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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
박홍규 지음 / 우물이있는집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책 표지를 봤을 때 박홍규님이 문화적 아이콘이 되어가는 것일까하고 생각했다. 덥수룩한 수염과 다부진 매무새가 멋지다. 책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의 요약적 가이드이자 한국적 아카데미 풍토와 날림 번역 고발서이고 사이드의 학문적 방법론(특히 지암바티스타 비코와 관련하여)에 대한 해설서다.
제국주의 논의에서 기존의 연구는 정치나 경제의 측면에서 다뤄졌는데 사이드가 새롭게 부각시킨 바는 제국주의의 문화적 과정이다. 이는 제국주의적 제도, 경제, 정치에 활력을 불어넣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요소들로, 문화는 단순히 제국주의의 반영 혹은 그것에 인과적으로 종속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의식적이든 아니든)공범적 관계에 있게 된다.
이런 접근방식은 서양이 보수적 학풍이 견지해 왔던 서구문명의 정전 수립과 기념비화라는 구축적 경향에 대해 도전적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정전화와 기념비화는 종교(혹은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에 가깝다. 서구인들이 자의적으로 비서구인의 종교적 속박을 안타깝게 여기지만 서구문명에 대한 기념비적 숭고화은 결국 또 다른 아편에 불과하다. 서구인들은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제국주의보다는 고전그리스나 고대 로마 공화정에서 기원한 것 혹은 카톨릭 신정체체로부터의 인간주의적이고 이성주의적 해방(혹은 합리화)에 기원한 것으로 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실상 서구 민주주의는 그런 뜨악한 기원보다는 식민지 쟁탈전이란 폭력적 과정과 더 뜨껍게 통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사실에 부합한다.
흔히들 휴머니즘과 개성의 시대라고 칭송하는 르네상스 시대는 기호품 쟁탈전의 시대(리사 자딘의 <상품의 역사>)였고 그 탐욕은 제국주의 시대까지 쉼없이 지속되어 식민지 쟁탈전으로 귀결되었다. 식민지 지배에서 얻은 물질적 이득은 대중의 제국주의 정책과 문화의 지지기반이 되었고 식민지배국 사이의 주도권 싸움은 결국 (국민적) 대중동원의 필요성을 불러왔다. 이러한 필요 때문에 대중 소비와 보통 선거라는 유인책이 제공되었고 여기서 서구 근대 민주주의가 시작된다. 식민지 착취를 둘러싸고 절대권력과 국민대중이 결탁한 결과가 바로 알량한 근대 서구 민주주의의 실상인데 이 때 서구 문학은 서구 민주주의의 천박함을 은폐, 가장시키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정한 '세계문학'의 목록은 많은 부분이 절취되어야 하고 특히 19세기 문학작품들은 대거 삭제되야 한다. 일방적 특수성과 이기적 이해에 절어있는 문학작품에 감히 '세계'라는 보편적 수사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각성이 서양을 버리고 동양으로 회귀(회복)하는 것으로 귀결되어도 안된다. 동양이란 서양이 만든 남루한 판타지에 불과한데 그걸 쫓는다는 것은 서양의 잔재에 또 다시 포박당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박홍규가 들려주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몇가지 방법들을 소개한다. 우선 가장 기초적으로 스스로 행동하고 읽고 묻고 만나고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둘째, 타인을 억압하거나 조작하지 않고 자유 옹호의 관점에서 다른 종류의 민족과 문화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셋째, 문화를 고양되고 숭고화된 영역으로 다루지 않고 세속적인 연관(secular afiliation) 속에서 보아야 한다. 수직적 체계(기원, 영향, 결과/목적)로 구축되는 문화적/문명적 정체성이 아니라 수평적 연관(특히 작가와 작품의 경우)으로 펼쳐서 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 목소리로 대변되던 작품(혹은 문화)을 억압된 목소리와 함께 대위법적으로(contrapuntally) 다시 읽어서, 궁극적으로 제3의 통합된 대안적 목소리가 창출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하나의 대안적 목소리가 가능할 때 더 이상 동양과 서양의 구분따위는 필요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