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이후 예술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1
이상빈 지음 / 책세상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다가 흥미로운 현상에 대해 알게 되었느데, 쇼아나 홀로코스트에 대한 영미쪽의 태도와 독일과 프랑스 같은 대륙계의 태도가 좀 상이하다는 점이었다. 영국과 미국 쪽에서 쇼아는 별 장애없이 끊임없이 다양한 예술장르에 의해 미학화되었던 반면, 독일과 프랑스는 미학화에 대해 머뭇거림과 신중함이 배어나온다는 사실이다. '쇼아'란 인류 역사상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필연적 본성의 발현일까 아니면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극악한 악의 현시일까?

영미계가 역사적으로 쇼아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왔기 때문에 쇼아를 추상화된 악으로 단순화시킬 수 있었던 반면 대륙계의 신중함에는 그런 전자의 태도가 배여있는 듯 하다. 우리는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발표했을 때 그녀의 '악의 평범성' 개념이 영미계 인사들의 호된 질책을 받았음을 기억한다. 영미의 승전가들에게 쇼아와 홀로코스트는 바다 건너 그들, 혹은 타자의 일이지 자신들 속에 내재된, 그래서 누구에게나 들러붙어 나오기를 기다리는 평범한 어떤 것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쇼아의 실행 주체였던 독일인과 독일에 일지감치 항복해서 그것을 거들었던 프랑스인들에게 쇼아는 자신의 끔찍한 상처를 까발리는 일이었으니...

쇼아 문제는 또 하나의 문제를 야기했다. 그것은 소통의 문제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을 수 있는 것만을 믿는 경향이 있다. 쇼아의 생존자의 증언은 마치 지옥에서 생환한 사람들이 지옥경험을 늘어놓는 듯이 들린다. 생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을때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시큰둥하고 빗나간 듯한 반응은 증언자가 입을 스스로 다물게 한다. 란츠만의 [쇼아]에 등장하는 증언자들의 얼굴표정이 바로 그랬었다. 그들은 그 지옥같던 시절을 왁자하게 지껄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웃는 듯 우는 듯한 굳은 얼굴로 어정쩡하게 서있다. 아마 이 모순적인 상황으로부터 역시 쇼아를 경험했던 철학자 엠마뉴엘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론이 도출된 게 아닐까? 우리는 그들의 경험 앞에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된다. 우리가 그들의 경험 앞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은 침묵과 눈물, 그리고 내 자신 속에 만연한 악에 대한 참회다.

이 책은 20세기 중반 이후 유럽문화 속에서 '쇼아'가 차지하는 위치를 문학, 역사, 영화에 걸쳐 따져보고 있다. 저자 역시 느끼는 문제지만, 무슨 이유인지 한국의 아카데미즘은 유럽을 이해하는 단초로써 '쇼아'를 지속적으로 배제한 듯 하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나는 이 역시 결국 일제부역자들의 나라로써 쇼아적 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한국의 청산되지 못한 지배문화가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우리의 지배층은 인간의 존엄을 무차별적으로 짓밟아 온 대동아공영권에 자의든 타의든 결탁해온 인물들이었고 그들은 조선인 강제징용이나 강제 위안부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쇼아를 남의 일처럼 느끼고 싶어 하는 내면 심리의 결과가 아닐까? 역사는 이런 식으로 또 제자리로 돌아올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비관이 다시금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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