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

지난주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강제전향 공작에 대해 죽음으로 항거한 비전향 장기수들의 행위를 민주호운동으로 규정한 것에 대해 말이 많다.  이 일로 의문사진상규명위는 그야말로 난타를 당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사상 검증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수구 신문과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에 폭력적 응징도 마다 않던 우익 단체들의 공격은 그렇다 치자. 최소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상 정도는 공유한 걸로 알았던 여당조차 몸을 빼며 잽을 날리는 건 또 뭔가?

내가 놀란 건 의문사진상규명위의 결정이 아니라 그에 대한 우리 사회 주류 집단의 반응이다. 머릿속을 자유민주주의의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알고 있는 나조차 이럴 땐 그들 머릿속을 들여다 보고 싶어진다. 도대체 그 안에서 자유민주주의 행세를 하는 이념이 어떤 것인지, 자유민주주의의 근본을 부정하는 그 이상한 자유민주주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추정컨데 아마도 북한을 알리바이 삼아 시작한 오랜 변형 작업의 결과일 것이다. 적과의 대치를 이유로 하나씩 가한 변형이 이젠 자유민주주의의 본과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만들어 버렸다. 북한 체제에 반대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를 하는 건지,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에 북한 체제에 반대하는 건지... 단적으로 말해 보자. 공산주의, 아니 그 할아버지 이념과 싸운들 무엇하겠는가. 자유, 민주, 인권을 포기하면 이미 자유민주주의가 아닌데.

이번 일만 봐도 그렇다. 신문들은 간첩을 민주화운동가로 만들었다고 난리다. 그러나 그의 간첩활동은 이미 법으로 처벌을 받았다. 의문사진상규명위가 민주화운동이라고 말한 건 간첩활동이 아니라 '전향거부' 활동이다. 본래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자기 헌법에 명시하고 있다. 누군가의 머릿속을 드러내고 뜯어고치겠다는 발상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전향 자체가 자유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인데, 도대체 자유민주주의로 전향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민주화 운동을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가 어떻게 가능한가?

국민의 정부 시절, 전향서를 대체한 준법서약서마저 거부한 강용주씨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양심의 자유는 보장하지만 서약서는 써야한다.'는 말이 얼마나 형용모순인지 깨닫지 못하는 사회에서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십오 척 담 안일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법을 지키며 살겠다는 정도의 서약서를 그는 왜 거부했던가. 법을 어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바로 그 법이 기초하고 있는 자유라는 토대를 지키기 위해서다. "나는 권력앞에서 내 안의 생각을 게워내 심사받아야 한다는 데 동의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의 형용모순적 성격은 지난해 입국했다 최대 거물 간첩으로 몰린 송두율씨에 대한 재판에서도 드러난다. 그가 북한의 정치국 후보위원인지 아닌지는 차차 밝혀지겠지만, 그의 학술적 저작들을 처벌 근거 중의 하나로 삼은 검찰 기소문은 그 자체로 학문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다. 순수 학문적 동기가 아닌 정치적 동기에서 출발한 학문은 과연 자유를 갖지 못하는가? 세상에 하느님도 알기 힘든 학문의 동기를 따지는 것도 그렇지만, 학술회의가 아닌 재판정에서 연구방법론 논쟁을 하고, 학자가 아닌 검사와 변호사가 그 의미를 다루는 현실은 슬프기 그지 없다.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전향, 순수 학문적 동기에서만 학문을 하는 자유, 평화와 인권을 위한 전투병의 파병, 놀라운 건 이런 희한한 말들의 조합이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는 현실이지, 원리에 충실한 의문사진상규명위의 결정이 아니다. 송두율씨의 표현처럼, 자유민주주의를 무자비하게 훼손하는 국가보안법에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임무를 맡기는 우리 사회야말로 자기최면에 걸린 사회, 세계의 뉴스거리가 되는 사회가 아닌가. 분명히 말하건대, 자유의 진정한 적은 내 사상과 다른 사상을 지닌 자도, 내 자유와 다른 자유를 지닌 자도 아니다. 진정한 적은 생각할 자유 자체를 박탈하려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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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04-07-13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사회가 반군부독재투쟁을 통해 얻은 것은 '민주주의'라고 하기보다는 '국민주의'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군부독재를 종식시킨 후에 국민으로서의 권리는 되찾았지만 자유민으로서의 권리는 완전히 확보하지 못했다. 현재 보통 한국인들의 마음 속에 그려진 자유민주주의의 상은 불분명하며 민주주의보다는 국민주의적 내용물로 들어차 있다. 한국인들은 국가에 대해 자신을 '국민'으로 대해줄 것을 요구하지 '자유민'으로 대해 줄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국보법에 대한 안이한 사고방식, 전향서약에서 기원한 준법서약서의 존속, 보호감호제의 지속, 주민등록제와 지문날인에 대한 무비판적 태도,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반감 따위가 그 예다. 일부 한국인들이 한국의 강력한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예로 들면서 일본의 연약한 민주주의와 비교하여 우월감을 과시하는데 이는 착시현상이다. 그들이 한국에서 누리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라기 보다는 국민주의다. 일본은 비록 (자생적이지 못한) 포고령 민주주의에 기원을 두고 있기는 하나 민주주의의 핵심에 따라 운영되는 사회임이 분명한데 반해 한국의 경우는 자생적이기는 하나 그것의 결과물은 민주주의가 아닌 국민주의였으며, 지금 한국이 처한 상황은 국민주의 상태로 계속 갈 것인지 아니면 진정한 민주주의로 도약할 것인지의 갈림길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