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간적 가치’를 창조   
 
 
홍기빈
 
 
 
이 ‘인간적 가치’라는 것은 실로 수만 개의 쟁점과 논쟁이 걸려 있는 지뢰밭 같은 주제이다. 소크라테스에서 니체에 이르기까지, 웅녀 할머니에서 테레사 수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전 역사는 어쩌면 그 문제의 답을 찾아 헤맨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 문제를 깊게 파고드는 것은 필자의 알량한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연재의 취지를 어기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 논의의 초점은 분명 진보 진영이 뚜렷한 독자적 정체성과 방향을 가지고 정치·사회 변혁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것으로서의 ‘이념’이다. 그런데 자칫 길을 ‘삼천포’로 잡았다가는 복잡한 철학 논쟁이나 윤리·도덕의 가치판단 문제로 빠질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논의는 항상 구체적인 역사적·사회적 경험과의 연결이라는 맥락에서만 이루어지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연재의 초입인 이번 호와 다음 호까지의 연재에서는 어느 정도 추상적·이론적 논의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진보 이념의 경계선을 더듬어 본다는 일은 현재 이정표도 길도 확실하지 않은 허허벌판을 걸어나가야 하는 일종의 ‘사유의 모험’인 셈이다. 따라서 어떤 방향과 순서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인가에 대해서 일정한 확인을 해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출발점에 말뚝을 박고 대략의 방향을 잡고 시작해야 도중에 길을 잃고 같은 곳을 빙빙도는 일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 함께 가는 독자 분들도 호흡을 맞출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적 가치’ :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대립

양희은의 노래 가사 중에 “사랑이라 우겼더니 / 사랑이 떠나더라 / 사랑이란 그런 게지 / 마음에만 숨은 게지”란 구절이 있다. 혹시 그 ‘인간적 가치’라는 놈도 그런 게 아닐까. 각자의 마음 속에 있을 때는 적어도 자신에겐 그토록 분명하고 확실한 게 없어 보이는데, 일단 말로든 행동으로든 밖으로 끄집어 내어 다른 사람에게 들이밀게 되면 그 즉시 이상한 것으로 바뀌어버리는 물건이 아닐까.

그런데 그렇게 덧없이 조변석개하는 상태로 그 ‘인간적 가치’란 것을 놓아두면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나 원칙의 기초로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사회 구성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시간적 안정성’이니까.

따라서 그 각자의 ‘마음에만 숨은’ 인간적 가치라는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진, 선, 미’와 같은 어떤 객관적 개념이나 존재로 대상화시켜 놓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윤리, 도덕, 법률이 생겨나며, 진리의 체계인 ‘도그마’가 생겨나고, 고대 그리스 예술에서의 ‘균형, 균제, 조화’ 등과 같은 미의 객관적 기준이 생겨난다.

각자 마음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가치로 여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객관적 기준에 합치하는 것은 ‘인간적 가치’요, 그러지 못한 것은 ‘금수’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어 사회로부터 내침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겨난 ‘가치’에서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도출한다. 같은 방식으로 ‘사회가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가’의 해답도 자연히 나오게 된다.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그러한 삶을 살도록 최대한 강제하는 것이 사회의 존재 근거이기 때문이다.

인간적 가치를 이렇게 ‘객관적 체계’로 고정하는 것엔 여러 문제점이 따르지만, 가장 주요한 것 중 하나는 그렇게 고정된 ‘객관적 가치의 체계’라는 것은 거의 예외없이 억압적인 틀로 전화해버리며, 지배계급의 이익과 연결되는 경우 - 이는 거의 예외없이 벌어져온 일이다 - 기존 체제를 수호하는 이데올로기로 타락해버린다는 것이다. 대서양 끝의 가톨릭 교회에서 태평양 끝의 조선 성리학까지 구대륙의 역사에서는 그러한 사태의 사례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근대 이후로 이렇게 ‘인간적 가치’를 바깥으로 끄집어내어 ‘객관적 체계’를 만들어 내는 일은 숱한 도전을 받아왔다.

루터, 데카르트, 샤프츠베리를 거쳐 형성되는 근대 시민사회의 정신적 기초는 사실상 이 같은 ‘제도화된 객관적 가치의 강제’라는 전통 사회의 틀을 거부하는 것에 있다. 이 거부는 진리, 윤리, 아름다움을 개개인의 내면에 내재한 이성, 오성, 감성의 확신에 두었던 것으로 어찌 보면 다시 ‘인간적 가치’를 ‘마음에만 숨은’ 것으로 되돌린 셈이다.

그래서 칸트 등은 이 같은 전환이 주관주의의 불확실성과 변덕으로 다시 후퇴하는 것을 막고 최소한의 보편성의 법칙을 부여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해야만 개인 내면의 자유와 사회 전체의 안정성이 동시에 보호되는 근대 시민사회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칸트의 시도는 현실적으로는 물론 이론적으로도 그 성공 여부가 상당히 불안한 것이었다. 그가 보편성의 단초로서 부여잡고자 했던 이성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삶의 의지’의 발현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이미 쇼펜하우어로부터 나오면서 19세기 말 이후의 세상은 주관주의와 비합리주의의 지배로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칸트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간 ‘공리주의’의 방향이다. 사람에게 어느 만큼의 ‘쾌락’이나 ‘효용’을 낳는가, 즉 ‘주관적인 만족을 가져다 주는가’를 인간 사회의 절대지고의 가치로 모시고, 상이하고 무수한 그 가치들을 이 기준에 따라 일괄적으로 재평가한다는 사고방식이다.

니체도 말한 바 있지만, 이러한 공리주의적 사고는 자신 스스로의 중심성과 ‘객관성’을 주장하는 모든 가치 체계에 대한 주관주의적 냉소와 허무주의에 기초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인간 위에 절대적으로 군림하며 인간을 억압하는 어떤 가치 체계도 용납되지 않는다. 인간은 오로지 그의 ‘쾌락’과 ‘효용’에 기여하는 한에서 또 정확히 그만큼 이런저런 가치를 믿기도 하고 따르기도 한다.
앞에서 ‘인간적 가치의 객관적 체계’라는 것이 결국 억압적인 것으로 변해버리기 쉽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젠 ‘공리주의’가 내세우는 주관적 ‘효용’과 ‘쾌락’의 원칙에 근거해 인간사회를 만들어 나간다면 우리는 모든 전통적 형이상학 체계의 억압에서 풀려날 수 있는 것일까. 그래서 각자의 마음 속에 내재한 주관적인 ‘인간적 가치’를 흠뻑 실현하면서 살게 되는 것일까.

철학자로서 보자면 벤담은 칸트와 같은 거인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존재일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현대의 시장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의 기초는 칸트의 고결한 정신보다는 벤담의 속물적 원리에 훨씬 더 크게 힘입은 바 있다. 심지어 민족 국가의 주권조차 금융 시장의 할인율로 ‘재평가’해버리는 이 21세기의 ‘지구적 규모의 시장 사회’야말로 그러한 공리주의적 ‘유토피아’에 가까운 모습이리라. 실제로 제도권의 철학자들, 정치학자들, 경제학자들은 떼거리로 몰려나와 이 지구적 시장 자본주의가 곧 전 인류를 자유롭고 풍요한 약속의 땅으로 데려다 줄 것이며, 이에 ‘역사는 해피엔딩으로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팡파르를 울린다.


공리주의의 지구적 유토피아?

여기서 묻자. 여기 사는 우리는 지금 ‘인간적 가치’를 실현하며 자유롭게 살고 있는가. 시애틀의 시위대가, 칸쿤에서 할복한 어느 농민이, 몸에 불을 지른 어느 노동자가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에는 ‘화폐적 효용’으로 평가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인간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들이 지금 그 ‘화폐적 효용’의 논리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는 고발이 아닌가. 이 함성은 관변 지식인들이 장담하듯 시간이 지나고 지구화가 진전되면서 잦아들기는커녕 지난 10년간 가속적으로 커져오고 있지 않은가. 이에 맞선 현 세계의 자본과 권력은 ‘화폐적 효용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은 가치가 아니’라고 강변하며 그 ‘공리주의’의 지구적 유토피아를 오늘도 밀어붙이고 있다.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이 ‘인간적 가치’라는 문제와 관련, ‘객관주의’의 횡포와 ‘주관주의’의 횡포를 한번씩 나란히 겪은 셈이다. 하지만 ‘인간적 가치’의 실현은 요원하고 인류의 문명은 오늘도 그와 빗나간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는 불안이 팽배하고 있다. 5백 년 전 서양인들이 가톨릭 교회라는 ‘객관주의’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도한 몸부림의 출발점은 ‘인간적 가치’를 전면에 세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었다. 이 지구적 시장이라는 ‘주관주의’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한 21세기 인류의 몸부림이 또 다시 ‘인간적 가치’를 앞세우고 터져나오는 것도 그래서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새로운 21세기의 르네상스는 어떤 틀로 이 ‘인간적 가치’를 담아내야 할 것인가.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라는 두 번의 실험은 이미 큰 대가를 치른 바가 있지 않은가.


변증법적 전통 : 인간적 가치는 우리가 창조하는 것이다

이제 서양 사상에서 인간적 가치를 ‘관념’하는 세 번째 전통인 변증법을 살펴볼 때가 된 것 같다.

변증법이라는 말은 무척 많은 뜻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인간의 주관적 내면과 객관 세계는 서로 서로를 만들어나간다’는 의미이다. 눈앞에 주어져 있는 세상은 우리의 주관적 내면과 전혀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 세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연은 제쳐놓더라도 최소한 인간 세상은 인간 스스로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눈앞의 ‘객관’ 세계의 이런저런 것들도 옛날 언젠가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 낸 것일 터이며, 그 선조들이 그런 것들을 그런 모습으로 만들어낼 때에는 무슨 ‘생각’을 갖고서 그렇게 했을 터이다. 미술품이 화가 마음속의 이미지를 펼쳐낸 것인 것처럼, 이 ‘객관’ 세계라는 것도 결국 그 선조들의 ‘주관’ 세계가 밖으로 실현된 것에 불과한 셈이다.

게다가 우리의 ‘주관’이라는 것도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눈앞에 주어져 있는 세상을 들여다보고 겪으면서 머리가 트이고 생각이 생겨난다. 눈앞에 주어져 있는 ‘객관 세계’의 경험이 아니라면, 새로운 창조를 낳을 상상력과 영감이 나올 원천이 없다. 즉, 인간 세상의 주관과 객관은 세상을 관찰하고 또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는 정신적 능력 그리고 그에 따라 세상을 바꾸어나가는 실천 활동을 ‘매개’로 하여 그야말로 ‘변증법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인간적 가치라는 것도 꼭 ‘객관적 체계’로 머물러 있거나 ‘주관의 마음 속에 숨어’ 있거나 해야 할 이유가 없다. ‘객관적 가치체계’는 변화하는 인간 세상과 그것에 끊임없이 직면해야 하는 보통사람들의 삶의 현실에 아랑곳 않는 고정된 도그마로서 군림하면서 억압적인 것으로 변해 간다.

‘인간적 가치’에 대한 극단적인 주관주의와 상대주의는 그것들을 ‘마음에만 숨은’ 것으로 만들어 우리의 현실을 향상시키는 힘을 완전히 거세해버리며, 결국 ‘화폐적 효용’의 전횡을 어쩔 수 없는 것, 심지어 바람직한 것으로 맞아들이고 말았다.

그러나 ‘인간적 가치’에 대한 변증법적인 관점을 취한다면 다른 길이 가능하다. 어제의 선조들이 ‘인간적 가치’라고 만들어 객관세계에 심어놓은 것들에 얽매일 이유가 없다. 일단 나의 ‘주관’이 그것을 이해하게 되면 상상력과 사유를 통해 각자의 변화된 환경과 상황에 맞도록 스스로의 가치로 변형·발전시키는 일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하여 새로이 변형된 가치들이 그 개개인들의 ‘마음 속에 숨어’ 있기만 하라는 법도 없다. 어제의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오늘을 사는 우리도 우리가 합의하고 공유하는 가치들에 따라 세상 현실을 새로이 바꾸어 후손들에게 물려주면 된다. 그것을 새로이 바꾸어 가는 것은 또 그들의 몫이며, 이렇게 하여 ‘인간적 가치’의 내용은 그야말로 ‘변증법적’으로 운동·변화한다.

요컨대, 만고불변의 객관적 가치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으며, ‘인간적 가치’란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면서 변화해 가는 것이다. 신비한 것도 신성한 것도 아니다. 인간이 현실 세계를 더 이상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활동을 보조하는 ‘설계도’에 불과한 것이다. 또 그것이 ‘설계도’인 이상 개개인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세상을 변화시키면서 현실에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관점도 멀리는 신약 성서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꾸준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비꼬(Giambattist Vico)와 마르크스가 남긴 커다란 공헌은 한 걸음 나아가 그러한 창조와 실천의 주체가 ‘집단적 인간’이며, 그것도 ‘인류’ 등의 추상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먹고 살려고 아등바등하면서 몸에 흙을 묻히는 우리 아랫집에 사는 구체적 이웃들을 지목했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적 가치’에 대한 이러한 변증법적 관점이 흔히 민주주의나 사회주의 사상의 기반으로 연결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것이다. 억압적 가치를 들이대며 봉건적 질서를 강요하는 전통적 지배 계급은 말할 것도 없고, 대안적인 인간적 가치를 사회 전체에 실현하려는 일체의 노력에 대해 주관주의와 상대주의를 앞세워 냉소를 퍼붓고 ‘시장 독재’를 강요하려 했던 부르주아 계급에 대해 맞서야 했던 사회주의 운동과 민주주의 운동은 ‘사람들이 함께 뭉쳐 집단적인 가치를 창출해 내자’는 관점에 기반을 두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정치 전략으로서의 ‘인간적 가치’ : 헤게모니와 지적·도덕적 개혁

이 ‘인간적 가치’의 문제에 담겨있는 정치적인 함의를 날카롭게 의식하고 발전시킨 사람이 그람시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구체적인 현실의 정치전략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그저 ‘사상’ 수준의 것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탈리아 공산당 당수였던 안토니오 그람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 계급과 농민들이 정권을 잡는 것은 르네상스 이래 몇백 년간 지체되어 온 이탈리아 사회의 ‘지적·도덕적 개혁’을 그들이 이루어내어 새로운 ‘인간적 가치’를 사회 전체에 제시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보았다.

즉, 새로운 ‘인간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단지 도덕적 당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아니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라는 전략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평등하고 윤리적인 인간적 삶을 보장하는 인간적 가치의 창조와 그것을 풍부히 실현하는 공화국의 건설’이라는 것은 실로 마키아벨리 이래 몇백 년에 걸친 이탈리아인들의 염원이었다. 하지만 1860년대 이탈리아 통일과 함께 나타난 부르주아 국가는 그렇게 근본적인 가치의 혁명을 통한 지적·도덕적 개혁은 커녕 타협과 협잡에 의해 유지되는 ‘수동적 혁명’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었다. 결국 노동자 농민이 새로운 ‘헤게모니’ 집단으로서 우뚝 서는 것은 그렇게 부르주아들이 배반해버린 ‘민족적·민중적’ 규모의 지적·도덕적 개혁을 떠맡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람시의 정치철학이 본격적으로 이탈리아 바깥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60년대 말 이후이다. 당시의 그람시 붐에 깔려 있던 문제 의식은 ‘혁명으로 노농 권력 쟁취’라는 교조에 묶여 있던 ‘구좌파’와 절연하고 의회 민주주의가 정착된 서구 국가에 맞는 변혁 전략을 짜야 한다는 선진국 좌파들의 고민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의 의미도 자꾸 ‘담론적 실천을 통한 시민사회에서의 정당성 확보’라는 수준으로 협소하게 이해되어 온 감이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헤게모니의 획득이란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깊이에서 정치·경제·사회 제도는 물론 예술, 문학, 종교, 교육 전반에 걸친 새로운 ‘인간적 가치’의 창출을 뜻하는 것이었다. 감옥 속에서 결핵균에 척추뼈가 썩어들어가던 공산주의 혁명가가 이탈리아 문학사 연구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것은 그래서이다.


가치의 창조: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

요약하자면, 진보진영의 기치 아래 ‘집단적 실천’을 통해 새로운 ‘인간적 가치’를 창조하는 것만이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는 길이라는 말이 되겠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풀린 것인가?

지난번에 필자는 ‘진보의 이념’이란 곧 ‘인간적 가치’의 실현이 되어야 한다고 했고 동시에 그 ‘인간적 가치’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찾아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놓고서 ‘함께 뭉쳐서 만들어 나가자’라고 대답한 셈인가. 터놓고 말해서, ‘진보 진영 깃발 아래 함께 모여 이리저리 뭉쳐다니다 보면 다 무언가 내용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소리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그러나 이 연재의 당초 의도는 1990년대에 걸쳐 진보진영의 깃발과 울타리라는 것 자체가 모호해지면서 ‘집단적 실천’도 답보상태에 빠지는 악순환이 발생했다는 것, 그리고 그 고리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진보 이념의 지평’을 더듬어 보는 노력이 별도로 병행될 필요가 있다는 것 아니었던가.

진보 이념의 구체적 내용은 집단적 차원에서의 이론과 실천의 교호 작용을 통해 채워 나가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출발점에서 이 같은 논리로 답을 회피해서는 아니 되며, 고민이 시작되어야 할 지점을 분명히 제시해야 할 것이다. ‘무에서의 창조’란 없다. 새로운 가치의 창조란 앞에서 본 변증법의 지혜가 가르치듯, ‘현존하는 모든 가치의 재평가’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소렐은 『폭력론』에서 ‘미리 계획된 모든 정치강령을 집어던지고’ 곧바로 총파업과 각종 파괴행위를 벌이는 것만이 좌파 운동이 오염되지 않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현실에 실험되었던 결과는, 아나코 생디칼리즘 운동이 야기한 무수한 희생과 파시즘의 출현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음 호에서는 이 ‘현존하는 모든 가치의 재평가’란 모험을 어떤 방향과 계획으로 해나갈지에 대해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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