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고양이에 관한 우습고도 놀라운 진실
리처드 토레그로사 글 그림, 이상원 옮김 / 푸른숲 / 2000년 5월
평점 :
품절


그렇습니다. 이 책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단편적인 사실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들은 저에게 일종의 끝없는 연상작용을 일으키게 했고, 몇 가지 다른 책들이 머릿 속에 떠오르도록 만들었습니다. 다음은 그 결과입니다.

제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은 '개와 고양이'라는 짝패를 다룬 책들에 기대어서 '인간을 보는 두 가지 시선'입니다. 개와 고양이에 대한 팩트들로부터 시작해서 개와 고양이가 넌지시 암시하는 각각의 인간성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이분법을 형이상학적인 의미로 확장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팩트들부터 수집해 볼까요? 리처드 토레그로사의 [개와 고양이에 관한 우습고도 놀라운 진실]이란 책을 소개합니다. 개와 고양이에 대해 구체적이고 다양한 사실들, 일화들을 담고 있지요. 개는 주인을 나폴레옹으로 알고, 고양이는 주인을 친구로 안다죠? 그래서 그런지 쿠빌라이칸은 수천마리의 개를 키우는 애견가였고, 나폴레옹은 불현듯 출몰하는 들고양이를 두려워했답니다. 군주적 인간은 개를 좋아하고 고양이를 두려워 합니다. 미국에서 고양이를 키우는 주인들은 95%가 고양이에게 말을 건다더군요. 반면 개를 키우는 주인들은 말을 거는 대신 자기 말을 무조건 따르도록 훈련을 시키지요. '굴러!', '손 줘', '누워', '일어나!' ^^ 개는 동족을 만나면 방방 뛰면서 꼬리를 흔들며 시끄럽게 짓어대죠. 허나 고양이는 마치 부처 앞의 마하가섭처럼 저희들끼리 조용하게 씩 웃어줍니다. '염화미소!'^^

자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 볼까요? 프랑스의 좌절한 철학자이자 성공한 소설가인 미셀 뚜르니에에게로 가봅시다. 그의 [소크라테스와 헤르만헤세의 점심]입니다)는 개와 고양이를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는 개념틀로 이용합니다. 개는 들척지근 한 것을 좋아하지만 고양이는 질색을 합니다. 고양이는 쓴 것을 얼마든지 감내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안락한 달콤함을 역겨워한다는 점에서 아주 독립적이죠. 반면 개는 끊임없이 자기를 보살펴주고 자기에게 명령내려줄 주인 혹은 집단을 찾습니다. 장콕도는 이를 가르켜 경찰견은 있어도 경찰고양이는 없다는 말로 대신합니다.

뚜르니에는 개와 고양이의 성정을 통해 일차적 인간과 이차적 인간이란 두 부류의 인간을 유추해냅니다. 일차적 인간이란 주어진 것을 알파와 오메가로 아는 사람을 말할 겁니다. 그는 현실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과거와 미래는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지요. 반면 이차적 인간은 노스텔지어와 유토피아, 즉 이미 지나간 것과 아직 없는 것에 더 집착하지요. 그래서 이차적인 인간은 현실에서의 감각을 그리 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뚜르니에의 글은 고양이 옹호론 냄새가 납니다. 뚜르니에 자신이 실제로 수도승처럼 전원에 틀어박혀, 고양이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자세를 낮춘 채 고립을 즐기고 있는 모습 자체가 그걸 말해주지요. 뚜르니에의 글을 보던 저 역시 그의 글발에 말려들어 고양이를 숭배하게 되었지요.

이제 이야기를 좀 형이상학적인 차원으로 한 층 더 올려놓아 봅시다. 문학평론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송상일의 [국가와 황홀]을 승강기로 삼겠습니다. 그는 '존재와 무', '국가와 시(즉 황홀)'을 마주 세웁니다. '존재'는 국가, 질서, 얼, 주체, 사유, 안(內)에 복무합니다. 반면에 '무'는 아나키, 얼빠짐, 니르바나, 구멍, 바깥(外)에 봉사합니다. 여기서도 개와 고양이의 성정이 교차할 듯 합니다. 개는 주인(국가 혹은 질서)으로부터 존재(주체)를 부여받고 이에 충실히 복무합니다. 반면에 고양이에게 주인은 자기의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고양이는 그저 문틈 사이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자기 수염이 흩날리게 놔두는 상태를 더 좋아하겠죠. 존재 대신 고양이는 미궁(즉 구멍)을 탐험합니다. 미궁의 끝은 적멸의 경험이고, 그것은 시의 영혼이지요. 시의 영혼은 그래서 창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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