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
테리 이글턴 지음, 김준환 옮김 / 실천문학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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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자코비는 그의 <유토피아의 종말>(모색, 2000)에서 서구 자유주의의 맥빠짐 혹은 길잃음 현상은 유토피아주의의 상실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자유주의는 유토피아주의와 보수주의 사이의 긴장 관계 속에서 활력을 유지하며, 끊임없이 정의라는 차원을 각성해왔는데, 유토피아가 역사의 종말이 통속적으로 운위되는 상황에 빠지자, 자유주의는 상대주의와 무력감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그대로 포스트 모더니즘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테리 이글턴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급진적 운동이 패배한 상황에서 나타난 실패의 결과물로 본다. 이 실패로 인해 사람들은 총체성, 역사, 주체와 같은 고전적 개념들을 포기해버리고 표류하면서 그 대신에 문화주의에 입각한 탈정치적, 탈경제적 이론으로 좌절된 정치적 욕망을 표출한다는 것이다. 이런 양상은 우리 한국의 좌파들에게도 잘 적용될 듯하다. 소위 문화주의적 좌파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다.

이글턴이 비판하는 것은 후기 근대주의 전체의 양상이 아니다. 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급진적 운동이 실패한 상황에서 문화주의에 입각한 급진적 이론의 아성을 세우고, 그 속에서 놀면서 정치적으로 좌절된 시대의 현실상을 외면하려는 경향이다. 따라서 그의 비판의 주요 표적은 후기 근대주의가 조장하는 '문화적 상대주의, 도덕적 관례주의, 회의주의와 실용주의, 연대와 규율적 조직에 대한 혐오, 정치적 행위에 대한 적절한 이론의 부재' 등이 된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마비상태 대신에 포스트 모더니스트적 좌파들이 얻은 것은 이 마비상태를 무화시켜줄 정교한 이론이었다. 그래서 전형적인 레닌주의자들은 전형적인 라캉주의자가 되고, 프랑스적인 염세주의 냄새를 짙게 풍기는 푸코주의자가 되고, 계몽주의 역사의 목적은 무의식적으로 아우슈비츠였다고 스스로 믿게 된다. 그들은 이글턴에 의해 풍자의 대상이 된다.

이글턴은 자신을 '위계질서적, 본질주의적, 목적론적, 메타-역사적, 보편주의적 인본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주공격목표가 되는 이 용어들을 그들보다 더 급진적인 것으로 다시 해석한다. 그래서 거꾸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옹호하는 반대용어들, 즉 수평적, 반본질주의적, 탈목적론적, 탈역사적, 탈인간적, 반보편주의적 이란 말들이 현대 자본주의 문화에 대해 가장 보수적이고 순응주의적인 논리로 해석되어지는 묘한 아이러니를 집어낸다. (그러고 보니 데리다가 많이 쓰는 수법이다.)

이로써 자폐-이론적인 문화주의적 좌파의 자기보호 논리는 내파된다. 거대담론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거대담론을 혐오하는 거대담론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들어가 사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최근에 문제된 구겐하임 중심의 뉴욕 추상미술과 미국 씨아이에이 사이의 기묘한 연관설에 대한 기사가 떠올랐다. 이 주장을 한 사람에 의하면 소비에트 트랙터 미술 대신에, 진정성을 열망하며 변혁을 갈망하던 열혈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을 몰두하게 해줄 소스가 필요했고, 이런 기묘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잭슨 폴록을 비롯한 전통파괴적이면서 이론지향적인 작가들을 키워냈다는 것이다.

이들의 등장과 함께 예술, 그리고 지식인들은 현실변혁의 의지 대신에 캔버스와 이론의 의지에 매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이름만 다를 뿐 같은 몸덩어리에서 나온 다른 얼굴인 듯 하다. 위협적이지 않는 한 건드리지 않는다. 선만 넘지 않는다면 적당한 일탈(혹은 이론만의 일탈)은 그것은 체제가 가하는 스트레스를 완화시켜주는, 그래서 궁극적으로 원래의 체제를 교묘하게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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