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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의 로렌스 (2disc) - 아웃케이스 없음
데이비드 린 감독, 오마 샤리프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데이빗 린은 항상 '문제적 인물'과 '그 인물이 이국적 상황에 던져지는 사건'에 대해 관심이 많은 듯 합니다. '문제적 인물'이란 기존의 평범한 도덕적 구분으로는 도데체 그 정체를 알기 힘든 모호한 인물을 말하죠. 아시아권 영화에서는 이런 개인을 다룬 영화가 드문 반면 서구영화에서는 이런 문제적 개인을 다룬 영화가 영화사에서도 굵직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손 웰즈의 [시민케인], 마틴 스콜세지의 [성난 황소]나 프란시스 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룩]이 대표적이지요. 이런 모호한 인물들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삶에 대해 자기만의 고유한 원리를 추구하며, 이를 진창같은 삶 속에서 맹렬히 추구해 나가죠. 반면 아시아의 경우, 뿌리깊은 집단주의와 가족주의 덕인지 이런 유형의 인물을 다룬 영화가 아주 드물고 영화사적으로도 주변에 위치하는 듯 합니다.
'당신의 누구요.'
사막의 두 부족을 연합시켜 터키군을 학살하고 아카바를 함락한 로렌스가 자신의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수에즈 운하에 이르자 한 경비병이 로렌스에게 그렇게 묻습니다. 영화는 이 대사에 힘을 주고는 잠시 관객에게 침묵의 시간을 던져줍니다. 과연 저 로렌스는 정체가 뭘까? 서구 제국주의의 주구에 불과할까? 아니면 사막의 유목민들에게 민족의식과 단결을 일꺠운 지도자일까? 그도 아니면 피와 명예에 굶주린 학살자일까? 혹은 섬세한 정신의 예술가적 기질의 소유자일까?
로렌스에게 다음과 같이 묻자, 로렌스는 대답합니다.
'당신은 왜 사막을 좋아하나요?'
'깨끗하니까...'
로렌스는 순수한 정열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시적 감성을 소유한 자로 결코 기계적 명령에 죽고사는 군대에 어울리는 인간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단 내부에 자가발전기를 장착하면 어떤 군인보다 더 강한 군인이 됩니다. 때때로 너무 강해서 악마적 측면까지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는 양날의 칼이지.'
로렌스를 이용해 아랍군을 조직하여 터키군을 제압하고자 했던 영국의 장교는 로렌스에 대해 저렇게 정의합니다. 아마 영화 속 대사 중에서 로렌스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그 정체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일 겁니다. 우선 그는 아랍군의 멋진 칼이며, 대영제국의 칼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다른 사람들의 칼이면서 그 스스로의 칼이기도 합니다.
로렌스에게 주변의 여건은 자신의 꿈과 의지를 펼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에게 사막과 아랍은 시적 소재였던 겁니다. 그의 시적 충동은 그를 도데체 어떤 편에도 완전히 포함시킬 수 없는 모호한 인물로 만듭니다. 그는 때로 영국편이기도 하다가, 때로 아랍편이기도 하며, 때로 선의의 편이기도 하다가, 악마적 파괴의 편이기도 합니다. 종국에 가서는 그는 아무의 편도 아닙니다.
로렌스는 그 자체로 어떤 편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인물이며 그 자신만의 운동원리를 가지고 거친 세파를 헤쳐나가는 해괴한 영웅입니다. 이 해괴한 영웅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습니다. 하지만 또 많은 사람들이 영화의 핵심을 빗나가고 오직 스펙타클에만 빠져들기도 했지요.
[아라비아의 로렌스]류의 문제적 개인 혹은 영웅의 이야기들은 개인주의적 풍토가 탄탄한 문화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자신의 삶을 자신만의 고유성에 근거해서 예술적으로 창조하고자 하는 충동이야말로 개인주의의 정점이며, 그 정점에서는 사회적 윤리나 정체성은 부차적인 것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기존의 어떤 범주로도 완벽히 포위되지 않고 끊임없이 미지의 영역으로 탈주하는 개인이지요. 그 개인은 가족도 친구도 국가도 민족도 결국 자신의 시적 완성을 위한 소재에 불과합니다. 그는 도덕의 피안에 존재하며 도덕의 안에 감금된 우리를 보잘 것 없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