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아나키즘
숀 쉬한 지음, 조준상 옮김 / 필맥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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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차원에서 아나키즘은 무질서가 아니라 자생적/자율적 질서를 신뢰한다. 또한 권위가 아니라 권위주의를 거부한다. 또한 인간을 특정한 유형으로 고형화(물화)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아나키스트에게 자본주의가 거부되는 이유는 인간을 이기적 개인으로 미리 규정하고 자본의 억압적 시장 질서가 인간들 사이에서 생성,변화하는 자생적 질서를 밀어내며, 시장경쟁에 의한 승자와 패자를 자연스런 것으로 인정하고 승자의 일방적 권위, 즉 권위주의의 질서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아나키즘은 '방종'이 아니라 '자기 창조'의 능력을 신뢰한다. 일방적 권위(즉 권위주의)에 순응하는 것도 방종이다. 왜냐하면 자기 창조의 임무를 져버리고 자기 자신을 일방적 권위의 지배 아래에 내팽개쳐 버렸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방종과 자기 창조 사이를 확연히 구분짓는 질적 요소가 바로 '용기'라고 생각한다. 용기없는 자는 자신을 권태 속에 방치한다. 여기서 자포자기한 백수든 성실한 직장인이든 다를 것은 없다.

숀 쉬한은 아나키즘의 사회적이고 개인적 차원은 각각 맑스와 니체의 혜안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저자는 맑스의 '노동하는 인간'과 니체의 '유희하는 인간'은 주요 강조점이 서로 다르지만 아나키즘의 큰 틀 속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다고 본다. 맑스가 꿈꾸는 '소외없는 노동'과 니체가 꿈꾸는 '목적으로서의 유희'는 그다지 멀지 않으며 그 둘은 아니키스트적 인간에게서 종합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아나키스트적 인간은 우리가 흔히 딱지붙이듯이 전체주의의 황당스런 반대 극단 따위가 아니다. 저자는 '아나키스트적 긴장'을 말한다. 그것은 저자가 르귄의 소설 <빼앗긴자들>에서 보았듯이 '고독과 연대성 사이에 필연적인 역동성에 대한 자각'이다. 자칫 이 긴장을 놓치면 우리는 자폐적 개인주의로, 아니면 반대로 권위주의적 전체주의로 빠져 버린다. 이런 면에서 보면 아나키즘은 돌연한 극단이 아니라 건전한 상식이다. 이런 통찰력은 전에 접했던 김상봉의 그리스 비극 읽기와 일맥상통했다.

리뷰의 끝은 이문열에 대한 곁가지 이야기로 잇고 싶다. 이문열을 흔히 한국을 대표하는 문호라고들 쉽게 말한다. 나도 수긍한다. 단지 한국이란 나라를 자생적 질서의 문화가 고사된 나라라고 규정하는 한에서 수긍한다. 그에게 인간(민중)이란 깡패든 예수든 초민중적이며 권위적인 전위에 의해 인도되어야 할 어리석은 존재일 뿐이며 그의 작품 속에서는 인간들 사이의 자생적, 자율적 질서에 대해서는 별다른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엄석대의 깡패적 지도자가 신임 교사의 포고령 민주주의로 대치될 뿐, 어디에도 급우들 스스로의 자유와 자율의 자리는 배려되지 못하며, 이문열의 분신인 주인공은 어색하고 음습하게 수긍하며 경멸하고 푸념할 뿐이다. 패전 직후 요시다 시게루가 美 GHQ의 과감한 민주화 조치에 버럭 반기를 들며, '일본인은 자치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강변한 것과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충군유학, 천황제, 군사독재를 한 아버지로 섬긴 사람들의 비참한 말로다. 그런 면에서 이문열은 분명 한국을 창피스럽게 대표하는 문호다. 이 한국의 문호가 빠져버린 극단에 대해 아니키즘적 상식으로 균형점을 잡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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