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과 대학 - 냉전의 서막과 미국의 지식인들
노암 촘스키 외 지음, 정연복 옮김 / 당대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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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 우리시대 문고로 출간된 홍기빈의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란 책이 있다. 저자는 그의 서문에서 서울대 경제학과의 몇몇 교수들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들은 경제학과의 커리큘럼을 하바드 경제학과와 똑같이 만들자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더란 것이다. 그들은 경제학을 미국이든 한국이든 각각의 독특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무시한 채 도매금으로 적용될 수 있는 '과학'이라고 믿는 맹신 풍조에 절어있다. 그걸 아무런 의심도 없이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한국놈들도 문제지만 대체 그런 '미국적 보편'은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자그마한 실마리가 노엄 촘스키의 글 '냉전과 대학' 속에서 르포처럼 전해진다. 전쟁 전에는 지적으로 유럽에 종속되어 있는 미국 지식계의 열등의식이 전쟁을 거치면서 그 태도가 180도로 배타적인 배척과 경멸과 오만으로 바뀌어 버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계적인 언어학자였던 로만 야콥슨이 미국으로 망명했을 때 아무도 그에게 교수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주변부에서 맴돌게 하기도 했다. 50년대를 지나면서 이런 자폐적인 미국 중심주의가 지식계에 만연하게 되었고 유럽의 전통은 순식간에 형편없는 것으로 매도당했다.

그 속에 절어있던 젊은 촘스키가 본격적으로 자기 공부(언어학)에 매진하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것은 미국 언어학자들 자신의 최신 발견과 이론이라고 하는 것들이 이미 몇 십년, 심지어는 몇 백년 전에 유럽에서 다 다뤄져 있었더라는 창피한 현실이었다. 그런 미국의 학풍이 과거의 유럽적 신비주의와 자랑스럽게 결별했다고 내놓은 학문 패러다임이 바로 '행동주의'였고 그것은 전가의 보도로 활용되었다. 그들은 행동주의를 보편과학으로 상정, 세계의 지식을 접수하고자 했다. 물론 그것이 천편일률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진짜 문제는 그걸 천편일률적으로 성서처럼 받아들이는 우리의 몇몇 전문가 바보 지식인들의 한심한 작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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