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예찬 - 17세기 네덜란드 회화 다시 보기
츠베탕 토도로프 지음, 이은진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토도로프는 수잔 손탁을 연상시킨다. 어떤 점에서 그렇냐하면 비평적 태도에서 있어서 소박함을 견지하려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토도로프는 문학을 삶의 진실과 윤리적 가치를 희구하는 인간적 노력의 견지에서 바라본다. 작품을 물질이나 역사의 부산물로 보거나 반대로 그 무엇으로부터도 독립(절연)된 작품 그 자체로 보는, 두 가지 극단적 경향 모두를 거부하고 작자, 독자, 사회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그들의 삶, 윤리 등의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는 과정에 주목한다. 수잔 손탁이 그녀의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작품과의 만남이 해석을 위한 해석 또는 이론을 위한 해석으로 전락되는 꼴을 피하고 작품과 감상자가 직접 만나 일으키는 스파크, 혹은 에로틱한 국면에 몰두하라는 충고와 유사하다. 소박하지만 강렬한 만남을 견지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츠베탕 토도로프와 수잔 손탁이 추구하는 바가 아닐까?

토로로프의 이런 비평적 태도는 이 우아한 17세기 네델란드 장르화에 대한 에세이에서도 견지된다. 그에 따르면 일상적인 것이 처음으로 회화의 필수적 요소로 자리잡은 것이 이 당시 네델란드의 장르화다. 이전의 회화들 속에서는 聖과 俗의 이분법 하에서 신적인 것은 고귀하고 탁월하며 이상적인 것, 인간적인 것은 열등하고 평범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다뤄졌다. 신적 세계는 완벽한 세계라면 인간의 세계는 결핍된 세계였다. 이 때 회화는 결핍된 인간 세계에 인간 너머의 이상적인 것을 지시하는 알레고리로 기능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17세기 네델란드 장르화에서는 일상적인 것 안에서 성과 속의 이분법이 그려진다. 일상적인 것 안으로 성스러운 것이 포획된 것이다.

쟝르화 속에서 성과 속의 이분법은 가정 對 세상, 실내 對 실외, 미덕 對 악덕 등의 구도로 등장한다. 책에 가장 처음 등장하는 '야콥 오흐테르벨트'의 [거리의 악사들]이란 그림은 이 구도를 제대로 보여준다. 아마도 네델란드 쟝르화가 여기서 그쳤다면 토도로프의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한 걸음 더 나간다. 그 대표로 토도로프가 소개하는 화가는 '헤라르트 테르보르흐'와 '피테르 드 호흐'다. 이들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기존의 이분법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자는 모호성과 복합성으로, 후자는 초월성으로 그렇게 한다. 나는 이 둘을 현미경적인 태도와 망원경적 태도로 이름붙이면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테르보르흐의 그림 속에서는 미덕과 악덕의 판에 박은 도덕적 구조 대신 감상자가 인물과 상황들 속으로 빠져들어 헤메도록 만든다. 실내와 실외의 명확한 구분은 마당을 배경으로 하여 모호해지고, 미덕 대신 인물들의 모호하고 복잡한 심리에 빠져들게 만든다. 미덕과 악덕의 이분법은 그 속에서 모호해진다. 이는 마치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얻는 일상에 대한 현미경적 접근을 연상시킨다. 반면 호흐의 그림은 망원경적이다. 호흐의 실내는 문을 통해 실외와 통하고 그곳에서 빛이 들어온다. 인물 중 하나는 반드시 빛의 원천을 향해, 혹은 무심하게 허공을 향해 시선을 던진다. 그들은 일상 속에 있으나 일상의 바깥을 응시한다. 그것은 천체 망원경의 기능과 유사하다. 지구에서 우주를 보고자 하는 인간의 망원경이다.

이 과정을 통해 화가는 미덕의 명령을 수행하는 메신져가 아니라 일상에서 미덕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심지어 만들어내기까지 하는 존재로 변신한다. 회화는 단지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환히 드러내주는 빛의 원천'이 된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일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사실주의나, (시대를 앞선) 베르메르처럼 작품 자체가 어떤 외부적 참조없이 자기 참조적인 완결이 되는 미학주의가 온다. 그러나 토도로프가 사랑하는 것은 사실주의나 미학주의의 두 극단이 아니다. 그에게 그 둘은 인간들이 실제 삶에서 마주하는 절실한 의문들을 과학이나 미학의 도그마로 밀어내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 이 둘은 서로 대화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 대신 삶의 진실과 가치에 대한 소박한 질문을 통해 외부로 열려있는 테르보르흐나 호흐의 그림에 더 매혹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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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9-17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나왔을 때 수첩에 적어넣어 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간달프님, 잘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