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는 없다
윤구병 지음 / 보리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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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잡초'라는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잡된 것과 잡되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것은 누구인가? 자연은 본래 잡된 것과 잡되지 않은 것을 구분한 적이 없다. 그런 짓을 한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자연을 잡된 것과 잡되지 않은 것으로 나누었다. 우리는 자연 본래의 모습을 망각하고 도구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연관은 과학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된다. 경험과학의 목적은 무엇인가? 진리의 발견? 그것은 아니다. 경험을 분석하고 분해하여 이론화함으로써 자연을 인간의 이해에 어울리는 도구로 만들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 경험이란 인간의 경험적 한계 내의 것이란 점에서 이미 제한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이를 통해 구성한 지식을 구체적 자연에 투사하고 적용했다. 이로 인해 과학자들은 저자 윤구병이 말한 것처럼 '살아있는 폭탄'이 되어갔다.

'실제로 내게는 당신들이 모두 폭탄으로 보인다. 아니 한 걸음 물러서서 폭탄을 가지고 노는 어린애들처럼 보인다. [...] 당신들이 분해하고 해체해놓은 것을 다시 조립하고 합해서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놓을 길조차 모르고 있으면서 왜 파괴를 일삼고 있는가?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그러한 전일적(holistic) 인식은 과연 인간에게 자유의 여지를 남겨두는가이다. 인간의 자유는 전체의 싸이클 혹은 네트워크 속에서 증발하기 십상이다. 이 때 인간에게 남겨진 일이라고는 그 전체적인 은혜, 그 우주적인 관계를 찬양하는 일 뿐이다. 도교적 시가들이 소재는 다르지만 주제면에서 거의 다르지 않다는 것은 그것을 암시해준다.

우리는 과학 자체의 부정이 아니라 19세기를 통해 그 형태가 굳어진 과학(경험과학류)의 변혁, 즉 좀 더 이상적인 형태의, 진리로 진격하는 과학으로의 변혁을 노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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