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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 회화의 괴물 ㅣ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84
크리스토프 도미노 지음 / 시공사 / 1998년 12월
평점 :
품절
'이성과 대상'은 서구의 근대가 설정한 인식의 패러다임이다. 대상은 고정되고 정형화 되어 있고 이성은 논리적인 거울을 통해 그 대상을 온전히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패러다임을 회화적으로 구현함은 르네상스 회화로부터 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화가이면서 꼼꼼한 자연과학자였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라.
그러나 현대로 들어서면서 이성과 대상은 각각 물렁물렁해지기 시작했다. 이성은 논리의 골격을, 대상은 그 딱딱함을 잃고, 이성 대신 의지, 대상 대신 에너지로 전회되었다. 의지는 논리와 맞서며 기존의 논리를 부수고자 한다는 점에서, 에너지는 그 비가시적인 부정형의 벡터며 운동이라는 점에서 모두 동적이다. 대상에 대한 관찰은 일방적이고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부정형적이다. 니체는 세계야말로 힘에의 의지일 뿐이라고 선언한다. 이 와중에 베이컨의 그림이 놓이게 된다.
그의 그림은 의지와 에너지의 그림이다. 그가 그린 인물들은 가시적성이 강요하는 일정한 모양으로 고정되는 것을 거부하며 하나의 모양에서 다른 모양으로 가는 '힘' 그 자체를 포착하고자 한다. 힘 그 체는 표상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그의 그림은 표상될 수 없는 것을 가시적인 매체로 표현하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야말로 현대예술의 충동이 아니던가?
그의 인물그림들은 자주 프레임이나 프레임 내의 또 다른 프레임을 설정한다. 그는 무정형의 힘을 쫓는 와중임이면서도 동시에 정형화된 프레임을 유독 강조한다. 유명한 교황의 초상을 패러디한 그림 속의 일그러진 교황은 프레임 속의 프레임 속에 들어있다. 정형성과 무정형성의 극한 대립을 의도한 것일까? 개념적인 정형과 개념 밖으로 뚫고 나오려면 무정형의 대립말이다. 지상의 정형화된 개념으로 교황만큼 적절한 상징도 없다.
그 외에도 베이컨은 양복입은 중년 남자를 짓이겨 놓기도 한다. 우산 아래, 난자된 소고기를 배경으로 아가리를 쩌억 벌리고 선 중년 남자... '날 꺼내줘! 날 이 검은 소복에서 꺼내줘! 내 살들이 다 제 갈길로 갈갈이 떠나가게 풀어줘!' 라고 절규하듯이... 그는 날 것이 되고 싶어 한다. 각지고 날선 양복을 찟어버리고 익명의 살조각으로 풀어져 버리고 싶어 한다. 회화의 괴물을 그렇게 자신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