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없는 정복 - 글로벌 자본주의와 국가의 죽음
노리나 허츠 지음, 조영희 옮김 / 푸른숲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이 일러주는 기업 지배 사회의 모습은 나에게 언뜻 팀 버튼의 음습한 수퍼영웅 영화인 '배트맨'을 떠올리게 했다. 거대한 빌딩 숲의 고담시에서 시민이나 시장(혹은 정부)은 악당에게도 영웅에게도 무력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 악당(조커)과 영웅(배트맨)은 절묘하게도 둘 다 기업가 혹은 자본가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조커는 빠르게 부를 축적하는 신흥 기업가라면, 배트맨은 이미 벌만큼 벌어놓은 기성의 거대 자본가란 점 뿐이다. 한 녀석이 고담시를 혼돈의 상태로 만들면 다른 녀석이 나와서 질서를 바로잡는다. 이 시계추 운동에서 고담시 시장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밤하늘에 배트맨에게 우리를 구해달라고 써치라이트를 켜는 일 뿐이다.

이런 당혹스런 세계는 오히려 우리의 현실에서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책에서 소개한 조지 소로스의 경우를 보자. 공교롭게도 그는 배트맨처럼 망가진 가정 출신이고, 자신을 그만큼 성장시켰던 세상에 대해 자기 부정적인 적의를 드러낸다. 소로스는 한편으로는 정치인들이 자신을 주목하게 하기 위해 잉글랜드 은행과 파운드화를 굴복시켰던 검은 수요일 사태를 일으켜 영국인 1인당 12파운드씩의 손해를 입히는 일을 저지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열린 사회'를 모국 헝가리에 전염시키기 위해 복사기를 무제한으로 비밀 공급하는 작전을 서슴치 않았고, 최근에는 새롭게 등장하는 글로벌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에 대해 험한 경고를 하는데 말을 아끼지 않는다. 이 해괴한 아이러니...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지속적으로 국가 정치 영역이 시민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정치인들은 기업에 종속당하며 기업이 전통적 복지국가의 역할을 대신하고 심지어 사회 정의를 위해 여타 시민단체보다 더 급진적인 노릇을 하는 전도된, 그러나 현실인 세계를 보여준다. 정부의 고객은 이제 더 이상 시민이 아니라 기업이 되었고 정부는 사회에 돌아가야 할 복지를 기업으로 돌린다. 기성의 정치적 장이었던 투표장과 의회는 이제 슈퍼마켓과 관공서의 로비로 대체되어 여러 시민운동 단체들마저 더 이상 정부를 상대하지 않고 기업을 상대한다. 우리는 시민의 요구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해 고담시 시청으로 가봤자 시장님은 결국 써치라이트를 켜고 사장님들을 불러모으는 것으로 해결을 보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가 간파하고 있듯이 이런 전도된 세상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며 효과적인 것도 아니다. 언론, 정치 등의 공공적 영역이 끊임없이 사유화되는 과정에서 우리 시민의 삶은 결국 변덕스런 시장에 좌우되는 (이윤 획득이 우선 목표인) 기업들의 변덕스런 결단에 좌우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계화라면 단호히 거부해야 하나 세계화란 것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것을 제어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힘을 길러야 한다. 이 때 국가의 위상은 중요하다. 기업의 비서관으로 전락한 국가를 본래의 자리로 돌려세우고 전세계적으로 네트워크화된 시민의 힘과 연결시켜야 한다는 것이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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