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끝에서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강 / 1997년 3월
평점 :
절판


루마니아 태생의 프랑스어 산문가 에밀 시오랑의 이야기는 항시 한 쪽 끝과 그 반대 쪽 끝이 선천적으로 맞물려 있다. 그과 소위 '절망과 허구'의 사색가로 낙인찍인 이유의 근원에는 바로 위와 같은 사고틀이 버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 그에게 매력을 느낀다. 가장 좋은 것은 가장 나쁜 것과 머리과 붙어 있고, 행복은 불행 속에, 불행은 행복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논리는 비논리와 불륜의 관계를 맺으며 인간사를 조종한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에밀 시오랑이 제기하는 해법은 다음과 같다.

'당신의 불행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혐오하라. 모든 것을 뒤섞고 모든 것을 휘저어라. ... 누가 알겠는가 - 당신이 이길는지. 당신들이 진다고 해도 무슨 상관인가? 이 세상에서 얻을 것이나 잃을 거이 있겠는가? 얻는 것이 곧 잃는 것이고, 잃는 것이 곧 얻는 것이다.'

모든 것들을 마구 뒤섞어 버릴 수 있는 자, 그래서 삶의 두 극단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자만이 간신히 뭔가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다. 그는 그렇게 불을 뿜는다.( '내게 제기되었던 - 한번도 제기되지 않았던 - 모든 질문들에 대한 대답으로 불을 뿜어야 할 것 같다고 느낀다.') 그런데 '지혜'에 의존하는 사람은 그런 불이 없다. 그들에게 오는 것은 혐오스런 자기 만족과 비겁함과 소심함이다. 그들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남들의 움직임을 품평하고 격언을 선사해준다. 이렇게 지혜로운 사람의 삶은 모순과 절망이 없는 이유로 해서 공허하고 비생산적이다. 모순을 피하지 말라. 모순이 이끄는 절망을 몸소 흡수하라. 그것이야말로 공허한 삶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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