사보를 두었지만, 실제로 전향 공작의 일선에 나선 것은 흔히 ‘떡봉이’라 불린 깡패들이었다. 국가는 깡패 출신 강력범들에서 대상자를 선발하여 ‘떡봉이’라고 쓴 완장을 채워주고, 좌익수들이 수감된 특별사의 청수부로 배치하면서, “나라를 위한 일이니까 잘 되면 법무부에 상신해서 가석방도 될 수 있다”는 말로 이들이 좌익수를 많이 전향시키면 석방해준다고 약속했다. 떡봉이들은 같은 수감자임에도 감옥 내에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특권을 누렸으며, 비전향 좌익수들이 수감되어 있는 사방 열쇠까지 차고 다녔다. 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비전향수들을 끌어내 자신들의 완장에 쓰인 대로 떡을 만들어버렸다.

그들의 저항이 야만적 공작을 중단시켰다
1973년 8월부터 1년간 대전교도소에서만 전향한 좌익수가 197명이었다. 이번 의문사진상규명위에서 의문사로 인정된 최석기가 떡봉이들에게 맞아 죽던 1974년 4월4일만 해도 모두 10명의 A급 수형자들이 전향을 당했다. 광주에서도 전향 공작이 시작되기 전 64명이던 비전향수는 1년이 지나자 10명 정도만 남았다.

변형만은 청주보안감호소에서 단식투쟁 중 교도소쪽이 왕소금을 잔뜩 푼 소금물을 고무호스를 식도에 집어넣어 강제 급식하는 과정에서 숨을 거두었다. 떡봉이에게 온몸을 바늘로 찔리는 고문을 당하던 박융서는 1974년 7월20일 자신의 동맥을 끊고, 흐르는 피를 찍어 벽에다 “전향 강요 말라”는 혈서를 쓰고는 세상을 등졌다. 전향하지 않은 장기수로서는 최초로 석방되어 인권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서준식도 강제전향 공작에 맞서 옥중에서 자살을 기도했었다. 영화 <메멘토>가 나오기 수십년 전, 서준식은 자기 몸에 유리조각으로 수백 글자의 유서를 새기고 동맥을 그었으나 천만다행으로 의식을 잃은 가운데 자연 지혈이 되어 목숨을 건졌다. 이들은 죽음으로서 사상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내재적 가치를 지켰고, 반인권적인 권위주의 정권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이들의 저항이 있었기에 박정희의 강제전향 공작은 사실상 중단됐다.

이 야만스러운 전향 공작의 희생자들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의문사로 인정하자 난리가 벌어졌다. 일부 언론이나 자칭 보수단체들은 의문사위의 결정을 “남파 간첩과 빨치산을 민주투사로 인정한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더구나 의문사위의 일부 조사관이 과거 군사독재 시절 사노맹이나 간첩 사건에 연루된 것을 갖고 “간첩이 육군대장과 전직 국방장관을 조사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라며, 의문사위에 대한 마녀사냥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들 언론이나 단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남파 간첩과 빨치산 활동을 한 이들에게서 대한민국의 국법을 준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 민주화에 걸림돌이라도 되었다는 뜻인지 묻고 싶다”고 전향 공작 자체를 옹호했다.

강제전향 공작에 대한 항거는 민주주의의 근본인 사상의 자유를 지키는 일이고, 이들은 죽음으로 야만적인 전향 공작에 맞섰다. 전향 공작에 대한 저항이 민주화운동이냐는 논란이 벌어지는 것 자체가 아직 한국 사회가 민주화운동 유공자를 포상할 만큼 민주화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사실 권위주의 시대의 음습한 정보 정치의 상징적인 인물이 의문사위 결정을 놓고 벌어진 TV토론에 나와 의문사위를 비판하는 뻔뻔스러운 세상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들 언론이나 단체가 일부 조사관들의 전력을 문제 삼는 방식을 보면, 이들에게 최소한의 양식을 기대하는 것도 사치스러운 일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간첩으로 몰린 조사관의 경우를 보면, 1990년대 가장 대표적인 조작간첩 사건인 이른바 ‘남매간첩단’ 사건의 당사자이다. 이 사건은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안기부 개혁 요구가 거센 가운데, 안기부가 기획한 사건으로 안기부 공작원 백흥용에 의해 날조됐다. 그를 비롯해서 수구언론이 문제 삼은 사람들은 모두 사면복권되어 공무원 임용에 하자가 없고, 경찰 등 관련 기관의 신원 조회를 거친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수구언론에서도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또 이들이 의문사위에 전력을 숨기고 들어간 것도 아니요, 수구언론도 이미 2002년 1월에 과거 간첩이나 사노맹 같은 지하조직 관련자로 처벌받은 사람이 경찰 등에서 파견나온 수사관과 같이 일한다는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다. 자기들도 다 알고 있던 일을 갑자기 “뒤늦게 밝혀졌다”며 들고 나온 것이다.

니들 옷에도 빨간 페인트 묻었네!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에 대해서는 기를 쓰고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합창하는 자들이 의문사위 조사관들에 대해서는 눈을 부라리며 전력을 파헤친다. 그러나 이들은 독재 정권에 항거했던 민주인사요, 조작간첩 사건의 피해자이다.

국가기구가 은폐하려는 의문사의 특성상, 죽음의 문턱에 가본 실제 피해자들이 자신의 몸의 기억과 살아남은 사람의 책임을 바탕으로 진상 규명에 더 유리할 수 있다. 사실 이렇게 엉뚱하게 아무데나 전력을 파헤치자고 나온다면 가장 곤란해질 사람은 박정희와 아직도 그를 떠받드는 수구세력일 것이다. 요즘 한창 논란이 되는 친일파 전력은 차치한다 하더라도, 왼쪽으로 보면 남로당 군사부가 유사시에 크게 써먹을 목적으로 군부 내에 깊숙이 침투시킨 최고위 프락치이자 여순반란 사건으로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화려한 빨갱이 경력이 있고, 오른 편으로 보면 군사반란으로도 모자라 친위 쿠데타(유신)까지 감행하여 민주주의 기본질서를 두번이나 짓밟은 반란범 아닌가? 조작 간첩과 사노맹 출신이 있어 의문사위가 해체해야 한다면, 한나라당도 남아나지 못할 것이다. 무시무시한 남민전과 1980년대의 대표적인 급진조직인 서노련의 주요 인사들이 사무처 요원도 아니고, 당의 간판 중진으로 활동하고 있으니까. 색깔론을 들고 나오려면 적어도 자기가 쓰고 있는 빨간 색안경은 벗어놓고 나와야 하는 것 아닐까? 옛말에 근주자적(近朱者赤)이라 했다. 붉은색 근처에 가면 자기도 빨간 물이 든다는 것이다. 남들에게 빨간 페인트 칠하고서 빨갱이라 몰아치는 짓 자꾸 하다 보면 자기 옷에도 빨간 페인트가 묻는 법이다.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 신뢰 잃었다
의문사위의 결정에 대한 논란에 기름을 부은 것은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가 감호소에서 숨진 남파 공작원 출신 피해자가 민주화운동과는 무관하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물론 국가기관간에 독자적으로 다른 견해를 내놓을 수 있다. 그러나 결정 과정이나 내용을 볼 때 민주화운동보상심위의 결정에는 큰 문제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선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 산하의 관련자및유족여부심사분과위원회에서는 변영만씨 건의 경우, 신청자가 민주화운동보상법에 신청 자격을 갖는 사람으로 규정된 유족이 아니라 당시의 동료 재소자였다는 점을 근거로 각하 의견을 낸 바 있으나, 위원회는 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안을 2년이나 묵혀두었다가 논란이 일자 급히 처리하여 언론플레이를 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 결정으로 과거 동의대 사건에 대한 판정 과정에서 수구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던 보상심의위는 수구세력으로부터 점수를 딸 수 있었는지는 모르나, 진보적 민주화운동 세력으로부터는 결정적으로 신뢰를 상실했다. 권위주의 정권의 하수인들에게 뺨 한대 맞아본 적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위원회가 죽음으로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가치인 사상의 자유를 지킨 사람들을, “전향 강요 말라”라고 문자 그대로 피로 쓴 역사를 과연 심판해도 되는 것일까?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를 비롯해 과거 민주화운동에 몸담았던 사람들 일부에도 민주화운동을 단순히 긴급조치 위반이나 계엄포고령 위반 등 정치 영역의 반독재운동으로 국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태도를 보면서 생각나는 것은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의 최측근 실력자였던 어떤 장관이 자신이 박정희 정권 시절의 고문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간첩은 고문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이다. 이런 태도는 과연 군사독재 시절 우리가 추구했던 민주화된 사회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민주화운동보상법도 그렇고 의문사법도 그렇고, 우선 민주화운동의 규정과 관련하여 대단히 미흡한 점이 많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국가의 이름으로 엄청난 폭력을 휘둘렀고, 그 피해자는 너무나 많다. 전쟁을 치르지 않았는데도 한국의 군대는 1980년부터 1995년까지 이라크 전쟁의 미군 사망자 수의 아홉배나 되는 사망자를 내었다. 멀쩡한 목숨이 3년마다 1개 연대씩 전쟁을 치르지도 않고 사라졌다. 허원근 일병 사건처럼 수천건의 죽음이 의문에 싸여 있으나, 의문사위가 다룰 수 있는 ‘의문사’란 오로지 민주화운동 관련 의문사뿐이다. 민주화운동의 근처라도 갔던 사람들에게 정말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가, 당신들이 했던 민주화운동이란 것이 과연 민주화운동 관련자의 죽음과 관련이 없는 죽음을 차별할 만큼 잘난 것이었는가를. 한 인간이 자신의 자존심과 존엄을 지키고자 발버둥치다가 스러져간 그런 죽음 앞에서 좀더 겸허해질 수 없는 것일까? 국민의 정서상 간첩들의 행위를 민주화운동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사람들이여, 뒤돌아보자. 6월항쟁 같은 정말 짜릿했던 한순간을 빼고, 언제 민주화운동이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은 적이 있는가를.

강제전향이 폐지된 뒤 정부는 한때 준법서약서란 것을 도입했다. 수구언론의 등살 때문이다. 그 당시 최연소 장기수였던 강용주는 이렇게 말했다. “서약서 쓰기를 강요하면서 그것을 거부하면 사면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다고 하고, 그러면서 양심의 자유는 전면적으로 보장됐다고 떠드는 무지하고 야만스런 사회, 양심의 자유는 보장하지만 서약서는 써야 한다는 말이 얼마나 형용모순을 지니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천박함이 횡행하는 땅에서 제가 있어야 될 자리는 십오척 담 안일 수밖에 없는 듯합니다.” 그 강용주는 다행히 풀려났지만, 송두율은 전향서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구세력은 물론이고 국가권력인 검찰에 닦달당하고 있다.

전향 공작 자체가 반헌법적이고 원인무효이기 때문에 비전향과 강제전향에서 차별을 두어선 안 된다. 비전향 장기수가 100명 안팎이었고, 이들 중 63명이 6·15 정상회담의 성과로 2000년 9월 북송됐다. 폭압적인 전향 공작 기간 중에 전향한 좌익수는 400여명, 현재 그들 중 28명이 북송을 원하고 있다. 우리가 정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자행한 강제전향 공작을 반성한다면 북송을 원하는 강제전향 장기수들을 북으로 보내주어야 한다.

봉원동 산자락에 선 듯한 한국사회
2년 전 1기 의문사위가 남파 간첩을 의문사로 판정했을 때 조용했던 수구언론이 지금 이런 푸닥거리를 하는 것은 탄핵 정국과 총선을 거치면서 과거 청산의 지형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누더기를 만들었던 친일진상규명법안의 수정안이 제출되고,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에 관한 특별법안도 통과가 유력하고, 조그마한 꽃삽을 갖고 거대한 쓰레기더미를 파헤쳐야 했던 의문사위도 3기가 출범하면 포클레인까지는 안 돼도 곡괭이 하나는 얻어가질 전망이다. 드러나면 곤란한 냄새나는 과거를 가진 사람들은 이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단 한번도 제대로 된 과거 청산을 하지 못한 나라, 그나마 의문사위의 활동으로 우리는 판검사들을 키워내던 서울법대 교수가 어떻게 간첩으로 몰려 죽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지금 한국 사회는 희대의 엽기 연쇄살인범이 피살자들의 주검을 파묻은 봉원동 산자락에 서 있는 형편이다. 덮을 것인가, 땅을 파 주검을 수습할 것인가? 3기 의문사위를 어떻게 만드느냐가 그 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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