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진중권 미학 에세이 2
진중권 지음 / 아트북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우선 imatio와 mimesis에 대해 말해야겠다. 전자는 근대 미학이 추구하는 바이고 후자는 모더니즘 예술과 탈근대 철학/미학이 추구하는 바다. imatio의 미학이란 '수학'을 모범으로 삼은 것일게다. 진리는 수학공식처럼 나의 바깥에 있으며 나는 그 진리를 혹은 대상을, 내 머릿속에 혹은 화폭이나 오선지에 감각적으로 복사한다.

mimesis의 미학이란 '예술'을 모범으로 삼는 것일게다. 여타 행위(특히 수학)와 유별되는 예술행위의 본래적 특징은 환원이나 반복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왜 그런가하면 예술행위란 단지 대상을 복사하는 일이 아니라 대상과 자신(작가나 감상자)이 서로 분리불가능해지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를 '존재론적 닮기'라고 짧게 설명한다. 카멜레온이 제 몸 색깔을 주변에 섞어버리는 것과 같다. 이는 대상과 거리를 둔채 미적 관조를 행하는 근대미학의 태도와 정반대다. 본래 예술이란 것은 작가든 감상자든 그대로 내버려두질 않는다. 변화시키고 생성시킨다. 예술에서의 진리는 모방하는 데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하는 가운데 열리는 것이다. 미메시스의 미학이란 예술을 본래의 예술답게 만들라는 소릴까?

미메시스의 최고봉은 '숭고'일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행위('사건', '작품의 개시')을 고스란히 반복한다(혹은 '현전'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껏 반복은 부정적인 방식으로나 얼핏 가능해진다. 십자가가 미니멀할수록 예수의 희생에 더 가까와지는 방식이다. 뭔가 안타깝고 절박한 느낌이다. Less is more! 책에서 소개한 조각가 뉴먼의 길이고 철학자 리오타르의 길이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현대 예술에는 이런 숭고의 위계를 전복시켜버리는 경향도 있다. 이는 원본(예술행위)을 사본더미 속에 실종시켜 버리는 방법이다. 시뮬라시옹이다. 원본과 사본의 구별이 불가능한 차원까지 마구 복제하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 무엇이 아쉽고 무엇이 부족하리오? More is more! 보드리야르는 (실재의) '사라짐'을 말한다. 많아질수록 사라진다. 실재는 흔적만 남는다. 시뮬라르크와 숭고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 같은 결승라인에 도달한다.

내 우스운 연상인지 모르겠지만 '숭고'하면 천국의 문이 떠오르고 '시뮬라르크'하면 지옥의 문이 떠오른다. 숭고를 통해 다다를 수 없는 엑스타시의 정점을 애처롭게 갈구함를, 시뮬라르크를 통해 영겁에 걸쳐 같은 것이 무한반복되어 폐허 혹은 사막처럼 쌓이기만 하는 무감각, 무의미으로의 내처침을 느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천국과 지옥은 똥고를 맞추고 있다. 재미있다. 20세기 초 독일의 세 선각자로부터 시작해서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암묵적 후계자로 이어지는 이 강의는 저자의 센스있는 요약과 인용으로 읽기 쉽고 재미나는 강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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