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지혜 '모든 가치의 재평가’   

 
 
홍기빈
 
 
 


저번 호의 글들에서 우리는 진보이념의 내용이 될 ‘인간적 가치'의 내용은 우리들의 집단적 실천을 통하여 발견되고 채워져야 한다는 논리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러한 집단적 실천을 시작하기 위해서라도‘초기치’로서 모종의 내용이 다시 필요해진다는 악순환의 딜레마에 부딪혔다. 사실 이 딜레마는 참으로 심각한 것이다. 준거할 만한 거의 모든 가치체계가 무너져버린 폐허에서 무엇을 붙잡고 그 ‘초기치’라는 것을 마련할 것인가.
이집트는 빠져나왔건만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은 도무지 나타나질 않고, 황량하게 펼쳐진 시나이 광야는 막막하기만 하다. 그 아득한 지평선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지쳐버린 히브리 노예들은 아무것이든 신으로 모시고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자기들 손으로 청동 염소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이게 된다. 우리도 1990년대에 이런저런 ‘우상의 유혹’이 개인과 집단적 차원 모두에서 삶과 정신을 휩쓸어가는 모습을 목도한 바 있다.
그렇지만 우상은 우상일 뿐이다. 청동 염소를 숭배하는 자는 고작해야 염소가 되고 말 뿐이다. 호랑이를 또 곰을 신으로 숭배하는 짓을 멈추지 않으면 영원히 호랑이, 곰일 뿐 결코 사람다운 사람은 될 수 없다. 개인의 삶이야 호랑이든 염소든 살고 싶은 대로 살다가 그저 무덤가의 핑곗거리나 엮어내고 사라지면 그만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함께 사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집단적 실천의 방향 설정에 있어서는 ‘초기치’조차 신중하고 책임있게 설정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개인의 차원에서는 지옥불에 타든 정말 염소, 돼지로 환생을 하든 어차피 그 당사자가 뒤집어쓰게 되어있으니 알 바 아니지만, 집단적 실천의 경우엔 그 초기치 설정이 잘못될 경우 그것을 몸으로 때울 이들이 언제나 우리들 중 제일 힘없고 못 배운 이들이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이 연재는 우리들이 머리를 맞대고 그 ‘초기치’를 신중히 마련할 수 있도록 논의의 의제들을 뽑아보는 작업이며, 이번 호에서는 그 대략의 이야기 틀과 방향을 제시할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사람들이 함께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시작할 수 있도록 고민의 제목들을 내오는 작업을 오래 전에 시작한 지혜로운 이가 있었다. 그러니 그가 짜놓은 이야기 방식과 고민의 방법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19세기 유럽 문명의 허무주의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맞닥뜨렸던 19세기 유럽 사회의 모습도 지평선 이외에 아무 것도 없는 ‘시나이 광야’와 닮은꼴이었다. 기독교 시대 이래 다양한 ‘인간적 가치’의 궁극적 근원의 역할을 하면서 유럽 문명을 떠받쳐왔던 것은 ‘신’이었다. 사람들이 ‘신’에 복종하는 한, 그리고 그 ‘신’의 명령을 구체화한 것으로 믿어지는 기독교의 가치체계가 절대적인 힘을 갖는 한, 이런저런 ‘인간적 가치’의 내용을 마련해 오는 일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그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인격체의 의지에서 그저 연역해 오기만 하면 되니까. 진리는 신의 말씀이기 때문에 진리이다. 윤리적 당위는 신의 명령이기 때문에 당위이다. 사회 질서와 그 권위는 신의 뜻이기 때문에 현실적 힘을 가진다…등등.
하지만 근대가 시작되면서 신은 서서히 병들어간다. 신이 노쇠해 가고 사람들의 믿음이 흔들리게 되면 이제 어떤 ‘인간적 가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신 이외의 다른 근거로 자신을 제시해야 한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는 이제 ‘신의 명령’에서 찾아질 수 없고 모종의 ‘합리적 설명’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진리도 진리로서 설득되려면 마찬가지로 수학적 방법이나 실험적 방법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름다움은 이제 우주의 진리나 윤리적 선과 무관한 ‘독자적 가치’로서 딴 살림을 차리게 되었고, 그 결과 보들레르나 말라르메 같은 천하의 ‘악의 꽃’들이 설치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그나마 조각조각 흩어진 각각의 ‘가치’들이 더욱 더 파편화되고 아예 산산이 흩어져버려 마침내 ‘허무(nihil)’의 두려운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노쇠한 신 대신 제반의 가치들을 통합하기 위한 절망적 노력으로서 ‘형이상학’이 시도되었으나, 그 거대한 구조물도 마침내 기둥부터 무너지는 증후가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아예 인간은 ‘신의 형상’은 물론 ‘이성적 존재’도 아닌, ‘원숭이의 자손’에 불과하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떠돌기 시작했다. 이제 ‘신’이 죽었다는 소식은 공공연한 진실이 되어버렸다. 모든 인간적 가치를 창조했던 그 거대한 나무가 길게 뻗어 누워버린 이상 이제 유럽 문명의 앞날에 남은 운명은 허무주의라는 독버섯의 창궐뿐이다.
하지만 니체는 허무주의자가 아니었다. 그가 정작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렇게 모든 가치가 산산조각 나버린 세상에서 어떻게 새로운 인간적 가치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였다. 그렇다면 그도 나름대로의 어떤 ‘대안적인’ 인간적 가치의 틀을 만들어 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까. 여기에서 니체에게도 우리가 봉착한 것과 비슷한 딜레마가 나타나게 된다. 지금까지 유럽 문명이 알아왔고 신봉해 온 모든 가치들이 그 근본부터 무너지는 상황에서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하여 그 ‘대안적 가치’의 구조를 건설한다는 말인가. 지축부터 뒤흔드는 지각 변동으로 인해 그 땅 위에 서 있는 모든 건물들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모조리 무너져내리고 있다. 그것을 피해 노천으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에게 ‘대피소’라는 간판을 붙인 또 하나의 ‘건물’을 들이대는 시도가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러한 문제점을 간파하지 못할 리 없는 영리한 니체는 그렇게 ‘새로운 가치체계’라는 것에 섣불리 뛰어들 리 없다.
그렇다면 과연 나치즘 신봉자들이 주장했듯,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오로지 ‘권력에의 의지’ 하나에 몸을 맡겨 천방지축 날뛰는’ 극단적인 주의주의(voluntarism)가 과연 니체가 선택한 해결책이었던가. 니체 연구자들이 철저하게 밝힌 바 있듯이 그 또한 니체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다. 인간보다 우월한 ‘초인(Uebermensch)’은 아리아 핏줄의 외침에 홀려 유태인들이나 학살하는 짐승떼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모든 가치의 재평가’: 땅이 무너질 때 솟아오르는 법


새로운 인간적 가치를 만들어 내기 위해 니체가 취한 접근법은 ‘모든 가치의 재평가’였다. 지금까지 인간 세계를 지배해 온, 하지만 지금 조각조각 무너지고 있는 그 수많은 가치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재어보고 이해하여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든가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바꾸어 버리든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망치를 휘두르는’철학 작업을 통하여 무너져가는 기존의 가치들을 폐기하고 전복시켜버리는 '이 모든 가치의 재평가’라는 전략이야말로, ‘노예들의 종교’였던 기독교가 로마 문명을 정복해버린 비결이었다고 니체는 본다.
기독교인들이 행했던 이 ‘가치의 전복’의 의의를 음미하기 위해 좀 단순한 예로서 ‘미덕’이라는 가치의 예를 들어보자. 오늘날의 우리에게 내려온 이 ‘미덕(virtue)’이라는 말의 의미는 보통 ‘내면의 강인함(inner strength)’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기독교 전통에서 내려온 ‘신학적 미덕’이라는 관념의 유산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이는 이 말을 ‘구원과 영혼 완성을 이루게 해주는 인간 내면의 성향’이라고 보았고, 그 구체적 요소로서 사도 바울이 말 한 ‘믿음, 사랑, 소망’을 들었다. 요컨대, 이 죄악과 유혹으로 꽉 찬 세상에 물들지 않고 천국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세 가지를 꼭 부여안고 버티는 ‘내면의 강인함’이 필요하다는 말이 되겠다.
그런데 그 말의 어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이렇게 윤리적 덕목과 칭칭 엮인 점잖고 성스러운 의미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 나오게 된다. virtue라는 말의 인도 유럽어 어원은 wiros라는 말인데, 이는 ‘남자’ 또 ‘힘있는 자’를 뜻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즉 그 원천에 있어서 이 ‘미덕’이라는 말은 ‘믿음 사랑 소망’ 같은 것 하고는 동떨어진 아주 적나라한 남성의 ‘힘’을 의미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늑대 인간’을 뜻하는 고대 영어인 werwulf 라는 말도 똑같은 어원에서 파생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미덕’이라는 말의 의미가 ‘늑대 인간의 무지막지한 힘’ 같은 느낌으로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이 말 본래의 ‘무지막지한’ 성격은, 기독교인들의 바로 앞 세대인 로마 시대에 쓰였던 virtus라는 말에서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 말은 ‘전투장에서의 힘과 용기’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그 내포적 심상이 남성의 성적 능력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었기에 로마인들이 연상하는 이미지는 한마디로 ‘힘차게 일어선! 남근’이었다고 한다. 외적이 쳐들어오거나 자연 재해 등등과 같은 예측불가능의 시련이 닥쳐올 때 남자란 무릇 그 ‘운명이라는 몹쓸 년(fortuna)’의 머리채를 나꾸어채서 고분고분 길을 들일 ‘배짱과 힘’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바로 ‘미덕'이라는 것이다. 즉, ‘말 안듣는 계집년’을 두드려 패주는 남자다운 ‘몽둥이’의 이미지가 그 로마시대의 ‘미덕’이었던 셈이다.


재평가의 힘: 몽둥이를 '믿음 소망 사랑'으로


도대체 어떻게 해서 ‘늑대 인간’의 ‘몽둥이’를 지칭하던 말이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의미로 탈바꿈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을까. 기독교가 퍼져가던 로마 제국 쇠퇴기의 사회적 상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로마가 아직 이태리 중부의 작은 나라에 불과하던 시절, ‘사람의 간을 산채로 파먹는 괴물’ 한니발 같은 무시무시한 적들이 사방에서 넘실대는 상황에서 ‘싸움터로 나가는 힘과 배짱’은 모든 공화국 시민들에게 요구되는 최상의 ‘미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평화를 지나면서 쇠퇴기에 들어선 로마 제국에서는 어떨까. 군대와 전쟁은 이미 횡재를 노리고 몰려든 잔혹 무도한 불한당 잡놈들의 잔치로 변해가고 있었고, 군인이 아닌 예전의 로마 시민들은 엄청난 재산가가 되었든가 아니면 돈 몇 푼으로 사육되는 인간 쓰레기 ‘프롤레타리(proletarii)’로 전락한지 오래이다. 스키피오나 케사르 같은 이들의 저 고전적인 ‘미덕’의 상징들은 이제 그저 옛날 이야기일 뿐, 그 ‘미덕’이 표상하고 있는 ‘가치’는 이제 사실상 무너져버린 상태이다.
이러한 로마의 전통적인 가치 체계가 위기를 맞게 된 것이 기독교라는 완전히 새로운 가치 체계가 전 유럽 문명을 지배해들어가게 된 배경이라는 사실은 로마사가들이 일찍부터 지적한 바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좀더 주목할만한 점은, 그러한 정복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이 단지 자신들의 새로운 가치 체계를 들이밀어댄 것이 아니라, 니체의 용어를 빌자면 ‘기존의 가치를 재평가’하여 완전히 다른 의미로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기원 410년 알러릭 왕이 이끄는 고트 족이 로마를 약탈하고 초토화시키는 사태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로마인들의 전통적인 그 ‘미덕’이라는 가치가 사라졌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동시대인들에게 받아들여졌고, 많은 이들은 저 ‘기독교인들의 평화주의와 전쟁에 대한 무관심’을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성 어거스틴은 이러한 비난을 피해 숨지도 않았지만, 어설프게시리 무슨 ‘예수의 뜻대로 다스려지는 나라를 세우자’라는 신정 통치를 ‘대안’이랍시고 들고 나온 것도 아니었다. 대신 그가 했던 일은 로마의 정치 사상의 초석이었던 키케로의 국가 이론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완전히 ‘재해석’하여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 험하고 불완전한 사바 세계에서 인간이 인간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들끼리 모여 공동의 정치 사회(civitas)를 건설하는 수 밖에 없다는 키케로의 주장에 그는 적극 공감하며, 따라서 그러한 관점에 함축되어 있는 로마의 정치 전통의 제반 가치들도 모두 받아들인다. 단 한가지 조건이 있다. 그렇게 모인 정치 사회의 최상의 공동 목표는 더 이상 키케로가 내걸었던 ‘국가의 영광과 물질적 번영’이 아닌 신과 영혼의 구원에 대한 사랑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어거스틴이 모두 ‘받아들인’ 것으로 보였던 로마 정치 전통의 모든 가치는 그 의미가 근본적으로 ‘재평가’될 수밖에 없게 된다.
로마의 번영과 팽창’이라는 키케로식의 가치는 이제 로마인들을 전쟁으로 끌고 나갈 영감의 원천이 되지 못한다. 사치와 안일에 젖어 한 몸뚱아리 사리기 바쁜 족속이 되어버린 로마인들에게 ‘공화국을 위해 몽둥이를 치켜세우자’라는 식의 ‘미덕’은 아무런 호소력도 없다. ‘기독교의 평화주의 때문에 로마가 약골이 된다’? 천만의 말씀. 지금 로마에 ‘죽음을 넘어서는 용기를 가진 인간’들이 ‘십자가를 지키기 위해 웃으며 사자밥이 되는’ 기독교인들 말고 누가 남아 있는가. 그리고 그들의 그 엄청난 헌신과 용기의 원천은 바로 ‘신과 영혼의 구원에 대한 사랑’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제 로마라는 나라가 다시 힘을 차리려면 오히려 모두 떼거리로 ‘신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질 철저한 기독교인으로서 정신 재무장하는 것뿐이 아닌가. 이 논리를 따르게 된다면, 사람들을 싸움터로 나가게 할 용기 즉‘미덕’이라는 전통적인 로마의 가치도 이제는 ‘껄떡대는 몽둥이’ 따위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내면의 힘의 원천인 ‘믿음 소망 사랑’으로 뒤바뀌게 된다.
정말 이 말대로 기독교가 북쪽의 정복자들로부터 로마를 구할 수 있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러한 식의 ‘가치의 재평가’가 다양하게 행해지면서 로마인들의 정신 세계를 정복해 들어갔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미덕’이라는 말도 그리하여 이후 15세기의 마키아벨리가 로마의 옛 전통을 기억해 낼 때까지 1000년 동안 그 의미는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것으로 완전히 변하게 되었다.


준비 작업으로서의 ‘가치의 재평가’


니체는 19세기 말엽 그렇게 생겨난 기독교적 가치의 유럽 문명도 마침내 그 천년 왕국의 운을 다하고 ‘허무주의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일 하나는, 그 상황에서 새로운 인간적 가치의 창조를 꿈꾸었던 니체가 그 전략으로서, 자신을 ‘적 그리스도’라고 선언하면서 부수려 달려들었던 기독교의 그 ‘모든 가치의 재평가’라는 방법을 집어들었다는 점이리라. 우리의 고민도 ‘진보 이념의 이론적 실천적 논의를 시작할 초기치’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서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그 ‘초기치’를 모색하는 준비 작업으로서 기독교와 니체의 본을 따라 ‘기존에 존재해온 여러 가치들의 재평가’라는 방법으로 시작해보는 것이 어떨까.
그 ‘미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좀더 이야기를 뻗어보자. 현재의 ‘미덕’이라는 가치도 이제 정말 ‘재평가’될 때가 오지 않았는가. 로마 시대의 ‘미덕’이라는 가치는 야만적이고 무지막지해보이기도 하지만,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책임과 의무’ 즉 시민적 도덕(civic virtue)의 정신이 강하게 깔려있는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그 ‘힘과 용기’는 다른 이들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에 그들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자기 스스로의 이익과 안녕을 마땅히 포기하고 전쟁터로 나서거나 재산을 헌납할 줄 아는 ‘힘과 용기’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 ‘미덕’이란 결국 다른 공동체 성원들로부터 어느 만큼의 존경과 인정을 받는가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기독교 문명이 들어서면서 나타난 이 근대적 의미의 ‘미덕’이 ‘개인의 내면적 정신’의 뜻으로 변하여 아주 고상하고 상큼하게 된 것까지는 좋다고 치자. 그런데 공동체의 이웃은 이제 어디로 갔는가. 한 쪽 구석에서는 집이 없는 가족들이 동반 자살로 또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 농민들은 할복으로 분신으로 ‘공동체’를 떠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부동산 투기로 구역질 날만큼 축재한 원정 출산으로 또 그 ‘공동체’를 떠나고 있다. 그 후자의 개개인들을 만나 보라. 대다수가 교회를 사찰을 드나들며 독실하고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미덕’의 소유자들이다. 조직적 체계적인 학살을 벌여온 서구의 긴 역사 속에서 콜롬부스에서 부시 럼스펠드에 이르는 그 학살의 주범들은 또 나름대로의 ‘미덕’을 갖춘 이들이 아니었는가. 서구인들 개개인들을 만나보라. 선량하고 나이스하고 친절한, 그야말로 ‘미덕’ 투성이의 사람들이 아직 더 많다. 서구 사회는 그렇게 ‘미덕'투성이 개인들로 범벅이 되어있건만, 어째서 아프리카 사람들은 서구에 대한 빚더미로 인해 질병과 굶주림에 쓰러져가고 있으며 또 다른 쪽에서는 미제 프랑스제 폭탄이 계속 터지고 있는 것인가.
‘공동체 정신’을 빌미로 마초주의 냄새 풀풀 나는 그 야만적인 로마의 ‘미덕’을 부활시키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미덕’을 개인의 내면의 문제로 한정시켜서 공동체에 대한 연대 의식과 실천력을 마비시켜온 이 근대적인 가치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다. ‘대안적 이념과 가치'가 준비 안되었으면 그냥 잠자코 있으라는 식의 윽박지름에도 더 이상 기죽어서는 아니된다. 현존하는 이념과 가치들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또 어떻게 위기에 처하고 있는가를 밝혀 ‘재평가’하는지 시작해보자. 최소한, ‘초기치’를 마련하기 위한 지혜는 분명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진보적 이념을 건설하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수행해야 할 ‘재평가’ 작업은 어느 현재정도의 시간적 공간적 지평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이는 21세기 한반도라는 시공간을 어떠한 역사적 시간 지평에서 자리매김할 것인가 라는 문제와 닿아 있다. 다음 호에서부터 이야기해 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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