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마 나기사, 御法度
그렇다면 정 또는 인정이라고 불리는 일본인 특유의 정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그것은 일본을 대표하는 문학작품으로 손꼽히는 [겐지이야기] 속에 잘 드러나 있다. [겐지이야기]는 뛰어난 미모를 지닌 일본 황실의 귀공자 겐지와 그의 아들이 2대에 걸쳐 여성편력을 벌이는 이야기를 감상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아름답게 그려낸 소설이다. 이것이 일본을 대표하는 문학작품으로 손꼽히는 까닭은 겐지 부자의 일대기가 '타고난 자연스러움'에 따르는 일본적인 삶의 전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윤리나 도덕 대신 인정이나 욕망에 몸을 맡기는 삶을 살아가는데, 그것은 이들이 인정이나 욕망이야말로 사람의 자연스런 마음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씨의 이름은 등호(藤壺)였다. 과연 얼굴이며 자태가 이상하리 만치 죽은 동호와 비슷했다. .... 죽은 동호에 대한 임금의 그리움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 잊을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지만, 애정은 자연히 등호에게로 옮아가서 각별한 위로를 받았다. 이것도 사람의 자연스런 마음이었다. ( 무라사키 시키부, [겐지 이야기])
주목해야 할 것은 이같은 인욕의 삶에는 반드시 쓸쓸함의 정감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엔카의 애상이나 벗꽃의 허무로 대표되는 일본적 감상주의의 본질이다. [겐지 이야기]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일본인 특유의 정서를 한눈에 보여준다.
가는 길가에 그 여인의 집이 있었습니다. '거친 매축지(埋築地)의 허물어진 곳에서 달마저 쉬어가는 집에 내가 그냥 지나갈 수는 없지요'라고 하면서 그가 그 집 앞에서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전부터 정을 주고받는 사이여서일까 그 사람은 몹씨 들떠있는 것 같았습니다. 중문 근처의 덧문 밖 툇마루에 앉아서 잠시 동안 달을 쳐다 보더군요. 빛이 바랜 국화가 퍽 아름답게 보이고, 바람에 다투듯 지는 단풍들이 과연 슬픔을 느끼게 하는 정경이었습니다.
이같은 정경 속에 존재하는 사람의 정이나 인정에 다음 장면에서 배어나오는 것 같은 쓸쓸함이나 슬픔이 덧칠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풍경화 속의 인물이 풍경을 닮아가는 것처럼.
두중장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겐지가 물었따. "그래서 편지는 무슨 내용이었나요?" 그거요. 별로 중요한 것은 없었습니다. '산에 사는 사람의 집담은 거칠어졌어도 때때로는 정이 담긴 이슬을 뿌려 주세요. 담 위에 피는 패랭이꽃 위에.' 이것을 보고 생각이 나서 여인의 접에 갔는데, 여느 때처럼 맺힌 감정이 없는 태도이긴 했으나,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칠어진 집의 뜰 안에 내린 이슬을 보면서 벌레 우는 소리에 지지않으려는 듯 울고 있었습니다. 그 애처러운 모습이 옛이야기에 나오는 사람 같았습니다."
일본 국학의 완성자 가운데 한 사람인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이처럼 정이라고 불리우는 일본인 특유의 정서를 모노노아와레라고 이름 붙였는데, 그가 모노노아와레의 전범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겐지 이야기]였다. 참고로 덧붙이면 모노노아와레는 마루야마 마사오에 의해 'sadness of things'로 번역되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감동을 받는 것은 바로 사람이 타고난 마고코로(眞心)에 들어맞는 것이며, 감동을 받지 않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은 마치 나무와 돌맹이와도 같다."라고 한 것이야말로 노리나가의 주정주의(主情主義)이며, ... 노리나가의 문학론은 ... 이런 것들은 모두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이므로, 누구나 그런 감정이 일게 될 것이다. 그런 정이 없다면 마치 바위나 나무와도 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그려낼 때, 마치 어린 여자아이처럼 어쩔줄 몰라하며 맹한 부분이 많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여 '마스라오 부리'(호쾌한 남성스러움)의 한층 더 깊은 곳에 있는 심정에서 우타모노가타리의 본질로서의 모노노아와레(sadness of things)를 찾아냈다. ... '노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인 '모노노아와레'는 그대로 신토 그 자체의 본질로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
타고난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인간의 정이 이처럼 비애의 감정으로 귀결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중국의 작위 대신 일본적 자연을 내세운 국학의 자연주의가 자연의 배후에 존재하는 초인격적인 神을 창조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 타고난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일본적인 삶이란 결국 신이 마련한 길(神道)에 순종함으로써 신의 은총을 구하는 삶인 것이다.
[이웃집 토토로]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 같은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정령적인 자연의 세계는 국학적 자연주의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끝없는 감탄사를 자아내게 하는 정령적인 자연은 신의 작위(作爲)를 상징하며, 그 속에서 유영하듯이 살아가는 동심의 인간은 인간의 무작위(無作爲)를 상징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신의 세계에 우연히 발을 들여놓은 인간의 이야기다. 그곳의 음식에 허락없이 손을 대었다가 돼지로 변하는 치히로의 부모는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지키지 않고 상급의 위계질서에 천방치축 끼여드는 불순종(不順從)으로 인하여 벌을 받으며, 그곳의 위계질서를 지혜롭게 살펴서 적절한 일을 맡는데 성공한 치히로는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지키는 순종으로 인하여 은총을 받는다.
신이 마련한 길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는 순종을 통해 신의 은총을 구하는 것이랄까. 순종과 은총의 함수관계 속에서 은총을 대가로 순종을 강요당하는 거세된 존재인 일본적 인간상이 그들의 마음에 달콤한 비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인에게 있어 거세된 순종을 의미하는 無作爲의 자연스러움과 달콤한 비애를 의미하는 모노노아와레는 하나인 것이며, 따라서 조선예술론의 '무작위의 미'와 '비애의 미'도 하나인 것이다. 신을 정점으로 해서 인간 사회의 위계질서로 이어지는 은총과 순종의 함수관계, 이같은 일본 국학의 핵심을 토대로 하여 피어오르는 미가 무작위의 미와 비애의 미인데, 야나가 무네요시는 이같은 위계질서의 끄트머리에 한국인과 한국 예술을 끌어들이고자 한 것이다.
금빛 기쁨의 기억 - 한국인의 미의식, (강영희, 일빛) p.82-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