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스위지 : 역사와 정면대결한 거목의 위대한 패배   
 
 
홍기빈

폴 스위지(Paul Malor Sweezy)가 지난 2월 27일 영면했다. 향년 93세.
스위지가 경제학자로서, 진보적 사회사상가로서 또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20세기의 미국과 세계에 미친 영향은 대공황, 파시즘, 2차 대전, 냉전과 탈냉전을 거친 그의 인생 여정만큼이나 길게 드리워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영국의 진보매체인 『르몽드』『가디언』 정도를 빼면 이 괄목할 만한 인물의 서거를 추모하는 글이 아직 별로 나오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한국의 지식인들, 특히 1980년대에 한국의 사회현실에 대한 이론적 고민을 시도했던 이들이라면 의식하든 못하든 스위지에게 상당한 ‘정신적 빚’을 지고 있다.

하버드의 마르크스주의자

스위지의 부친은 시티뱅크의 전신인 뉴욕내셔널 뱅크의 고위 임원이었다. 그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뜻이다. 덕분에 스위지는 뉴잉글랜드의 상류층 기숙학교를 거쳐 하버드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준수한 용모(대학 동창 폴 사무엘슨에 따르면 젊은 시절의 스위지는 대단한 미남이었다고 한다)와 최고의 학력을 갖추었던 전도유망한 청년이 이후 미국 마르크스주의의 ‘괴수’로서 험난한 삶을 살게 된 계기는 1931년의 영국 유학이었다.

당시 경제대공황은 이미 영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계속 예언했던 바인 ‘자본주의의 최후’로 인식되고 있었다. 특히 스위지가 유학했던 런던정치경제대학에서는 오스카 랑게나 해롤드 라스키 같은 열정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자신의 표현대로 “열정적이지만 무지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미국으로 돌아온 스위지는 “마르크스주의를 미국의 지적 담론에서 존경받는 전통으로 확립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그렇게 시작한 하버드대에서의 경제학 박사과정에서 스위지는 보수주의자 조셉 슘페터 교수와 치열하게 논쟁하면서 나름대로의 마르크스주의 경제이론을 발전시켜 간다.

졸업 후 하버드대 경제학과의 조교수로 일하면서 스위지는 대공황의 늪에서 허덕이는 미국 경제의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현실에 개입했다. 당시 그는 「미국 민주주의를 위한 경제적 강령」에 저자와 서명인으로 참여하는데, 이 문서는 뉴딜 정책(‘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을 핵심으로 하는)을 케인즈주의적 관점에서 합리화하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바 있다. 특히 스위지가 「미국 경제의 구조(1939)」(‘미국의 소유집중과 독젼에 대한 유명한 보고서)에 게재한 논문 「미국의 이익 집단」은 주요한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미시경제학이나 경제원론 책에서 과점시장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등장하는 ‘굴절 수요 곡선’은 스위지가 당시의 작업 속에서 이뤄낸 성과의 일부이다.

이렇게 실천적으로, 학문적으로 순탄했던 스위지의 이력은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정치?사회가 냉전에 휘말리면서 커다란 변동을 겪게 된다. 스위지는 자신의 정치?사상적 신념 때문에 하버드대에서 조만간 축출될 것을 감지하고 조교수직을 사임한다. 그리고 반동화에 맞서 1947년 미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 월레스 후보의 지지운동에 참여하지만, 결과는 아주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루스벨트 사후 미국사회는 그가 대표하던 진보적 뉴딜 노선의 개혁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월스트리트의 금융세력과 강경 군사세력의 주도하에 보수적 사회 질서로 회귀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었다. 하지만 당시 압도적인 반공주의 열풍에 질린 진보당과 월레스는 그 갈림길에서 진보적 방향으로의 대안을 명확하게 하지 못하고 말을 얼버무렸는데, 스위지는 이를 진정한 패인이라고 봤다. 그의 생각은 미국사회의 진보적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뚜렷이 내걸지 못한다면 미국의 양심세력은 수동적인 비판세력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한창 몰아치던 1949년, ‘소련에 독립적인 사회주의 잡지’를 표방하는 저널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를 리오 휴버맨과 함께 창간한다.

지금까지 수십 년째 유유히 출간되고 있는 이 잡지는 냉전으로 얼어붙은 세계에서 사회주의적 가치야말로 인류의 곤경을 풀어나갈 대안이라고 믿었던 세계적 지식인들(아인슈타인, 러셀, 사르트르, 말콤 엑스 등)이 자신의 신념을 천명하는, 신앙고백의 장인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불평등과 착취의 현장을 날카롭게 분석하는 짧은 글들로 넘쳐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1950년대의 미국에서 이토록 ‘간이 부은’ 대담한 반란자들은 그만한 대가를 종종 치러야 했다. 스위지 자신부터 1955년 뉴 햄프셔 법원으로부터 대학 강연 내용을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단호히 거부하는 바람에 투옥을 포함해 몇 년 간 다양한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미국의 냉전적 사회구조도 1960년대 들어 심각한 위기를 맞고, 진보적 사회변혁을 향한 움직임이 다시 시작된다. 이 같은 사회 변동의 결과물인 동시에 이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기폭제로 기능했던 책이 바로 스위지와 폴 바란이 함께 저술한 「독점자본」이다.

신고전학파를 기사회생시킨 케인즈의 맹점

「독점 자본」이야말로 경제학자로서 스위지의 업적을 집약하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스위지는 이른바 주류 경제학은 물론 정통파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도 ‘이단’으로 비난할만한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이 「독점 자본」은 경제이론 및 사회운동의 역사에서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이정표임이 분명하다. 왜 그런지 살펴보기로 하자.

1930년대 대공황이 발생한 상황에서, ‘자유롭게 내버려두면 완전경쟁이 이뤄지는 시장경제는 총수요와 총공급의 일반 균형을 자연스럽게 가져온다’는 신고전파 경제 이론은 두 방향에서 비판을 받고 있었다.

첫째, 영국의 챔벌린이나 조안 로빈슨 등은 완전경쟁시장이 전혀 터무니없는 비현실적 가정이라고 주장한다. 실제의 시장을 지배하는 것은 독점 혹은 과점 기업들이기 때문에 완전경쟁은 공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둘째, 총수요와 총공급이 결국 일치한다는 신고전파의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현실세계에서는 수요의 부족, 투자 부족, 그로 인한 불완전 고용이라는 악순환의 고리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 첫 번째 관점에서의 이론적 발전은 이후 경제학설사에서 거의 무시되었다. 이른바 케인즈혁명은 이 두 번째 비판에서 뻗어 나온 것이다. 그런데 케인즈혁명은 개별 시장의 구조가 독점 및 과점이라는 현실을 지적한 첫 번째 비판의 문제의식을 거의 무시해 버렸기 때문에 시장경제의 구조에 대한 신고전파의 이론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 결과 폴 사무엘슨 같은 ‘사생아 케인즈주의자’들은 케인즈 경제학을 ‘거시 경제학’으로 한정, 퇴출되어야 마땅했던 신고전파 이론을 ‘미시경제학’으로 기사회생시키고 만다. 그 대가는 값비싼 것이었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의 경제학계에서 전세가 역전되면서 ‘미시적 이론적 기초가 없는’ 케인즈주의는 거의 축출되고 신고전파가 득세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문제의식을 하나의 체계로 결합시켜 ‘미시적 기초를 갖춘 거시경제학 이론’을 구성하는 작업은 케인즈파가 아닌 다른 이론적 흐름에서 구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칼레츠키, 슈타인들에서 스위지와 바란으로 이어지는 ‘독점 자본’ 학파의 흐름이다. 칼레츠키는 이미 1930년대 초(케인즈의 「일반 이론」은 1936년에 출판된다) 폴란드어로 쓴 그의 저작에서 케인즈의 주요 논지를 포괄하는 이론을 독자적으로 구성한 바 있다. 칼레츠키와 그이 지적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슈타인들이 일관되게 해명하려 했던 것은 다음과 같다.

‘독점도(degree of monopoly)로 표현되는 독점자본의 사회?경제적 지배력이 어떻게 생산 설비에 대한 투자를 낮추고 실업을 증대시키는가,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나는 국민소득 분배의 왜곡은 어떻게 장기적인 과소 소비로 이어지는가.’

독점자본은 경제위기를, 경제위기는 전쟁을

스위지도 1942년에 출판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이론서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에서 비슷한 방향의 작업을 시도했다. 자본주의 공황에 대한 정통파 마르크스주의 이론인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대신 장기적인 차원에서의 과소 소비로 인한 ‘(가치)실현 공황’ 이론을 제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저서에서 모호한 채로 남아있었던 독점과 장기 공황의 관계에 대한 스위지와 바란의 견해는 칼레츠키와 슈타인들의 작업에서 큰 영감을 얻어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맞는다. 동료 폴 바란은 1957년에 나온 「성장의 정치경제학」에서 ‘잠재적 경제 잉여’라는 개념을 창안하고 이에 근거하여 제 3세계의 부가 어떻게 선진국으로 착취되는지 해명한다. 그리고 스위지, 바란 두 사람은 1966년 드디어 「독점 자본」을 출간, 이 같은 전통의 주요한 한 매듭을 짓게 된다.「독점 자본」의 주요 논지는 아주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현대의 기업은 폭발적인 기술적 생산력을 기반으로 하여 엄청난 규모의 거대 기업으로 되어가고 있다. 이 거대 기업은 금융이나 시장의 완전경쟁 법칙 따위로 통제할 수 없는, 그야말로 독점 자본이다.

둘째, 이 상황에서는 독점 자본의 압도적 생산성과 대중들의 상대적 빈곤으로 인해, 경제잉여는 계속 증가하는 한편 총 수요는 계속 제약 당한다. 그 결과 만성적인 ‘과잉 생산, 과소 소비’ 상태가 나타난다.

셋째, 이 과잉 생산을 ‘생산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면 다시 과잉 생산이 나타나는 악순환의 고리가 더욱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과잉 생산을 해결하는 방법은 완전히 비생산적인 물품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 완전히 비생산적인 물품엔 물론 광고 산업 따위가 포함되겠지만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는 군수 산업의 확장이다.

넷째, 독점 자본주의의 장기적 추세는 따라서 누적되는 과소 소비로 인한 대중들의 빈곤, 독점 자본의 팽창, 국가의 군국주의화와 끊임없는 침략 전쟁 등이다.

이 저작은 출판 당시 주류 경제학계로부터는 냉소와 무시, 정통파 마르크스주의로부터는 비판과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이 저작의 존재는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이 서서히 판명되었다. 당시 세계 자본주의의 장기 불황, 소위 스태그플레이션은 신고전파의 경기변동론이나 케인즈주의적 총수요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실업과 빈곤이 증가하지만 소수 독점 자본의 이윤은 오히려 팽창되는 가운데 전 세계가 끝없는 전쟁과 불안정으로 빠져 들어가는 당시의 상황은 실로 스위지와 바란의 진단과 적확히 맞아 떨어지는 것으로 보였다.

「독점 자본」과 미국 신좌파의 부흥

이 저작의 정치-사상적 텍스트로서의 의미는 경제학 저작으로서의 의미를 넘어섰다. 그 정치적 메시지 또한 경제학 이론 이상으로 명쾌하고 날카로운 것이었다. 즉,
‘사회 전체가 도달 가능한 생산력(잠재적 경제 잉여)은 소수 독점 자본의 이윤과 독점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제약당하고, 공장 가동률은 도처에서 50% 에도 못 미치고 있다. 실업과 저소득으로 인해 대중의 빈곤은 늘어만 간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비생산적이기 짝이 없는 무슨 광고 따위의 불필요한 서비스 산업만 팽창해간다. 게다가 군수 자본은 끝도 없이 팽창하면서 전 세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이 모든 비합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독점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혁해야만 한다.’

1960년대의 미국 젊은이들이 목도했던 미국의 현실을 너무나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이론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베트남 전쟁의 엄청난 군사적 물량 공세가 그랬고, 사회 전체에 넘쳐나는 광고와 소비주의가 그랬다. 분명히 1960년대까지 선진국의 고용이나 소득 수준은 일정 수준 이상이었다. 그러나 바란과 스위지는 이에 대해서도 무서운 이야기를 한다.

즉, 선진국 노동자들은 제 3세계를 착취한 잉여로 사육되고 무마되고 있으며, 그래서 제 3 세계에서의 빈곤과 참상은 늘어만 가는 반면 선진국 노동자들은 혁명성을 상실한 대중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1960년대에 줄을 잇던 탈식민 지역의 민족해방운동은 이러한 주장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1970년대 공황이 도래하면서 그 빈곤의 물결은 드디어 선진국까지 덮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정치적 메시지가 제기된다.

‘제 3세계의 인민들과 미국의 양심적인 세력은 힘을 하나로 뭉쳐 독점자본에 맞선 공동 전선을 펼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 세계적인 고통과 파국(당시의 미소 핵 경쟁을 상기하라)은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1960년대 미국 신좌파 운동의 가장 강력한 지적 원천의 하나가 이 「독점 자본」이었다는 것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스위지와 그가 창간한 『먼슬리 리뷰』는 신좌파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첫째, 첫째, 미국 ‘급진파 정치경제학 연합’ 등 진보적 학문 그룹의 태동이다. 이 진보적 학자들은 성?인종 차별 등 미국사회에 만연한 각종 모순과 부조리를 자본축적의 흐름에 연결시키며 좀 더 정의롭고 인간적인 정치?경제 체제를 요구하는 집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둘째, 종속이론이나 세계 체제론 같은 주변부 정치경제학의 태동이다. 선구적 이론가였던 프랑크를 필두로 종속이론 진영의 이론가들이 『먼슬리 리뷰』 진영과 맺은 긴밀한 관계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냉전의 그늘 아래에서 미국 사회의 절벽까지 떠밀렸던 스위지는 이제 학문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그 누구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로 되살아났다. 스위지와 바란을 그토록 경멸하고 무시하던 주류 경제학계 조차 이렇게 돌변한 사회 상황 속에서 그들에게 일정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스위지는 1970년대 들어 미국 경제학회의 운영진으로 활동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1971년엔 영국 캠브리지 경제학과의 유서 깊은 마샬 강의도 맡은 바 있다. 스위지가 영국의 경제사 학자 모리스 돕(Maurice Dobb)과 벌였던 자본주의 이행 논쟁은 경제사 연구에서의 고전적인 성과이다. 나아가, 그는 1970년대 이후, 공산주의 국가 내부의 계급 모순을 적나라하게 분석하는 한편 환경 문제에 새롭게 천착하는 등 지적인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해 왔다.

한 때 무슨 빨갱이 삐라 같이 불온 선전물 취급을 당하던 『먼슬리 리뷰』(1950년대에 우편으로 배달할 때에는 꼭 안 보이는 봉투로 싸야했다고 한다)는 이제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지적 담론장에서 가장 중요한 저널의 하나로 자리 잡았으며, 모든 대학 도서관에서 마땅히 구독해야 할 자료가 되었다. 스위지는 그를 박해했던 미국 사회의 틀을 넘어 유럽은 물론 제 3세계 지식인들 사이에서 깊게 존경받는 존재가 되었다. 1981년 인도의 네루 대학은 그에게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한다.

21세기 : 스위지의 패배?

1980년대 이후의 세상은 스위지와 『먼슬리 리뷰』가 쌓은 성과를 철저하게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과연 그는 또 다시 패배한 것일까.
스위지의 일생은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평가될 필요가 있다. 첫째, 경제학자로서 둘째 사회사상가 및 운동가로서 셋째, ‘독립적’ 지식인의 한 전형으로서…. 그러나 이 세 가지 측면 모두를 그가 잠든 2004년의 시점에서 볼 때 스위지는 철저하게 실패한 것 같다.

첫째, 자본주의의 성격과 발전 방향은 그가 예측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인수합병 붐과 함께 터져 나온 세계적인 금융자본주의는 「독점 자본」의 분석과 주장의 상당 부분을 정면으로 논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점은 그가 1991년 12월호 『먼슬리 리뷰』에 기고한 ‘「독점 자본」 : 25년 후의 회고’에서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그는 자본의 성격과 축적의 논리를 파악함에 있어서 자신이 근거했던 마르크스주의적인 방법이 근본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실토한다. 자본에 대한 분석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스위지 자신은 ‘실물’ 부문의 역동성에 치우치는 바람에 ‘화폐와 금융’ 부문의 중요성을 놓쳤다는 회고였다. 그로서는 대단히 고통스러운 고백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이론을 수립하려면 가장 핵심적인 개념인 ‘자본’을 다시 정의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는데 스위지 자신은 이미 팔순의 노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둘째, 스위지와 종속이론가들이 내걸었던 주장과 예측 즉 주변부 지역에서 혁명운동의 고조와 자본에 맞선 지구적 연대는 거의 정반대의 상황으로 되어 가고 있다. 선진국의 자본을 착취와 종속의 덫으로 거부하는 흐름은 이제 완전히 옛말이 되었고, 오대양 육대주의 모든 나라들, 심지어 미국 등의 선진국마저 ‘더 많은 자본의 유입만이 살길’이라며 국제자본의 흐름 앞에 거의 모든 것을 내줄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민족해방운동이나 반제국주의 운동은 이미 서구의 ‘좌파’들로부터도 ‘구닥다리’로 취급받고 있다. 급진파들은 이제 ‘사회주의적 세계’ 같은 ‘역사의 구체적인 방향성’이 아니라 기껏해야 ‘억압적 담론구조의 해체’나 가지고 노는, 머리 큰 포스트 모더니즘의 흐름에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셋째, 스위지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독립적인 지식인’이라는 실천 형태는 현재 세계의 시류 속에서는 실로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퇴물이 되고 말았다. 이념이 대립하던 ‘극단의 시대’인 20세기가 저물어버린 지금, 세계는 어쩌면 ‘광고의 시대’라고 불러 마땅할 것이다. 이 시대에 최후의 승자로 군림하고 있는 것은 ‘매체’이다. 그리고 그 매체의 힘을 대중적 명성을 얻는 데 이용하려고 하는, 아주 저급한 차원의 ‘인정 투쟁’이 세계 어디에서나 거의 유일한 지식인들의 존재형태가 되고 말았다. 반지구화 운동가도, 해체주의 철학자도, 시민운동가도, 내로라하는 좌파정당 지도자도, 일단 매체에 이름을 내고 얼굴을 내야만 자신의 메시지가 의미 있게 사회적으로 실현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TV 드라마의 카메오 제의에 열심히 줄을 서기도 하고, 유행을 잘 타는 영화감독이 알쏭달쏭한 기법의 카메라를 들이대면 아주 기쁘게 자기 얼굴을 피사체로 바치기도 한다.

이 경박한 광고의 시대, 매체의 시대, 이미지의 시대에, 이제 그 어떤 지식인이 스위지와 같은 존재 형태를 기꺼이 받아들일까.사회 전체에 의해 반사회 분자로 찍히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친구들에게 버림받고, 걸핏하면 법원으로 불려 다니면서, 기약도 없이 아득하기만 한 그 ‘미러라는 것만을 붙들고 냉전으로 얼어붙은 미국 사회와 ‘맞장’을 뜰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초기의 『먼슬리 리뷰』를 보면 그 초라한 모습에 실로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이다. 필자들은 원고 청탁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가 버리고, 배달할 때에는 무슨 불온문서마냥 안 보이는 봉투에 꼭꼭 싸서 보내야 했던 그 『먼슬리 리뷰』. 이 같은 상황에서 가녀린 목소리나마 빠지지 않고 사회로 내보내기 위해, 매달 거르지 않고 힘든 격무를 해나가는 식의 ‘독립적’ 지식인의 존재 형태가 이제 가능할까. 스위지가 그토록 지키려했던 지식인의 ‘독립성’이 이젠 그 누구도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않으며, 부담스럽기조차 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근본적 비판의 전통 살려야

스위지의 이 ‘세 가지 패배’를 종합해보면 현재 세계의 뚜렷한 흐름이 나온다. 그것은 사회에 대한 비판적 담론의 장에서 언젠가부터 ‘자본’과 이에 종속된 정치-경제 체제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원천적으로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대신 ‘참신함’ ‘개혁성’ ‘도덕성’ ‘진보’ ‘정의’ 같은 알쏭달쏭하지만 누구나 옳다고 할 수밖에 없는, 김빠진 동어반복이 비판적 담론의 자리를 차지했다.

모두 다 착하고 모두 다 지적이다. 하지만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숨 막히는 경제적-군사적-정치적 폭력 앞에 거꾸러지고 있는데도, 미친 듯이 질주하는 이 지구화의 세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시원하게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 위에서 지구적 자본과 전쟁 세력은 “본업은 이제부터”라며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폴 스위지라는 존재는 1980년대 이후 역사의 흐름에 의해 또 다시 ‘또라이 바보’로 되돌아간 채로 생을 마감한 것일까. 한 때 스위지에게 거의 꼬리가 잡히는 듯 보였던, 자본주의의 역사라는 악동은 이런 식으로 보복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시시한 소인배들이 아닌 역사와 맞붙어 처절하게 논박 당해본 자는 그리 흔하지 않다.

야곱은 신의 천사와 밤새 씨름한 덕에 ‘신과 싸운 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폴 스위지라는 거인의 주검 위에 섣불리 발을 딛고 ‘자본주의의 승리’를 선언하며 조롱을 퍼부으려는 인간들은 뒤로 물러서야 할 것이다. 노신의 말처럼, “쓰러졌어도 영웅은 영웅이요, 아무리 팔팔하게 왱왱거려도 파리 떼는 파리 떼”이기 때문이다.

거목은 이제 편히 몸을 누일 때가 되었다. 젊은 나무들은 힘차게 위로 뻗어 그가 쉴 수 있는 울창한 그늘을 만들어줄 몫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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