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꼰대’로부터의 ‘해방’인가  
홍기빈

 해방에 대하여 1  
 
21세기의 진보 이념을 확립하기 위해 길고 꼬불꼬불하고 어두웠던 지난 세기들의 터널을 돌아보는 작업에서 항상 염두에 둬야 할 단어가 또 있다. 바로 ‘해방’이라는 화두이다.
집회장에서 열사들을 추모하며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부르면 꾹 감은 눈에 저절로 눈물이 솟아나던 1980년대. 그때를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이 ‘해방’이란 단어가 얼마나 숭고한 감정과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는지도 기억하실 것이다. 또 ‘해방’이 완성되는 가상적 시간을 가리키는, ‘그날’이란 단어는 또 얼마나 절실한 감정을 우리 마음 속에서 일으켜 세웠던가.
1980년대 세대는 이 ‘해방’과 ‘그날’을 상상력의 매개로 삼아, 마음 속 깊은 곳에 흐르는 ‘사람사는 세상에 대한 열망’까지 닿는 긴 파이프를 박아낼 수 있었다. 이 파이프 덕분에 척박한 한국 현대사의 지평이 점점 비옥한 대지로 바뀌어 왔으며 또 바뀌어 갈 것이다. 우리에게 이 ‘해방’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강조할 필요 조차 없다.
하지만 ‘해방’은 그 의미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숙고하지 않으면 아주 위험하게 오용될 수도 있는 말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사람을 움직이는 마력이 담긴 단어이기 때문이다. 우린 이미 지난 세기에 ‘해방’이라는 단어가 걷잡을 수 있는 사회적 파국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므로 이 단어의 기원을 한번 차분히 더듬어 보는 것도 이번 세기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일일 것이다.

‘해방’의 악순환
20세기의 이념들은 모두 ‘해방’이라는 이야기틀을 빌어 자신을 정당화해왔다. 개인의 해방, 계급의 해방, 민족의 해방, 무지몽매에서의 해방, 굶주림에서의 해방, 질병에서의 해방, 위협에서의 해방, 성적 억압에서의 해방, 감시에서의 해방…. 결국엔 사르뜨르를 위시한 몇몇 지식인들이 ‘해방으로부터의 해방’이란 말을 완롱(琓弄)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무수한 작가, 철학자,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숱한 ‘논객’들이 이 단어를 이리저리 사용하며 생계와 명성, 남성 또는 여성을 거머쥔 바도 있다. 또 이들과 공생 관계에 있는 잡지, 신문, 출판 등의 매체는 판매 부수와 권력을 늘리면서 그 이상의 혜택을 취해 왔다. 20세기의 담론은, 유럽에서 시작된 ‘결핵균에서의 해방’으로 시작하여 이라크에서 벌어진 ‘세균전에서의 해방’으로 끝났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무리도 아니다. 평범한 정도의 이성과 양심을 갖춘 이들이라면 누구든 이 ‘해방’이라는 이상이 담은 마력에 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해방’만 교묘히 사용하면, 그리고 이 단어의 짝인 ‘억압’을 적절히 섞어 제1주제, 제2주제로 소나타를 엮어 놓으면 다수의 사람들을 양떼 몰듯 끌고 다니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이렇게 일정한 수의 사람들을 안정적으로 동원할 수 있게 되면 이를 토대로 상황과 조건에 맞게, 폭력단에서 정당에 이르는 다양한 수준과 모습의 조직을 일구어 낼 수도 있었다. 또 그것을 일정한 안정성을 가진 화폐의 흐름으로 ‘자본화’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여기에 서식하는 장사치들과 정치 모리배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 단계에 이르면 이전의 ‘해방자’들을 ‘억압’으로 규정하며 새로운 ‘해방’을 외치는 자들이 다시 생겨난다. 이런 과정은 되풀이되고 되풀이된다.

‘해방’은 서양문명의 산물

해방을 갈구하는 이들이 해방을 외치는 이들에게 끌려다니다가 급기야 해방의 적이 되어가는 줄거리이다. 이 같은 아이러니는 인류가 19~20세기에 지겹도록 경험해본 사태이다. 2004년의 한반도 또한 그 악몽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부족하나마 ‘해방’이라는 관념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서양 언어에서 이 ‘해방’이라는 단어가 쓰여온 계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필자도 21세기의 ‘지구화’되어버린 지식인 담론계에서 자꾸 서양, 동양 나누고 또 ‘서양’이란 것 전체를 묶어서 이야기하다 보면 별의별 딱지가 다 날아올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서양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인류에게 해온 몹쓸 짓을 뚜렷이 의식하고 있는 양심적인 진보 지식인들조차 그 악행을 서양 ‘지배 계급’이 아니라 ‘서양 문명 전체’의 차원에서 따지려하면 당장 낮빛을 바꾸고 ‘정치적 관점이 글러먹었다(politically incorrect)’는 딱지를 집어 던지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이 ‘해방’이란 아이러니의 문제를 단지 스탈린, 수카르노, 글래드스턴 같은 역사적 사례들이 아니라, 몇천 년의 시간에 걸쳐 서양인들의 의식 속에 굳어진 ‘해방’이란 단어의 계보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이유는 있다. ‘근대’라는 시대와 담론 자체가 서양 문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근대’가 상상해낼 수 있었던 최고의 이상이 바로 ‘해방’이었으며, 이 같은 이상에 휘말려 전 인류가 일대 북새통을 연출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 중심부의 인간들은 지금 ‘역사의 종말과 완성’을 외치며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다. 자신들 외의 대다수 인류가 (‘해방’ 때문에) 아직도 배고프고 고달프고 두들겨맞고 있는 판국에 말이다. 그렇다면 우린 서양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할 자격과 이유를 가지고 있다.

“당신들이 내건 그 ‘해방’이라는 이상은 과연 얼마나 깊고 풍요로운 상상력의 원천에서 나온 것인가. ‘해방’엔 정말 우리가 대가를 치를 만한 가치가 있기는 한 것인가?”

‘꼰대’와 해방

그런데 서양 언어에 나온 ‘해방’이라는 말의 역사를 통해 그들 상상력의 밑바닥을 힐끗거리다 보면, 풍요로운 상상력은커녕 바닥 모를 허무주의에 소름을 느끼고 만다.
‘해방(解放)’이란 한자어는 19세기 후반 일본인들이 만든 번역어라고 하는데, 이에 해당하는 서양 단어들은 크게 emancipation과 liberation 그리고 불어 affranchissement(이탈리아 어는 affrancamento)의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독일어에서 주로 쓰이는 Befreiung은 독자적인 기원을 가진 말이 아니라 라틴어 liberation을 게르만 어로 옮겨놓은 것 뿐이며, 영어와 불어의 deliverance도 liberation에서 파생된 중세 불어 delivrance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이 세 단어들의 기원과 사연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라틴어 emancipo는 ‘손목(manu)을 죄고 있는(cip-) 것을 풀어준다(e-)’는 의미이다. 그런데 손목을 죄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엉뚱하게도 ‘아버지’였다.
옛날 로마 시대의 가족은 오늘날의 가족처럼 ‘사랑과 정’을 기본 단위로 조직되는 집단이 아니었다. 로마 시대의 ‘파밀리아(familia)’는 자급자족을 목표로 일정한 크기의 토지, 가축, 농기구, 노예, 처자식, 비축된 양식 등이 안정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집단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집단의 우두머리는 나를 낳고 사랑으로 길러준 ‘아버지’라기 보다, 집단 전체를 통솔하고 인적·물적 자원에 통제력을 행사하는 ‘최고 두목’이라는 의미에서의 ‘가부장(pater familias)’이었다(아버지에 대한 비어인 ‘꼰대’와 의미가 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꼰대’는 세가지 권한을 가진다. 첫째, 그 집단의 모든 소유물에 대한 권한이다. 둘째, 혈연관계의 모든 여자들(아내와 며느리 또 손자 며느리)에 대한 권리(manus)이다. 셋째, 자녀(손자, 손녀 포함)와 노예들에 대한 권리(pater potestas)이다. 그런데 로마법에서 ‘권리’는 ‘자기 멋대로 해도’ 아무 뒷탈이 없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무제한의 권리를 뜻한다.

세익스피어의 비극에 나오듯이, 로마의 티투스 장군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두 아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행사하고 있다. 즉, 로마법에서 자녀들은 노예들과 다를 바 없는 가부장의 소유물에 불과한 것이었다.

로마의 아동 및 청소년들의 생활이 과연 그렇게 억압으로 점철된 끔찍한 것이었는지는 제쳐두기로 하자. 지금 중요한 점은, ‘해방’에 대한 상상력을 담은, 서양인들의 가장 중요한 단어인 emancipo가 그 기원에서는 자녀들이 ‘꼰대’ 아버지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을 일컫는 로마법 용어였다는 것이다. 수천년간 서양인들의 사회적 삶을 규정한 주요한 틀인 로마법에서 아버지-자식 관계의 본질은 사실상 지배-소유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식들은 일정한 나이가 차면 가부장에게 자신을 놓아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꼰대가 손에 묶어 놓은 차꼬’를 풀어 주면 드디어 자기 마음껏 살아갈 수 있는 삶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양인들의 ‘해방’에 담긴 상상력의 원관념인 셈이다. 그래서 라틴어-일어 사전에서 명사 emancipatio를 찾아보면 ‘解放(해방)’이라는 말과 함께 ‘獨立宣言(독립선언)’이란 풀이가 나온다. 또 로마인들의 직계 후손인 현대 이탈리아인들의 언어에서 emanzipazione는 가장 일차적으로 ‘자식에 대한 친권(親權)의 해제’를 뜻하는 법률 용어이다.

‘해방’이라는 이상의 허무함

근대 이후 ‘해방’은 ‘정치적·사회적 압제에서의 해방’이란 의미를 얻게 된다. 1832년 제레미 벤담은 ‘정부로부터 해방되거나 스스로를 해방시킨 이들’을 논하고 있으며, 1876년 뉴먼은 드디어 ‘고용주들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노동자들’을 이야기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옥스포드 영어 대사전」의 편집자는 다음과 같은 주의를 달아놓고 있다.

“근대 영어에서는 이 단어의 일차적 의미가 노예해방이 되었다. (친권 해제 등의) 다른 용법들은 오히려 거기(노예해방)에서 파생된 것 같이 느껴지고 있다.”
‘해방’은 ‘억압 일반에 저항하는 자유의 상짱 같은 맑고 밝은 근대 세계의 상식으로 거듭난 셈이다. 이 과정에서 서양 문명의 어둡고 축축한 야만시절의 기억은 지워져 버린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사랑’이라는 원리를 표방하고 조직되는 근대적 가족 제도의 기원이 기껏 17세기의 부르주아들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힘들다는 것은 정설이다. 그러니 기독교의 ‘사랑’ 이데올로기에 흠뻑 젖은 근대인 헤겔이 그의 「역사 철학 강의」에서 자녀와 노예를 똑같은 소유물로 취급하는 로마법의 ‘가부장 소유권’ 개념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하며 악담을 퍼붓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자신들의 역사적 기원을 터무니없이 이상적으로 그려 낭만화시키는 근대 서양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자기 도취증이랄까.

이 단어 emancipation에 담겨 있는 의미 중 서양인들의 상상력을 더 뿌리 깊게 규정하고 있는 것은 어느 쪽일까. 2천 년 가까이 서양의 법 개념을 지배한 ‘꼰대로부터의 탈출’인가, 아니면 수천 년 야만 시대의 표피에 얇게 입혀진 근대적 ‘해방’의 금박인가.
그런데 ‘해방’ 개념의 기원이 ‘꼰대로부터의 탈출’이었다는 것은 왜 문제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 글의 초두에서 던졌던 질문, 즉 “서양인들이 근대세계 최고의 가치로 제시한 ‘해방’의 이상은 과연 인간의 전면적 해방을 담보할만큼 풍요로운 그릇인갚에 비춰보면 바로 드러날 수 있다. 고작 ‘꼰대’에서 풀려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란 말인가. ‘꼰대’의 압제에서 풀려나기만 하면, 풍요롭고 가치있는 인간으로 성장하겠다는 우리 인생의 목표는 자동적으로 실현이 보장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고교 시절, 교실의 ‘꼰대로부터 해방’을 얻기 위해 수업시간 중 학교 담을 넘어본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위 아저씨를 따돌리고 성공적으로 담을 넘은 순간의 안도감이 지나고 난 뒤 찾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다. 남아도는 시간을 메우기 위해 당구장이나 동시상영 영화관에서 ‘삐대던’ 그 지루한 시간이 과연 ‘해방’이란 이상이란 말인가.

새로운 ‘꼰대’로의 종속

흥미로운 점은, 이 emancipation란 단어가 기묘하게도 여성이나 아이들처럼 ‘연약한’ 존재들의 해방과 더욱 자주 관련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 단어가 19세기 말 본격적인 정치 용어로 등장하게 되었던 계기는 당시의 ‘부녀 해방 운동’이었다고 한다. 이런 경향은 ‘해방’을 뜻하는 남성 명사인 affranchissement이나 affrancamento가 따로 존재하는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물적 재산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들과 여자들을 ‘풀어준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의 진정한 ‘해방’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노신(魯迅)이 말한대로, 「인형의 집」의 노라는 집을 나간 뒤 어떻게 되었을까. 매춘부로 전락하든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노예나 농노들을 그저 ‘차꼬만 풀어주는 식’으로 해방시켰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러시아 알렉산더 2세와 조선말 순조 임금 때 나타났던 경우는 그 ‘해방된’ 노예들이 자기 손으로 자유를 반납하는 것이었다. 미국 북부에서는 ‘해방’ 노예들이 자본과 도시화라는 새로운 주인에게 다시 노예가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서양인들도, 이러한 ‘차꼬를 풀어주는’ 식의 해방 개념은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자각한 바 있다. 그리하여 19세기 후반 이후 20세기에 들어오면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생산수단으로의 접근을 강조하거나 자유주의 좌파들처럼 사회보장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해방’의 개념이 ‘사회경제적’ 차원이 첨가된 새로운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충분한가? 사람이 동물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제사상가 칼 폴라니가 목놓아 호소했던 것처럼, 인간은 삶의 목적과 이상을 가진 상태에 도달하기 전엔 햄릿 왕자처럼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비참한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꿈꾸는 ‘해방’의 이상은 압제로부터의 자유와 물질적인 수단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사는 세상’이란 인간들이 자기 삶의 기쁨과 의의를 발견하면서 다 함께 인생을 풍요롭게 발전시키는 세상을 말한다.

고작 ‘꼰대’로부터의 해방인가
고작 ‘꼰대로부터의 해방’인가. 이것이 서양 문명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이상인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스스로 발견하고 또 그것을 성취할 물적 수단에 접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꼰대로부터의 해방’ 은 기껏해야 ‘새로운 꼰대로의 종속’으로 이어질 뿐이다. 서양인들 스스로도 이 점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긴 했던 것 같다.

한때 영어 단어 emancipate는 ‘(새로운 주인에게) 노예 상태로의 전락’이란 역설적 어법으로 쓰인 적이 있었다. 1629년 촘리(Cholmley)도 ‘새로운 남편에게 묶인 부녀자(A wiues Emancipating herselfe to another husband)’란 문장에서 같은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20세기에 이어진 ‘해방운동’의 아이러니는 어쩌면 이 어법 안에 고스란히 암시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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